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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몸이 선언이 될 때>
2020년 12월 31일 ‘낙태죄’ 조항이 실효를 상실하며 폐지된 지 벌써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특히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임신중지의 낙인은 사라지고 있는걸까?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있는 건지 궁금증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에서 최근 발표한 <2021 임신중지 경험 설문·실태조사 및 심층인터뷰 결과 보고서>를 보면,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불합치 결정이 임신중지 경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했다. ‘낙태죄’가 존속했을 땐 “처벌 위험이 있기에 공소시효를 계산하며 불안”해하기도 하고, “임신중지를 행하기까지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우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낙태죄’ 폐지 운동을 통해 스스로 덜 검열하게 되고, 정서적 지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현장에서의 실질적인 변화는 느끼지 못했다”는 답변은 앞으로의 과제가 많다는 걸 보여준다.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가 만든 <울퉁불퉁한 연대기: 터져나온 저항, 몸의 발화> 중 ‘낙태죄’ 폐지 운동과 법-제도 변화 연혁 ©일다 |
‘낙태죄’ 폐지 이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과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관련 기사: ‘검은 시위에서 국회까지’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것들 https://ildaro.com/8948) 그만큼 힘을 실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타이밍이기도 하다.
이런 시점에 찾아온 전시 <몸이 선언이 될 때>(When the body becomes Manifesto)는 매우 뜻깊다. 임신중지를 둘러싼 개인의 경험, 엄마와 딸 혹은 할머니의 이야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야기, 폴란드의 검은시위 현장들, 한국사에서 성과 재생산권 논의의 주요 쟁점들의 연혁을 접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의 몸과 돌봄, 포로가 된 군인의 몸에 새겨진 문신 이야기까지 투쟁과 저항의 장소로서의 몸을 함께 다루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사적인’ 몸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혀 다른 몸으로 보이면서도 어떤 지점에서는 만나게 되는 <몸이 선언이 될 때> 전시는 김화용 작가가 총괄 기획을 맡고, 베트남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을 연출하였으며 전방위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길보라 감독이 공동 기획했다. 그리고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를 비롯한 국내외 여덟 팀이 작가로 참여해 미술과 디자인,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우리가 함께 목소리를 내던, 그 광장의 느낌을
전시 공간은 그리 넓지 않다. 작품들이 촘촘히 들어가 있고, 관람객의 동선이 조금씩 겹친다. 움직이기 힘들다는 얘기가 아니다. 전시장에 배치된 작품들의 위치나 방향이 조금씩 달라서, 작품을 보다가 다른 관객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마주치는 재미있는 순간들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 서울 통의동 보안1942에서 열리고 있는 <몸이 선언이 될 때>(When the body becomes Manifesto) 전시장 입구, 일레게트라 케이비 작가의 시위 피켓_AAA(2021) 포스터 ©일다 |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강렬한 포스터 이미지 “I WAS NEVER YOURS”(난 한번도 당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에 잠시 매료되어 있다가 본격적으로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군데군데 자리잡은 스크린들을 마주하게 된다. 관객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작품을 보는 순서도 달라지며, 영상을 볼 때 뒤에 있는 영상이나 건너편 영상 소리도 들린다. 이러한 ‘혼란’은 기획자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이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 중에서 여러 일들이 있었어요. 헌법재판소 판결도 있었고, 코로나19 전염병이 발발하기도 했고… 그런 변화에 따라 작품들을 (’낙태죄’ 폐지 시위를 하던) 광장으로 가지고 가려고도 했었고, 영상작업물들 상영회 같은 걸 할까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것이 왜 전시여야 했고, 블랙박스형의 전시가 아니라 왜 이런 형태의 전시여야 했는지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 전시 동선이 이렇게 겹쳐지기도 하고 서로 방해도 되기도 하잖아요. 서로 가리면서 불화도 되고 또 같이 보면서 협상도 되고. 이런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지죠. 전 그게 광장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전시장을) 광장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총괄기획자 김화용 작가의 말, <지금 여기: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SHARE(셰어)’ X 전시 기획자 토크> 10월 20일 퍼블릭 토크 프로그램 중
이러한 ‘혼란’이 전시 관람을 방해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각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하면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들이 담고 있는 서사가 깊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딸과 할머니 3대의 임신중지 ‘기억’
이길보라 작가의 <My Embodied Memory>(2019)는 보라(작가)와 농인 어머니와 청인 할머니, 각각의 몸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3대의 임신중지 기억은 각기 다른데, 특히 엄마와 할머니가 ‘그 일’을 기억하는 방식은 한국사의 드러나지 않았던 어떤 단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할머니의 “까먹어야 좋지. 생생히 기억하면 마음 아파”라는 말이 오히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이 무언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전규리 작가의 <다신, 태어나, 다시>(2020)는 1930년에 태어났다 일찍 죽은, 1990년에 태어나지 못한, 2050년에 드디어 다시 태어난 백말띠 여성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동시에 1990년생인 작가는 아들이라 믿었기에 겨우 태어날 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이를 통해 ‘여아 감별 낙태 시대’를 증언하며, 백말띠를 둘러싸고 만연했던 성차별 문화를 꼬집는다.
