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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오브젝트> 돌: 새로운 땅에 이식되는 타자성

 

네가 있어 내가 있다.

 

처음 이 문장을 내게 가르쳐준 사람은 케디였다. 늘 팔로산토 향이 나던 머리카락, 그 길이와 키가 거의 동일했던 인도네시아 여자. 자기 어머니의 긴 기도 속에 항상 등장했던 그 문장은 어머니인양 떠올리다가 어머니인양 도리질하게 되는 의미가 되었다고 했다. 케디는 이 모든 말을 영어로 하면서 어머니만 한국어로 발음했다. 내가 물었다.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

“둘이 뭐가 달라요?”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잠깐 멍해졌다. 한국에 온 지 고작 3개월 된 외국인 여성이 단박에 알아들을 만한 예시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케디를 글쓰기 수업에 데려온 순심 씨가 끼어들었다.

 

“네가 맨날 보고 싶다고 울잖아. 그 짝에 있는 사람은 엄마. 나는 어머니.”

 

반박할 수 없는 설명을 듣고 내가 당황하는 사이, 케디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환한 표정과 왜 이런 슬픈 말을 내가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하는 표정 사이를 빠르게 오고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도 엄마와 어머니 즉, 마마(mama)와 이부(ibu)를 필요할 때 구분해 쓴다. 어쨌든 그 짧은 대화로 케디와 순심 씨 사이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주어졌다. 나는 한동안 짐작 없이 그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내게 익숙한 서사로 타인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여성 노인들을 만나면서 매번 뒤통수를 후려 맞듯 배웠다. 그런 일들에 부쩍 지쳐 있기도 했다. 왜 결혼을 안 하냐는 질문에 말없이 허공을 한 번 응시하고 대답 없이 넘어가면, 다음 날 여러 버전으로 사연 있는 여자가 되어 있다거나 하는. 마지막 버전이 내가 감옥에 있는 약혼자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거였던가. 아니 내가 한국 여성이라는 수감자인데 무슨.

 

소통이 가능하다고 해도 말이라는 것 자체가 감옥이니, 한국어가 서툰 케디에게는 모든 상황이 혼란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빨리 선택하고 믿고 두 발에 힘을 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가 겪었던 낯선 땅, 나를 자꾸 내다버리던 언어, 아슬아슬했던 타인들이 떠올랐다. 이제 내가 그녀에게 아슬아슬한 타인이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 이해했다. 나는 너의 타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평생 물어야 하는.

 

남쪽으로 한참 내려와 강아지풀 아른거리는 창가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아예 몰랐다. 불과 몇 시간 전, 기차 안에서 2주차 강의 노트를 넘기다 졸다 할 때까지만 해도. 첫 시간에는 혼자 왔던 순심 씨를 비롯해 참여자들 전부가 여성 노인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메두사 신화에 대해 나눌 계획이었다.

 

▲ 여성과 오브젝트: 돌. 새로운 땅에 이식되는 타자성 (출처-언스플래쉬)

 

돌 만드는 여자

 

프로이트는 「메두사의 머리」에서 메두사의 뱀 머리를 여성의 성기로, 그걸 본 이들이 눈이 머는 현상을 거세공포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참 한결같은 사람. 엘렌 식수도 동의할 것이다.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에서 프로이트의 글을 재분석하며 메두사 신화 자체가 여성의 성과 생명력을 주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를 상징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꽃뱀’ 망상의 역사가 꽤 길었던 셈이다.

 

아니, 메두사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을 텐데?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에게도 그런 게 있다. 내 오랜 타인을, 취소하기 힘든 마음이 오고갈 대상을 선택하는 데 있어 각자 중요한 기준이라는 게. 그 기준이 여성에게 있다는 사실이 곧 남성 권위에 대한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주체적 여성을 향한 불안이 무참한 처벌과 응징으로 이어진 역사 또한 무구하다. 메두사는 신화 속에서 욕망하는 여성으로 저주받는다. 여성이 무언가를 원하면 그동안 여성에게 무관심했던 세계의 모든 팔이 갑자기 여성의 사지를 붙든다.

 

그렇지 않나요? 물을 타이밍에 순심 씨가 기막히게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돌 만드는 여자 이야기이구만.” 

“용하네. 돌을 줍거나 쌓기만 했지, 만들 생각은 못했는데.”

