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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여성 파이오니아’ 프로젝트
올해 일본에서는 그동안 영화사 속에서 잊혀지고 경시되었던 여성 영화인들의 작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본영화의 여성 파이오니아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일본영화사 연구자이며 교토대학 대학원 교수인 기노시타 치카(木下千花) 씨가 그 중심에 있다. 8월 말 도쿄에서는 영화상영 행사가 열렸고 9월 말부터는 온라인 상영회도 시작됐다.
▲ 일본영화의 여성 파이오니아 프로젝트 중에서 ‘모치즈키 유코(望月優子)와 히다리 사치코(左幸子)-여성 배우 겸 감독의 눈길’이라는 제목의 영화상영회 안내 포스터에 있는 사진. |
여성 영화인은 왜 사장되었을까?
기노시타 치카 교수는 일본영화에서 여성 파이오니아(pioneer, 개척자)를 발굴하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의 제2물결 페미니즘 이후 여성 영화감독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0년대에는 페미니즘 이론과 함께 영화사 연구도 활발해졌죠. 그러면서 과거 여성 영화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오래된 영화가 아카이빙되고 초기 영화를 실제로 볼 수 있게 되면서, 무성영화 시대에 여성 영화인들의 큰 활약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 1970년대에 활발하게 일어난 ‘우먼리브’ 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은 영화와는 별로 연관이 없었습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여성 감독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여성 영화인을 발굴하고자 하는 이유는 첫 번째, 영화라는 창의적인 노동에서 남녀의 기회가 전혀 균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노동의 장에서 젠더 평등과 갑질 방지가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의 일입니다.
▲ 일본영화사 연구자이며 교토대학 대학원 교수인 기노시타 치카(木下千花) 씨가 ‘일본영화의 여성 파이오니아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페민 제공) |
한편, 여성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 반드시 ‘여성의 관점이 드러난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요. 특히 일본에서는 “여성 감독이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일 뿐, 정말로 좋은 영화인가?”라는 질문이 종종 제기됩니다. 분명 ‘좋은 영화’, ‘좋지 않은 영화’는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영화’와 ‘영화의 거장’이라는 가치판단 자체가 남성성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이번에 상영한 모치즈키 유코 감독의 작품을 보면, 그녀가 감독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츠치모토 노리아키 감독(1928~2008, 다큐멘터리 감독, 주로 미나마타병과 관련된 작업으로 높은 평가를 받음)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반해, 그녀의 영화는 왜 잊혔을까요. 단적으로 성차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영화의 여성 파이오니아 프로젝트’에서는 감독 외에도 스크립터, 의상, 편집 등 다양한 직종의 여성 영화인을 발굴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배우이자 감독인 두 여성 영화인의 시선
영화상영 행사는 “모치즈키 유코(望月優子)와 히다리 사치코(左幸子)-여성 배우 겸 감독의 눈길”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는데, 배우로만 알려진 두 감독의 연출작을 상영했다.
전후 일본에서는 대형 영화촬영소의 조감독 응모 자격이 ‘대졸 남성’이었다. 여성에게는 장편 극영화 감독이 되는 길이 닫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최전선의 연기자로 현장에서 키운 경험과 신뢰에 기반해, 감독으로 활동의 장을 넓힌 사람이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 모치즈키 유코와 히다리 사치코 씨이다. 모두 교육영화와 노동조합 영화이긴 하지만, 여성들이나 어린이의 미세한 움직임과 표정을 생생하게 포착한 전개와 연출이 흥미롭다.
▲ ‘일본영화의 여성 파이오니아 프로젝트’ 웹사이트 캡쳐 https://wpjc.h.kyoto-u.ac.jp 트위터 계정: @women_pioneers |
상영회에서는 일본 페미니스트 영화이론을 이끄는 연구자 사이토 아야코(斉藤綾子) 씨와 와시타니 하나(鷲谷花) 씨의 대담도 이뤄졌다. 대담에서 와시타니 씨는 모치즈키 유코 감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모치즈키는 1960년대 안보 투쟁[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에 가담하는 미일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일어난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며 일본영화가 위험해질 것을 직감하고, 영화 연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치즈키의 세 작품은 교육영화와 노동조합의 선전영화로, 모두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관객을 그곳으로 이끄는 스타일인데요.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 여성과 어린이가 그 올바른 길만을 좇지 않고 다른 곳을 들르거나 노는 시간에 마음을 담아 굉장히 공들여서 그리고 있습니다.
(※모치즈키 유코 감독은 <바다를 건너는 우정>(1960)에서 재일조선인의 본국송환[북송] 사업을 둘러싼 가족의 갈등을 그렸고, <같은 태양 아래>(1962)에서는 일본 주재 미군 병사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위의 편견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통해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포용의 필요성을 호소한다.)
특히 <여기에 산다>(1962)는 노조 영화의 중요한 볼거리인 집회나 항의대회 이상으로 조합의 탁아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노는 어린이와, 바에서 일하는 여성이 해수욕을 즐기는 모습 등을 진중하게 담았죠. 차별과 빈곤이라는 사회문제를 일관되게 여성-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찍고, 심지어 여성-어린이가 권위 있는 타자가 정한 올바른 길에 동원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놀이’라는 자발적 의지를 제시하는 점이 모치즈키 작품의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 히다리 사치코 감독이 기획과 제작까지 맡은 <머나먼 외길>(1977) 중. 홋카이도를 무대로 일본 고도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국영철도의 선로보수작업원과 그 가족이 노동운동 속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정성스럽게 그렸다. (사진: 기록영화보존센터 소장) |
이어 사이토 씨는 히다리 사치코 감독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히다리 사치코는 정치적 의견을 포함해 자기주장을 하는 여성 배우로 알려진 분입니다. 국영철도 가족회의 아내들과 교류하면서 철도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1년 반을 들여 전국을 돌며 직원들의 아내, 열차에서 만난 행상하는 여성 등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성별 역할 분담이 강했던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 가사노동과 보조적 일을 하는 아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춰 평등하게 그리려고 했죠. 히다리 감독도, 모치즈키 감독도 픽션을 만들되 여성들과 노동자의 현실을 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또한, 히다리 감독이 군함도를 촬영하고 강제노동의 문제를 다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일본열도의 북에서 남까지, 전쟁 당시부터 고도 경제성장 속에서 ‘노동자의 변천’이라는 독자적 시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일본영화계의 여성 파이오니아와 만나는 기쁨을 만끽한 시간이었다. ※ <일다>와 기사 제휴하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의 보도입니다. 가시와라 토키코 기자가 정리하고 고주영 님이 번역하였습니다.
출처: 조감독 응모대상이 ‘대졸 남성’이던 시대, 여성 개척자들 - 일다 - https://ildaro.com/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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