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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의 작가들이 쓴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이년 사이 왕창 오른 전세금을 융통하느라 고단했던 때에도, 이럴 바에 집을 사야 하나 다시 한번 깊게 고민을 했었다. 그때에 정말로 집을 샀다면 아이를 데리고 모로코에 사막을 보러 가지 못했겠지. 또, 우울증이 왔을 때 한 시간에 칠만 원씩 하는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지 못했을 것 같다. 그때 상담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으면 정말로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 내가 선택한 것들,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내 인생을 만들어왔다.” -구정인, ‘그때 집을 샀다면 사막에 별을 보러 가지 못했겠지’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143)
나는 독립한 인간이다. 나도 이제 어느덧 자취 십이 년 차에 사회생활 한 것이, 그러니까 내 손으로 돈 벌기 시작한 지도 십 년 차가 되어간다. 서른은 애 진작에 훌쩍 넘어 이미 중반으로 달려왔는데 다달이 꽂히는 월급은커녕 적금은 가입과 해지의 반복이고, 뭣보다 벼락같이 찾아오는 월세 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번듯한 내 집을 마련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지. 발을 땅에 딛고 아무리 손을 뻗어대도 내 집 천장에도 안 닿는데요. 그런 의미일까. 진부한 표현이라도 마땅히 대체할 말이 없는 바람에 무슨 현실 반영 표어가 되어버린 내 집 마련 하늘 별 따기. 몇십억 장의 종이 쪼가리를 쌓아놔도 끄떡이 없는 단단한 콘크리트가 신기할 뿐이다.
▲ 열두 명의 작가들이 쓴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미디어일다, 2021)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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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랬나.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나는 언뜻 흘겨본 제목에 흑 하면서 팔자 모양의 눈썹이 되고야 말았다. 분명 책 안에는 다양한 삶의 희비가 농축되어 있을 것이란 걸 직감하면서도, 자본과 신념의 경계에서 늘 허덕이던 나는 우선 ‘좋은 집’이라 하니 납작한 맘에 그리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좋은 집이란 대게 그런 식으로 통용된다. 좋은 집은 비싼 집. 좋은 집이란 내 소유의 집, 번듯한 집, 집 밑에 헬스장이나 수영장이 있는 집, 그거 다 있어도 임대아파트는 아닌 집, 맨 밑의 곰팡이도 맨 위의 냉골도 아닌 그사이의 집, 볕이 잘 드는 것은 당연하고 마당의 풀이 적당히 가꿔진 집, 길고양이나 들개가 그 풀에 숨어들지 않는 집,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 아니면 높다랗게 뻗어서 별 딸 수 있는 집, … 어쨌든 내 집.
모든 존재는 제 집을 짓고 산다. 하지만 집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는 건 아마도 인간뿐일 것이다. 새는 안전하게 알을 낳고 안전하게 새끼를 길러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모색한다. 어떤 동물은 먹이를 보관하기 위해 깊숙이 땅을 파거나 나무에 구멍을 내고 또 다른 동물은 인적이 닿을 수 없는 동굴에 들어가 한 계절 내내 잠을 잔다. 자연의 섭리 안에서 그들에게 완벽한 안전이란 없지만, 지구에 사는 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간만큼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지 오래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집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결국 다시 인간인 셈이다.
수많은 청소년이 그 불안함에 가장 취약한 형태로 놓인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이다. 멀리 내다볼 것도 없이 이 책에 참여한 작가들의 청소년 시절 가정 탈출기만 봐도 그 사실을 증명한다. 부모에게 종속되어있는 관계 안에서의 권력. 그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가정사’라며 외면되기 일쑤다. 종속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는 ‘반항’이라는 말로 제압되고, 권력 앞에서의 무력함은 ‘순종’이란 말로써 되풀이된다. 매번 시도와 제압이 반복되는 이유는 청소년을 논외로 저들끼리 돌아가는 시스템에 있다. 우선 제일 먼저 부모의 경제적인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점에 있다.
라일락 작가는 말했다. 법적으로 부모 동의 없이는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나에게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협박을 하다니. 치졸하기 짝이 없다고. 결국, 그는 모아둔 돈을 가지고 남의 명의를 빌려서 세 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 들어가게 된다. 남의 명의를 빌려서. 안다. 명백히 불법이다. 그렇게 맥락 없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자들에게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하고 싶다. 그러면 뭐 어쩔까요.