“아무나 막 돌로 만들면 그것도 곤란하지.”

“왜 접때 미선 형님네서 돌판에 고기 구우니까 안 좋든가.”

 

메두사가 돌 만드는 서양 여자가 된 현장에서 나는 머리카락이 다 뱀이 되어도 모를 정도로 정신 놓고 웃다가 유일하게 웃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케디였다.

 

“메두사 알아요? 왜 머리카락이 다 뱀인 신화 속의…”

 

케디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알아요, 알아요 하는 눈빛인 줄 알았는데 실은 “드디어 나도 영어로 말을 할 수 있겠구나!”였다고 후에 들었다. 같이 가서 듣다보면 한국말이 트일 거라고 케디의 손을 무작정 끌고 온 순심 씨의 바람과는 달리, 덕분에 한동안 쓸 일 없던 내 영어가 트였다.

 

한국말 가르쳐 달라고 데리고 왔더니 못 알아들을 말로 자기들끼리만 떠든다고 퉁을 줄만도 한데 80세 순심 씨는 우리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꼭 케디 옆에 앉아 케디 손을 잡고. 그러다가 가불가불 조는 일이 많아서 먼저 가보셔도 된다고 케디와 내가 번갈아 권해도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런 순심 씨를 케디가 물음표 많은 눈으로 한 번씩 바라봤다.

 

“어머니와 뒷산에 올라갈 때가 제일 좋아요. 내가 살던 곳에도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자주 갔어요. 거기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석상에 내려오는 유명한 전설이 있어요.”

 

매주 지역에서 회관의 노인들과 함께 진행한 글쓰기 수업은 회를 거듭할수록 도무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게 너무 좋았다. 수업이 끝나고 보내는 케디와의 시간도 즐거웠다. 이야기하느라 막차를 두 번 놓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 정보를 순심 씨에게 몰래 전하기도 했다. 가령, 케디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거나 몇 가지 음식이 케디 입에 맞지 않아 힘들 것 같다거나 하는 말들이었다.

 

“어쩐지 젓가락만 빨고 있더라만. 왜 말을 안 하고 큰 눈만 도르륵 도르륵. 짠하게.”

 

순심 씨는 짠하다는 말을 참 찐하게도 했다. 두 번째로 막차를 놓친 날이었다. 숙소를 잡는 대신 나는 한 손은 케디, 다른 한 손은 순심 씨에게 잡혀서 그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다른 식구는 없었다. 셋이 안방에 나란히 누웠다. 낯선 잠자리에서는 잠을 설치는 편이라고 말한 게 무안할 정도로 몸을 눕히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졸면서 어떤 말들은 통역하고 어떤 말들은 주머니에 넣었다.

 

한국말 엄마와 어머니를 구별하게 된 케디가 자기 딴에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순심 씨에게 엄마, 라고 했다가 그러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저쪽 엄마가 알면 서운해 한다는 이유로. 엄마, 하고 울 수 있는 사람은 저쪽에 하나 있는 게 좋다고. 직접 들었다면 더 찐하고 짠했을 말을 케디가 어찌어찌 알아듣고 내게 전하고 나는 순심 씨의 어투를 상상해 채우면서 삼자대화는 지나치게 잘 이루어졌다.

 

돌이 된 여자

 

다음 날 아침을 두둑하게 먹고 케디가 좋아하는 뒷산에 함께 올랐다. 순심 씨 뒤를 케디가 따랐다. 그 뒤를 내가 망설이다가 이었다. 집에서 멀어지면서 뒤늦게 집 안 어디에도 다른 식구의 흔적이 없었다는 게 떠올랐다. 둘은, 둘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높고 낮은 돌탑이 쌓인 바위 앞에서 둘이 멈춰 서는 걸 보면서 나는 그들이 자매 같다고 느꼈다. 둘이 한집에 살게 된 전후 사정이 이상하게 궁금하지가 않았다.

 

돌탑 앞에서 순심 씨는 옛날에 산에서 돌을 깰 때 지내던 산신제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걸 케디에게 “돼지머리와 삼색과일과 북어 같은 걸 놓고 기도했대요.”라며 통역 가능한 만큼 전달하고, 케디가 달라진 눈빛으로 자기 고향집 언덕 위 석상의 전설로 대꾸하면 나는 다시 순심 씨에게 또 할 수 있는 한 전달했다.

