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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노동자 희정의 책 『두 번째 글쓰기』를 읽고
기록노동자 희정은 그동안 뉴스에서 한 줄짜리 기사로 소비되거나 단순히 숫자로 치환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엮어 책을 내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최근 『두 번째 글쓰기』(오월의봄)를 출간했다. 이 책은 다른 이의 노동을 기록하는 자신의 노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에 담긴, 누군가의 큰 노동이 작게 새겨지는 일부터 바꾸고 싶다는 마음. 인터뷰는 서로가 서로의 청중이 되는 일인 동시에 애를 쓰는 과정이라는 생각. 인터뷰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함께 작업한 결과물을 내놓을 때 묘한 부채감을 느낀다는 작가의 그 따뜻함은 책 전반에 녹아있다.
기록노동자 희정이 인터뷰 후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엮어낸 책 『두 번째 글쓰기』에서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 기록노동자 희정이 쓴 『두 번째 글쓰기: 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 (오월의봄, 2021) |
타인의 노동을 위한 노동
나는 과거 노동조합 상근 활동가로 일했다. 어릴 때부터 나름의 정의감에 불탔던 나는 하루에 많게는 네다섯 지역을 오가며, 도로 위에서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래도 집회나 농성장 같은 투쟁 현장으로 가면 힘이 샘솟아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민중가요가 울려 퍼지면 제어 불가능한 어깨춤을 추며 흥이 최고조로 올랐다.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농성을 준비하는 이들과 함께 분노했고, 투쟁 끝에 승리한 노동자들과 함께 울었다.
파업 등 투쟁이 벌어지면 기간과 관계없이 현장으로 지원을 나가야 했다. 농성장에서 중년 남성의 ‘애인’으로 불리거나 중년 여성의 ‘딸’로 불리기도 했지만, ‘무난한 사람인 척’ 했던 ‘어린 여자’ 시절 희정의 이야기는 나의 경험과 다르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투쟁을 하게 된 경위를 면밀하게 살피고 그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노조 간부였던 나는 빨리 그 현장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조합원들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했다. “몇 살이냐”,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은 기본이고, “부모님은 뭐 하시냐”는 질문도 간혹 받았다.
당시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 아니라 노동자들과 친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내가 먼저 나서서 ‘어린 여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희정이 자신의 기록 작업을 두고 ‘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이라고 말했듯, 노조 활동가이면서도 정작 노동자로서 살아 본 경험이 없던 나는 타인의 노동 권리를 위해 노동하는 사람이었다. 노동자였던 경험이 없을 뿐더러 ‘어린 여자’였던 나는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해도, 결코 그들과 같아질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들의 삶에 가닿았냐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웃음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되는 일도 없었다. 다만 아집 있고 우악스런 그들이 짓는 웃음을 좋아하게 됐을 뿐이다. …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정말 낯선 이야기. 그 쓴웃음에서 세상의 이면을 막연히 짐작해볼 뿐이었다.” (책 20-21쪽)
▲ 『두 번째 글쓰기: 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 (희정 저, 오월의봄, 2021) 뒷 표지 중에서 |
누군가에게 “중요한 일”과 세상의 “하찮은 일” 사이
해고 노동자의 생계 문제가 수 차례 회의 안건으로 오르내리는데도 내 월급은 따박따박 통장에 꽂혔다. 부끄러웠다. 언제까지 ‘어린 여자’로만 타자화되는 것도, 상황에 안주하는 것도 그만두고 싶었다. 노동조합을 나왔다.
그 후 최저임금을 받으며 파트타이머 노동자로 일했다. 고단한 일상과 일터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부당함을 고스란히 체감했다. 희정은 인터넷에 ‘노조 욕’이 난무함에도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찾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에는 노동자가 “잃어버린(또는 빼앗긴) 것이 ‘권리’였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190쪽)기 때문이라고.
