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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콩쥐팥쥐
<콩쥐팥쥐>는 누구나 알지만, 널리 알려진 것은 ‘못된 계모에게 구박을 받던 착한 콩쥐가 감사(원님)에게 시집가서 잘 살았다’는 줄거리뿐이다. 그 때문에 재혼가정에 대한 편견과 결혼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심어주는 이야기로 지목되곤 해왔다. 그런데 이런 섣부른 낙인은 이야기의 속살을 가리며 오히려 왜곡을 고착시키기도 한다. 구술채록본들은 콩쥐라는 한 아이가 강인한 여성으로 자라,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끝내 생존하여 세상을 향해 발언하는 과정을 공들여 그리고 있다.
▲ 구술채록본들은 콩쥐라는 한 아이가 강인한 여성으로 자라,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끝내 생존하여 세상을 향해 발언하는 과정을 공들여 그리고 있다. (이미지: pixabay) |
전북 정읍군 소성면 두암리 이씨가 1918년에 남긴 이야기(임석재, 『한국구전설화 7』, 평민사, 1987년~1993년, 전 12권)를 따라가 보자.
<옛적으 한 사람이 있었넌디 딸 하나를 두고 상처힜다. 딸은 콩쥐라고 힜넌디 콩쥐를 혼자 손으로 키우넌디 남자 손으로 키우자니 심도 들고 집안 살림도 잘 안 되어서 후처를 얻었다. 이 후처는 퐅쥐라는 딸을 데릿고 들어왔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서사로 시작한다. 옛이야기에서 홀어머니는 아들을 나무꾼으로라도 키워내지만, 홀아비 혼자 자식을 키우는 경우는 드물다. 콩쥐의 아버지도 ‘남자 손’이 어떻다며 딸을 떠맡겨도 될 만한 여자를 데려와 붙여버리고(의부倚附)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의붓)어머니는 아버지가 없거나, 있으나마나 한 두 아이의 양육을 떠맡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갈밭의 김을 매고, 베를 짜고, 나락 방아를 찧어야 한다. 물은 날마다 길어 와도 물독 밑이 빠진 것처럼 동나기 일쑤다. 그러고도 집안을 쓸고 닦고, 아궁이 재를 치우고, 세 끼니 밥상을 차려야 한다. 그녀는 아마 콩쥐처럼 자랐을 것이다. 간신히 혼인제도 속에 자리 잡았지만 후처인 데다가 아들도 없으므로 언제 밀려날지 모른다. 강퍅해진 몸과 마음으로 팥쥐를 통해 상승하기를 꿈꿀 뿐이다. 그녀에게 팥쥐는 욕망이자 집착이며, 콩쥐는 외면하고 싶은 누추한 현실이다.
<이 후처는 지가 데리고 온 딸 퐅쥐만 이뻐허고 전실딸 콩쥐를 몹시 미워힜다. 퐅쥐헌티는 쉽고 깨끗헌 일만 시키고 콩쥐헌티는 심들고 어렵고 궂인 일만 시키고 남편헌티 퐅쥐는 부지런허고 일을 잘 허넌디 콩쥐는 게으르고 일도 못 헌다고 고자질힜다.>
학대받는 아이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콩쥐는 아버지의 방임 속에서 학대받으며 자란다. 유년기를 지나자마자 ‘살림 밑천’이자, 가부장의 인정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며, 가장 손쉬운 약자가 되어 온갖 짐을 떠안아야 한다. 맏딸로서 어머니에게 맡겨진 혹독한 노동을 나눠야 하고, 어머니의 미성숙한 자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은 세 모녀의 전쟁터가 되어간다. 콩쥐가 살아갈 힘을 얻는 곳은 오히려 등을 떠밀려 가게 된 험한 자갈밭이다.