▲ 재생산권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폴란드의 ‘검은 시위’ 기록들이 담긴, 폴란드 작가그룹 에이피피 A-P-P: 거리 투쟁의 아카이브 사진 중 ©일다 |
폴란드의 뜨거웠던 검은시위 기록들이 담긴 에이피피: 거리 투쟁의 아카이브를 보고 난 후 발견하게 되는 키라 데인 & 케이틀린 레벨로 작가의 <미즈코>(2019)는 애니메이션과 영상기록이 뒤섞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미즈코(水子)는 일본어로 태어나지 못한 태아를 칭하는 말이다. 작가는 임신중지의 경험,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담아낸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면, 시작점과 종착점을 알 수 있을 텐데”라는 내레이션은 임신중지의 경험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함을 알려준다.
다양한 몸들의 투쟁
전시는 여성의 임신중지와 관련한 투쟁과 선언이 주를 이루지만 그것만 담아내지 않는다. ‘낙태죄’ 폐지 운동 이후에도 성과 재생산 권리를 위한 운동을 이어오고 있는 시민단체 셰어가 만든 <울퉁불퉁한 연대기: 터져나온 저항, 몸의 발화>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노랑, 분홍, 파랑 세 개의 연대기엔 ‘낙태죄’ 폐지 운동 연혁과 법과 제도의 변화 연혁뿐 아니라 다양한 몸들의 투쟁과 반동의 기록들이 담겨 있다.
퀴어한 몸과 욕망을 중점적으로 다룬 작품들도 있다. 강라겸 작가의 <난자 두 개로 태어난 새끼 쥐의 꿈을 꿔>(2021)는 여성과의 관계를 욕망하며 그를 통해 난자 두 개로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여성의 ‘속삭임’을 보여준다. 지금으로썬 불가능한 그 과정을 상상하며 작가가 가지는 감정들, “사랑”과 “질투”는 결국 그를 “진화”하게 한다.
일렉트라 케이비 작가의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 돌봄과 상호 원조의 급진적 가족 구조, 사이보그와 여성 신을 중심으로>(2021)은 트랜스젠더/퀴어들의 다양한 형태의 파트너쉽, 공동체와 돌봄의 현장을 담은 사진과 글로 구성되어 있다.
▲ 전규리 작가의 <산증인>(2021) 중 ©일다 |
전규리 작가의 <산증인>(2021)은 이 전시의 가장 흥미로운 내용으로 꼽고 싶은 작품이다. 언뜻 봤을 때 이 전시의 흐름과 불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산증인>은 1950년대 전쟁 포로들의 몸에 새겨졌던 문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남성적’인 것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군대와 군인들의 사진과 영상으로 채워진 이 작품은, 국가 혹은 권력이 군인이지만 전쟁포로 신분이 된 몸들에 새긴 “애국”, “국충”, “공산당을 무찌르자”가 그 몸들에게 어떤 ‘낙인’을 가져왔는지 보여준다. 심지어 “문맹이었던 그들 몸에 새겨진 글자들”이 이들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를 보면, 이 전시의 제목이자 모든 작품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질문인 “몸이 선언이 될 때”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전시장을 나서면서 “낙태죄 폐지는 ‘비정상인’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이라는 말이 적힌 스티커를 집어 들었다. <몸이 선언이 될 때> 전시는 11월 3일까지 서울 통의동 보안1942에서 열린다. (박주연 기자) 일다 https://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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