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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

 

요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언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댄서들 중 한 명인 가비(댄스크루 ‘라치카’의 리더)는 한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 먹는 게 되게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같이 나오는) 댄서 언니들을 보면서 내 세월도 언니들처럼 저렇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김진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2021)을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그 말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된다는 거, 어쩌면 그렇게 무서운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한국의 위상에 반해 한국 사회의 노인빈곤, 특히 노년 여성의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최고다. 이런 뉴스가 들릴 때마다, 폐지 줍는 여성 노인의 이미지와 함께 ‘네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노오력’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는 압박을 받을 때마다, 할머니가 된다는 것의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곤 했다. 나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의문만 가득한 시간을 보내다 만난 <왕십리 김종분>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김진열 감독, 2021) 포스터 (인디스토리 제공)

 

왕십리역 11번 출구엔 노점상 터줏대감 김종분이 있다

 

서울 지하철 왕십리역 11번 출구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김종분 씨는 80대 여성이다. 아침에 큰 도매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산 후, 자신의 노점상에서 삶은 옥수수, 구운 가래떡을 비롯한 여러 야채 등을 파는 것이 그의 일이다. 약 50년 동안 그러한 노동을 해 온 종분 씨는 그야말로 노점 장사의 프로, 전문가다.

 

대형마트에서 장보기, 아니 온라인 쇼핑몰에서 장보기가 더 익숙한 나에겐 낯선 풍경인 노점상에서, 종분 씨는 물건뿐만 아니라 인정을 나눈다.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왔다는 손님에게 “그냥 가져가. 담에 오가면서 줘”라며 물건을 건네고, 만원만 꿔달라는 단골에게 돈도 빌려준다. 종분 씨가 자리에 없을 때 노점 동료들, 친구들이 가게를 봐주는 덕분에 주인 없는 가게로 운영될 때도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르신들’이 라떼는 말야~ 사람들이 정이 있고 참 좋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게 없다는 얘길 하면 소심하게 흘겨보거나 불편한 마음으로 그냥 흘려버리곤 했는데, 종분 씨의 인정 넘치는 행동들은 그저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건 종분 씨가 ‘옛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꾸준하게 장사를 해 왔으며 동네 사람들과 서로 정을 주고 받는 관계를 맺어 온 탓이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종분 씨와 손님들의 관계는 상인과 손님일 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으로서의 관계, 돌봄의 관계 속에 있다. 동료 상인들과도 마찬가지다.

 

▲ <왕십리 김종분>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꽃장사”, “야채”, “우리 슈퍼” 등의 별명으로 자신의 장사 노동 분야를 드러내는 종분 씨의 동료/친구들(일명 ‘왕십리 시스터즈’)은 서로 일을 봐주기도 하고 같이 김치를 담그고 밥을 나눠먹고, 먼저 간 영감 뒷담화도 하고, 심심할 땐 불러내 10원짜리 고스톱을 친다. 종분 씨네 무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형님’의 집은 노년 여성이 혼자 사는 작은 집이지만, 모두가 모여 먹고 노는 공간이기도 하고, 낮잠을 자고 쉼을 청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공간이지만 공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종분 씨 또한 혼자만의 삶을 꾸리고 있는데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큰딸 귀임 씨가 같이 살 집을 마련했음에도 종분 씨는 친구들을 편하게 데리고 올 수 있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택했다. 상호돌봄을 할 수 있는 공동체를 택한 그는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김종분과 그의 딸 김귀정 열사

 

장사 노동자 김종분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종분 씨에겐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다. 큰딸 귀임 씨, 작은 딸 귀정 씨 그리고 막내 아들 종수 씨. 귀정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사람들은 1991년 노태우 군사정권의 공안통치에 항거하는 집회 중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故김귀정 열사를 떠올릴 것이다. 벌써 30년 전인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사건을 알지 못했다.

 

영화는 김종분의 삶을 따라가다 자연스럽게 故김귀정 열사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산동네에 살며 노점상을 하던 김종분의 둘째 딸로 태어난 귀정이 그 동네에 몇 안 되는 대학생이 되어 동네 자랑이 되었던 이야기, 학교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야기가 가족, 친구들의 증언과 함께 전달된다. 귀정이 쓴 메모를 통해 드러나는, 자기만의 잇속을 챙기지 않고 사회를 변화시키며 살아가고자 했던 청년의 고민과 생각도 접하게 된다.

 

▲ <왕십리 김종분>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그런 귀정의 사망 이후, 종분 씨는 딸의 뜻을 이어가고자 노력한다. 사실 당시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니라) 노태우를 찍었다고 고백하는 그의 말엔 후회나 자책만이 담겨 있지 않다. 종분 씨는 후회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딸의 뜻을 이어 투쟁하기로 선택한다. 또 이런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 서서 목소리를 낸다. 지금도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행사, 故김귀정 열사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다면 찾아간다.

 

“작은 딸 덕분에 전국 팔도강산을 다닐 수 있었고,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전국에 안 가본 대학이 없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을 만났다”는 종분 씨의 말에서, 그의 삶이 故김귀정 열사와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머니와 딸의 연결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뜻을 같이하는 동료 시민으로서의 연결이기도 하다. 종분 씨는 딸 덕분에 자신의 세상이 넓어졌다고 말하지만, 멈춰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故김귀정 열사의 삶 또한 종분 씨 덕분에 계속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여성들의 역사는 계속 된다

 

영화는 프로 노점상인 김종분 씨의 삶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故김귀정 열사와의 연결을 다룸과 동시에, 종분 씨의 어머니부터 손녀 정유인 씨까지 이어지는 여성들의 역사의 단면도 담아낸다.

 

‘가장’으로 불리지 않았지만 가장의 역할의 해 온 여성들의 삶과 노동 이야기는 ‘우리 엄마 혹은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라는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김진열 감독은 ‘사소한’ 대화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역사의 단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낸다. 그 이야기들이 ‘증언’처럼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 여성들의 역사는 기록되고 확장된다.

 

▲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김진열 감독, 2021)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그런 점에서 정유인의 등장도 흥미롭다. 요즘 2030대 여성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인 정유인, 그는 2019년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400m 계영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운 바 있는 수영 선수이자, <노는 언니>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 중인 ‘멋진 언니들’ 중 한 명이다. 탁월한 근육과 체력을 자랑하며 여성의 몸 다양성 이미지를 확장해 준 그는 종분 씨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수영 선수이자 방송인인 정유인의 삶과 민주화운동 열사인 김귀정 그리고 노점상인이자 투쟁가인 김종분의 삶은 당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가 연결된다고 느껴지는 건, 유인이 할머니와 이모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할머니와 이모의 활동을 ‘계승’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할머니의 노점상이 창피했던 적이 없다”는 유인 선수는 ‘이 역사’의 일부가 되는 걸 꺼리지 않는다. 더구나 이제 그는 많은 여성들의 ‘멋진 언니’로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꼭 같은 무언갈 해야만 역사가 이어지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이들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영화 <왕십리 김종분>이 보여준, 독거노인이 아닌 독립적인 노인으로서의 삶과 노동, 그리고 다른 모양을 하고서라도 이어지고 있는 여성사의 단면은 노년 여성으로서의 삶을 조금 기대하게 만든다. 나의 이야기 또한 역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기대도 하게 된다.  박주연 기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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