“집을 나오고도 내가 제법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상황을 이해하고 지지를 보내주는 존재들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그저 문제 있는, 불량한, 부모 말 안 듣는 애로만 보거나, 나의 취약한 위치를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더라면 나는 세상을 온통 위험하게만 느끼고 등을 돌렸을 것이다.” -라일락, ‘딸의 방’을 벗어나서,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71)
▲ 열두 명의 필자가 쓴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미디어일다,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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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가정을 선택한 청소년들에게 위험은 도처에 널려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다 못해 다 부숴 먹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짓은 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뉴스를 보며 깨닫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가족이라는 허울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청소년들을 빠짐없이 살펴보아야 한다. 국가는 청소년을 미성숙하다는 일반화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늘어져 있는 문제들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여러 가지 가능성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시혜적 시선을 거두고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맞추어진 장기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잘 만들어진 시스템은 세상의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자원과 관계에서 권력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동료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고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내 삶을 온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대부분의 주거 정책이 ‘정상 가족’ 중심으로 되어있다는 점도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장애 여성들끼리 살아야 되나?’라는 말을 한다. 그만큼 다양한 몸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갈 데가 없고 단편적인 국가정책 안에 몸을 끼워 맞춰야 하는 현실이다.” -진성선, 오늘도 나는 독립합니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164)
박목우 작가는 서울시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한 정신장애인 자립 생활 주택에 입주했다.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 물품 등을 제공하고 자립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의 제도이다. 강제 입원을 당하며 머물 공간을 찾아다니던 그는 자립 생활 주택에 입주하기로 마음을 먹고서는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고 용기를 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정신장애인의 삶은 자해와 자책, 고통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비참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삶을 의미화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조건들이 시급할 뿐이다.” -박목우, 건반을 눌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238)
시범적으로 시행된 제도는 금세 사라지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유지 시키고 더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도저히 막막하다면 당사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된다. 당사자의 삶을 저 멀리서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귀를 세워보면 되는 일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으니까.
그 과정을 착실히 행하다 보면 스스로 자문해보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정상성에 갇혀버린 세상에서 나는 다양한 삶을 얼마나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비당사자들의 편의를 위해 불편한 시선을 자의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그저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며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놀랍게도 비당사자들의 귀찮음과 나태함이라는 것을. 게으름은 ‘나중에’라는 말로써 사회적 편견을 강화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고양이가 없는 마을을 조심하라는 어느 나라의 속담은 언제, 어째서, 왜 생겨났을까.
“웃음이 없는 것은, 눈물이 없는 것은, 무감동한 것은, 표정을 잃은 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박목우,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241)
이충열 작가는 ‘부자집’에 산다. 수입의 반을 월세로 지불하며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월세를 내기 위해 쉼 없이 일을 하고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그는 그것을 무모한 선택이라 칭했고 그 가능함에 대해 본인은 비장애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나쁘지 않은 학력 등 사회적 보편을 여럿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 ‘부자집’을 통해 집을 소유의 대상이 아닌 누군가와의 공유, 혹은 예술의 터전으로써 활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어렸을 적엔 ‘좋은 집’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 생각 회로는 아주 단순했다. 내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좋은 집’을 갖는 것이 여러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가를 가진 자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고 부동산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자본주의 신봉자라며 돌멩이를 던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도 그 안에서 부단히 싸우며 살고 있는걸. 내 집이 있으면 마음 하나는 편할 것이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만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적인’ 주거, 생활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정당화하며, 결국 똑같은 흙과 벽돌,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것일 뿐인 집에 어떤 등급을 매기는 행위가 꼴사납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지.
“나는 현재의 ‘부자집’을 누리고 싶은 것이지, 재산증식 수단으로서의 집, 빈부격차를 강화시키는 집, 권력 관계를 감추는 집, 안과 밖을 구분 짓고, 집 없는 사람들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집을 소유하고 싶지 않다.” -이충열, 무모하고도 행복한 ‘부쟈놀이’,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187)
▲ 열두 명의 필자가 쓴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미디어일다,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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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거라는 의미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안전함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단어는 나에게 안전이다. 물리적인 안정감을 포함하여 정서적인 안정감. 그 안전함은 당신의 집 안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 집이 세워진 어떤 동네. 그 동네가 포함된 어떤 지역, 나라, 세상. 집은 그러니까 세상인 셈이다. 그러니 당신에게 안전한 집이라면 ‘한 여자와 아이가 함께 살아내는 집(낭미)’도 안전한 집이어야 한다. 그 누가 살고 있더라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언제까지고 온순하게 말할 수만은 없겠습니다만, 친구에게만큼은 다정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다. 그러니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에디의 동네(에디)’ 같은 동네서 우리 같이 살면은 좋겠다고 한없이 다정하게 말하게 된다.