내가 일하면서 만났던 청년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이 겪는 이 일이 중요한 문제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190쪽)었다. 임금 계산법부터, 일터에서 개선해야 할 문제들, 고강도 노동에 따른 착취 등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알음알음 알려주자, 몇몇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가 겪은 일이 그렇게 하찮나요? 이 질문을 받으면 마음이 급해졌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일과 세상의 하찮은 일 사이의 간격,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끄적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을 놓을 자리를 찾아다녔다.” (책 190쪽)
나는 함께 일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지역의 여성들을 모아 독서모임(포항여성독서모임 FEMINA)을 만들었다. 매번 모임 내용을 녹취해 타이핑한 후 모임원들에게 보내는 노동은 몹시도 고되지만, 동시에 이것이 모임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다행히도 모임은 2년 넘게 잘 유지되고 있다.
▲ 청년 여성 노동자들이 만든 ‘포항여성독서모임 FEMINA’ 모임원들의 온라인 회의 인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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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하고 세상이 다르게 보여”(198쪽)라고 말하던 싸우는 노동자들처럼, 몇몇 사람은 이 독서모임을 통해 자본주의와 노동을 재정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평생 할 수 있는(하고 싶은) 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된 순간이다.
회사가 돌연 복직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겨 농성을 다시 시작했다는 해고 노동자들의 소식을 듣고 엉엉 운 적이 있다.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불렀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런데 친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주변인들의 모름을 앎으로 바꾸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연대였다. 내가 계속해 왔고, 계속할 수 있는.
위로와 연대도 “사람이 하는 일”
주류 사회로부터 자꾸만 지워지는 존재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얼마 전 내가 나고 자란 지역에 카페 겸 책방(B급취향)을 열었다. 우스갯소리로 허수아비만 세워놔도 특정 정당이면 당선된다는 보수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이 공간이 시도에 그칠지, 어떠한 작은 변화를 견인할지 모르겠다. 다만 이곳은 변방에서 보내는 내 연대의 마음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이런 나와 내 뜻을 응원한다며 마음을 보내온다. 책 속에서 희정은 “어쩌면 연대란, 같은 곳을 본다고 착각하며 나란히 걸으려고 노력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를 ‘나’로 보여주고 싶은 것도, 같은 곳을 보고 싶은 것도 욕심이다. 그럼에도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착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란히 걸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연대란, 같은 곳을 본다고 착각하며 나란히 걸으려고 노력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욕심과 현실을 줄타기하며, 오늘도 나와 다른 세월을 산 사람을 만나러 간다.” (책 186쪽)
▲ 얼마 전, 내가 나고 자란 포항에서 수제디저트 카페 겸 책방 <B급 취향>을 열었다. 주류 사회로부터 자꾸만 지워지는 존재들과 함께하고 싶다. 이곳은 변방에서 보내는 내 연대의 마음이다. © 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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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성찰, 그 사이를 오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마음을 보태는 것. 저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곳곳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는 ‘함께’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벌어진 가혹한 일이 내일도 모레도 끄떡없이 계속”되고, “나는 죽을 것 같은데 몹시 말짱한 세상”(209쪽)은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 이를 부수지는 못하지만 작은 흠집이라도 내기 위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지우는 사람이 있는 한 기꺼이 스스로 티끌이 되겠다는 사람들. 티끌이 되는 것이 내가 찾은 가능한 한 오래, 어쩌면 평생 할 수 있는 연대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애쓰며 찾은 연대의 방식을 희정의 책 『두 번째 글쓰기』 속에서 발견한다. 그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만나는 순간이다.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말하고자 한다.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자신에게 벌어진 가혹한 일이 내일도 모레도 끄떡없이 계속된다. 나는 죽을 것 같은데 세상은 몹시 말짱하다. 그 말간 얼굴을 한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오늘도 생겨난다. 그러니 말한다. 읍소하고 항변하고 동의를 구하고 지지와 연대의 끈을 찾는다. 사람이라 말하고, 사람에게 말하고, 사람들 속에서 말한다. 품평과 비난도 사람이 하지만, 위로와 연대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까진 언어가 필요하다.” (책 209쪽)
[필자 소개] 히니: 책읽기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평생 할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인가 찾다가 덜컥 고향 포항에서 수제디저트 카페 겸 책방 <B급 취향>을 차렸습니다. 매일 디저트를 만들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것이 너무 즐거운 반면, 몸이 한 개여서 억울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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