<그리서 콩쥐는 일도 되고 점심도 못 먹게 돼서 울고 있었넌디 하늘서 암소가 내려오더니 어찌서 우냐고 물었다. 콩쥐는 나무호맹이로 자갈밭을 매자니 심이 들고 까마구가 가지고 온 점심밥을 다 먹어서 운다고 힜다. 그맀더니 암소는, “저그 저 냇물에 가서 아래탕에 가서 손발을 깨끗하게 씻고 가운데탕에 가서 몸을 깨끗이 목욕허고 웃탕에 가서 머리를 감고 내 밑구멍에 니 손을 너 봐라”고 이렇게 말힜다. ... 콩쥐는 밥이며 떡이며 실컨 먹고 남지기는 보재기에다 싸각고 집이로 왔다.>
암소는 야단스레 콩쥐를 위로하지 않으며 섣불리 아이의 처지를 캐묻지도 않는다. 그저 콩쥐의 말을 들어주고, 북 바친 감정을 스스로 가라앉히도록 기다렸다가 허기를 채워준다. 영화 <벌새>(김보라 감독, 2019)에 나오는 영지 선생님 같은 인물일 것이다. 콩쥐는 암소의 따뜻한 지지 덕분에 어머니와 팥쥐를 챙길 정도로 성숙해진다. 분노와 설움을 다루는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뒤으 어느날 이붓어매는 콩쥐허고 퐅쥐허고 누가 베를 많이 짜넌가 내기허게 허니라고 콩쥐헌티에는 새 북을 주고 콩을 볶아 주고, 퐅쥐헌티는 질이 잘 난 북을 주고 찰밥을 히서 주었다.>
베 짜기는 씨실과 날실을 엮어 새로운 평면을 직조하는 어른의 일이다. 복잡하고 지루하며, 골병들지 않도록 몸을 챙길 줄도 알아야 한다.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 자란 팥쥐는 콩을 주면 한 알씩 주워 먹느라, 찰밥은 손에 묻은 걸 떼먹느라 베 짤 겨를이 없다. 반면 콩쥐는 어머니의 훼방을 개의치 않을 만큼 성장해 있으므로 찰밥이건 콩이건 주는 대로 요령껏 먹어가며 베 짜기에 몰두한다. 누가 뭐래도 촘촘히 자기 세계를 짜나가는 사람으로 자란 것이다.
<이붓어매허고 퐅쥐는 잔치귀경 허로 간다고 법석을 부렸넌디 콩쥐도 저도 같이 가겄다고 헝게 이붓어매는 삼 닷 근과 모시 닷근을 내줌서 이 삼 닷 근과 모시 닷 근을 다 삼어 놓고 아홉 칸 집안을 말짱 깨끗이 치워 놓고 아홉 칸 부석짝마다 재를 다 퍼내서 치워 놓고 불을 다 때 놓고 밑 없는 독이다가 물을 하나 가뜩 질어 놓고 마당에 넣어 논 나락 닷 섬을 다 찧어 놓고 저녁밥을 지어 놓고 오너라고 이러고서 저그덜찌리만 갔다.>
어머니의 숙제는 혹독하지만 덕분에 콩쥐는 살림꾼(한 집안의 리더)으로 성장한다. 나락은 참새들이 찧어주고 물독은 두꺼비가 막아줬다는데 이는 노동의 성격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방아는 왁자지껄 손발을 맞춰 찧어야 하고, 물독은 묵묵히 혼자 채워야 한다. 삼 삼기도 두레를 짜서 노래하며 함께 하는 일이다. 이 많은 일을 다 해냈다는 것은 노동을 조직하고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뜻이다. 콩쥐는 감사의 배필이 되고도 남는다.
수렁 같은 결혼, 그러나 다시 일어선 콩쥐
잘 알려진 이야기는 감사와의 혼인을 클라이맥스로 끝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신데렐라 이야기와 달리 콩쥐의 이야기는 한참 더 남아있다. 콩쥐는 시집을 잘 갔다지만 결혼 생활이 순조롭지 못하다. 그녀에게는 아무리 번듯한 남편도 채워줄 수 없는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팥쥐를 다시 불러들인다.