“다른 지역에 사는 트랜스젠더 친구들도 은행 업무는 꼭 이태원까지 와서 본다고 했다. 삶에 필요한 서비스들을 받을 때조차도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심적인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증명이라는 게 참, 증명하면 되는 건데 그것만으로 낙인이 찍히는 상황에서는 증명 자체가 도전이 된다.” -에디,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에디의 동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96)
나도 오랫동안 혼자서 살았던 만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유독 이사를 많이 한 편이기도 했지만, 동네를 옮길 때마다 그 동네만의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마치 각각의 나라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 마냥, 이 작은 땅덩어리에도 지역마다 관통하는 정서가 다르듯,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여러 번 이사를 감행한 데에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이 있기도 했지만 어떤 동네엔 왜인지 마음을 붙일 수 없는 퍽퍽한 공기가 있었다.
십이 년을 혼자서 살면서 일곱 번 이사했던 나는 연희동 언덕 끝자락에 사 년째 살고 있다. 최장기간 거주다. 집에서 뜬금없이 커다란 지네가 나왔을 때, 심각하게 이사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던 이유는 함께 사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한 빌라에서 산다. 우리 집엔 고양이 세 마리와 승은이, 밑에 집엔 연경과 정원이 강아지 한 마리와 있다. 이렇게 모여서 살게 된 지는 거진 삼 년 정도 되었는데, 내가 먼저 살고 있던 빌라 밑층에 어느 날 공실이 났고 연경과 정원이 냉큼 그곳에 들어앉았다. 그러고 얼마 뒤엔 서울의 치솟는 월세를 아껴보고자 승은과 집을 합치었고 그것이 삼 년 정도 되었으니, 우리는 막 태어난 아기 공동체라 볼 수 있다.
▲ 열두 명의 필자가 쓴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미디어일다,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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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한 여자가 지키고 있는 집이다. 그리고 한 여자와 아이가 함께 살아내는 집이다. 한 여자가 지킨 집은, 한 아이가 살아갈 수 있는 집은, 사실은 그동안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부단히 가부장의 집을 떠나왔기에 세워질 수 있는 집이었다. 잘 살아내고 싶다. …집을 사각형의 닫힌 공간이 아니라 통과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목으로 삼으며 새로운 집을 짓고 부수고 다시 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벌써 여기에 함께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 낭미, ‘집들은 언제나 함께여서 지켜졌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53)
함께 산다는 것은 함께 걸을 일이 많다는 말과도 같다. 밑의 집 연경과 함께 이유 없이 길을 걷다 보면 집이 너무 많은 바람에 매번 똑같이 반복하게 되는 말이 있다. 집은 되게 많은데 내 집은 없네. 예쁘게 지어진 집을 볼 때도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내 취향에 맞는 집을 지어서 살고 싶어. 그러고 나서 꼭 덧붙이는 말은 너랑 승은이가 위층에 살고 내가 정원이랑 아래층에 살고. 아니면 너랑 같이 위층 써도 되고, 아니면 방을 네 개를 만들어서….
우리는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쉼 없이 나불거리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수많은 대화는 불합리한 구조의 고리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고 왜인지 세상의 보편과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면 미끄러지는 내 팔을 붙들어 주었다. 길날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동등하게 서로에게 배우는 자인 동시에 서로를 가르치는 자’(『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216)인 셈이다. 우리가 사는 빌라 근처에도 또 다른 친구들이 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 유대와 연대가 모여들어 한 동네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걸까. 그것이 벌써 삼 년 차. 우리는 비건 지향 삼 년 차가 되었다. ‘본가’라 불리우는 첫 번째 터전을 떠난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이곳에 모여든 이후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는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우리가 선택하는 삶을 살기. 그 선택의 기저엔 모든 걸 초월한 평등이 있고 그곳에서 출발한 선택이란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나는 이 작은 공동체를 통해 배우고 있다.
“그래. 우리는 정상성의 언어에 갇히지 않고서도 제 손으로 가족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 그날 수빈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퀴어하다’는 건 어쩌면 상상력을 확장하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는 더 퀴어한 것을 꿈꾼다. 나와 내 친구들이 서로의 연인 혹은 친구와 법적 가족이 되는 꿈. 신혼부부 전세 대출 같은 제도를 통해 2인 가구에 걸맞은 주거 공간을 보장받는 꿈. 복잡한 서울과 값비싼 망원동을 벗어나서도 지금처럼 다 같이 이웃사촌, 아니 ‘이웃 가족’으로 사는 꿈. …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이 퀴어해지는 것이다.” -시시선, ‘당신이 모르는 퀴어들의 마을’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p.29)
[필자 소개] 손수현. 배우. 2013년에 데뷔해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서울 연희동 언저리에서 세 마리의 고양이 가족과 인간 가족 셋이서 오손도손 살고 있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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