 

▲ 돌: 새로운 땅에 이식되는 타자성 (출처-언스플래쉬)

 

케디 세계의 전설에 따르면 석상은 노예로 팔려간 연인을 기다리던, 이름 없는 여자였다. 매일의 기다림과 체념만큼 머리카락이 자라나 바람이 되고 뱃길을 감추게 되자, 연인이 돌아오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일 장소에 여자의 거처를 마련하고 마을 사람들이 매일 돌아가며 여자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옛날에도 지금도 돌아오는 이는 드물다. 재회는 없었고 여자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 석상의 머리 길이가 케디처럼 바닥에 닿을 정도여서 얼핏 보면 뱀 같고 움직이는 듯 보인다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그 뱀 머리 옆에 돌을 놓고 점을 쳐요. 그 돌이 다음 날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온다고 했어요.”

 

살아간다는 건 그렇듯 계속 바라게 되는 일이어서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다. 돌이 된 여자의 기다림과 체념의 순환적인 힘을 빌려서라도 딱 한 번 재회하고 싶은 사람이 내게도 있었다. 그 정도의 힘이 필요한 재회면 둘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있다는 의미일지라도.

 

바닷바람이 세찬 곳이었다고 하니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기다림의 상징인 석상 옆에서 축원 같은 돌들이 쌓였다가 뒹굴고 작아져 사라졌을 뿐이다. 돌의 운명이 참 가깝다 느끼면서 나도 돌 하나를 돌탑에 보태고, 뒤따라 케디와 순심 씨가 그러는 걸 봤다. 이상하게도 내가 한 내려놓음보다 그들의 내려놓음에 마음을 더 싣게 되던 순간, 순심 씨의 기도인지 혼잣말인지가 들려왔다.

 

“애기들 맘에는 돌 같은 거 안 쌓이게 해주소. 내가 많아 알아. 돌은 아무리 울어도 안 깨져.”

 

다시 메두사 이야기로 돌아오자. 낯선 세계에서 돌 만드는 여자였던 메두사의 이름이 여성 노인들 입에서 정확하게 불리던 순간을 기억한다. 연필로 또박또박 쓰기도 하고, 구불구불 뱀 머리를 살려 그리기도 했다. 이해도는 그 이상이었다.

 

“메두사도 사연이 기구했네.”

“나이가 많나?”

“아니 왜 내가 참고 참다가 죽기 살기로 빽! 소리 지르니까 영감이 돌처럼 굳어가지고… (웃음) 대충 비슷한 거 아니겄어?”

 

정말이지 여성 노인들은 최고다. 모르면서 다 안다. 다 알면서도 모른다고 한다. 마치 메두사의 또 다른 자매들, 하나의 눈과 치아를 서로 같이 쓰는 세 자매 그라이아이처럼.

 

8주 수업은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다종다양한 김치들과 알록달록한 떡들, 노인들이 직접 쓴 편지를 들고 말문이 턱 막히면서 끝났다. 케디의 편지도 함께였다. 봉투 겉면에 적힌 낯선 이름이 케디의 풀 네임이라고 했다. 바투 케세디한(batu kesedihan). 인도네시아어로 슬픔의 돌. 어쩌면 아닐지도 몰랐다. 돌과 슬픔의 관계를 선명하게 규정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우리 사이에는 없었다. 순심 씨의 기도에 가까운 말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이름이 아무리 울어도 깨지지 않는 돌의 슬픔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돌과 슬픔의 관계는 내게 순심 씨와 바투 케세디한의 관계처럼 누락된 그들 존재의 흐릿함 속에서 매순간 다르게 설정되었다. 돌을 깨고 줍고 나르고 쌓고 버리고 찾는 여자들, 돌이 되거나 돌을 만드는 그 숱한 여자들의 관계처럼.

 

다만 하나의 문장은 남았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

 

[필자 소개] 김지승. 작가. 비영리단체 매체 기획자.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노인 서사에 관심을 두고 개인 연구와 여성/노인 대상 예술 수업을 진행 중이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을 썼다.  일다 https://ildaro.com

 

 

남은 인생은요?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저자 성sung의 첫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아동기에 한국을 떠난 저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이민 가정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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