<감사가 간 뒤 하루는 퐅쥐가 와서 문 열어돌라고 힜다. 콩쥐는 감사가 헌 말도 있고 히서 문을 열어 주지 안힜다. 그랬더니 퐅쥐는, “야야 콩쥐야, 어서 문 열어 돌라. 너 줄라고 퐅죽을 쑤어 왔다. 퐅죽 그럭이 뜨거워서 손이 디겄다. 아이 뜨거 아이 뜨거. 어서 문 좀 얼릉 열어 주어.”>
<“아이고 야야 콩쥐야, 네 목에 웬 때가 그리 많으냐. 감사가 봤다가는 더럽다고 내쫓겠다. 날도 덥고 허니 우리 같이 나가서 멕이나 감자.” ... 퐅쥐는 콩쥐를 왈칵 밀어서 물에 빠져 죽게 힜다. 그리고 퐅쥐는 얼릉 물에 나와각고 콩쥐 옷을 입고 콩쥐처럼 꾸미고 있었다. 퐅쥐는 얼굴이 검고 얽고 목이 질쭉힜다. ...감사는 퐅쥐를 콩쥐로 알고 그냥 지냈다.>
콩쥐는 아직도 어머니의 따뜻함을 기다리고, 남편에게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한다. 때가 낀 목(더러운 몸)에 대한 불안은 억압받아온 섹슈얼리티이기도 하다. 자신을 부정하면 누구를 사랑하기 어렵다. 집착이 된 사랑은 속을 시커멓게 태우고 목을 길게 뺀 채 두리번거리게 한다. 감사의 무관심 속에 콩쥐는 말을 잃고 죽음의 침묵으로 빠져든다.
<어느날 감사는 연못갓을 거닐고 있넌디 연못 가운데에 여태꺼지 보지 못하던 곱게 피여 있는 꽃이 있어서 ... 감사는 그 꽃을 꺾어각고 와서 방문 앞에 매달어놓고 들며 바라보고 날며 바라보고 허넌디 그럴 때마다 꽃은 감사으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음서 방긋이 웃는 듯이 피었다.>
수렁에서 연꽃으로 다시 피어난 콩쥐가 감사와 재회하는 장면은 애틋하고 에로틱하다. 콩쥐는 비로소 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다시 살아나기로 한 콩쥐는 팥쥐의 손에 불구덩이에 떨어지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잿더미 속에서 그녀를 구한 것은 가난한 이웃집 할머니다.
<할머니는 얼릉 각시를 붙들고 어떤 각시냐고 물었다. 각시는 자기는 감사 각시인 콩쥐라고 험서 퐅쥐가 멕 감으로 가자고 연못에 끌고 가서 나를 물 속에 집어너서 죽게 힜넌디 나는 죽어각고 꽃이 되었넌디 감사가 그 꽃을 꺾어다가 방문 앞이 걸어놓고 보넌디 퐅쥐가 방에 들적날적 헐 적에 내가 퐅쥐의 머리를 쥐어뜯고 얼굴을 할퀴고 힜더니 나를 부석짝에 너서 불태웠넌디 나는 구실이 돼각고 있넌디 할머니가 불씨 얻으러 왔다가 구실을 비단 헌겁에 싸서 장롱 안에 너서 끄니때면 내가 각시로 벤히서 밥을 채려놨다고 말허고 할머니보고 감사를 청히다가 저녁을 대접히 돌라고 힜다.>
콩쥐는 침묵에서 빠져나와 자신이 누구인지 뚜렷이 말한다. 죽었던 언어가 환생한 것이다. 지면 때문에 일일이 인용하지 못했지만 사실 콩쥐는 처음부터 ‘말하는 아이’였다. 암소가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도, 어머니가 음식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따졌을 때도 말을 삼키지 않았다. 왜 서러운지, 얼마나 애쓰면서 살고 있는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그 말들은 분노와 서러움을 달래는 노래였으며 세상과 연대하는 무기가 되어왔다. 수렁에서 불구덩이를 거쳐 다시 돌아온 그녀의 말은 남편을 향한다.
<사또 안전, 젓가락 바뀐 것은 알아도 각시 바뀐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그의 무지와 상대방이 궁금하지 않은 게으른 사랑에 대해, 또 부부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한 쌍의 젓가락처럼 나란히 서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콩쥐는 가부장제의 다중억압에도 성장과 발언을 멈추지 않는 화자 자신이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우리들이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일다 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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