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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여우누이
옛이야기에서 막내딸은 착하고 희생적인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다. 그런데 <여우누이>의 주인공은 이런 통념을 홀딱 뒤집는다. 그녀는 악당이다. 낮에는 ‘예쁜 짓’을 하고 ‘애교’를 부리는 부잣집 막내딸이지만, 한밤이 되면 붉은 꼬리와 이글대는 눈빛을 드러내고 야수로 돌변한다.
더 오싹한 것은 여느 여성 악당들과 달리 그녀에게는 피해자 서사가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젠더 폭력에 대해 복수하려는 ‘한 많은’ 여자가 아니며, 꼬집어 응징해야 할 가해자가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악당에게 앳된 여성의 얼굴은 숨기 좋은 가면일 뿐이며, 성역할은 비장의 공격 무기가 된다.
악의는 없다. 목표는 오직 하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천 명을 잡아먹어야 될 수 있다는 그 ‘사람’은 고작 ‘여우 같은 여자’가 아니다.
▲ <여우누이>의 주인공은 악당이다. 그녀의 살생은 응징이나 복수가 목적이 아니다. 악의도 없다.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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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으 어떤 집이서 아덜은 셋이나 두었넌디 딸이 없어서 딸 두기가 소원이었다. 그리서 이 집 내외는 아덜은 다 죽어도 딸을 두었이면 좋것다고까지 딸 두기가 소원이였다. 그렁께 삼시랑이 이 내외 허넌 짓이 밉상시러워서 불여시를 점지히서 딸을 낳게 힜다. 딸을 낳게 됭게 이 내외는 늘 소원헌 대로 딸을 나서 애지중지히서 귀엽게 잘 키웠다.> (『한국구전설화: 전라북도편 1』 임석재전집-7, 1917년 정읍 이씨 외의 이야기)
그 집은 부자다. 소와 말이 외양간에 그득하고, 권력과 부를 대물림할 아들도 셋이나 있다. 아쉬움이라야 무릎에 앉혀놓고 애지중지할 귀염받이가 없다는 것뿐이다. 농경사회이자 지독한 가부장 사회에서 허물 축에 낄 일도 아니지만, 열쇠는 언제나 풍요로움이 아니라 결핍된 하나에 있다. 이 집 내외는 없는 나머지 하나를 채우지 못해 안달이다. 때문에 이들의 신은 풍요로움을 축복할 기회를 놓치고, 그들과 꼭 닮은 욕망 덩어리를 고명딸로 선물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고명딸은 고명의 자리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싯째도 밤중에 외양간 옆이서 은신히각고 지켜봤다. 한밤중이 되여 시상이 모도 자서 조용허게 됭게 큰방 문이 살째기 열리더니 어린 누이동생이 나와서 마당에 내레가서 재주를 시 번 뽈딱뽈딱 넘더니 꼬리가 아홉 개 돋친 여시가 돼각고 정지로 들어가서 손과 폴뚝에다 찬지름을 볼라각고 말 똥구녁으로 손과 폴뚝을 집어너서 간을 내서 먹었다. 그렁게 말은 폭 꺼꾸러져서 죽었다. 누이동생은 간을 다 먹고 나서는 마당에서 재주를 시 번 넘어서 애기가 돼각고 큰방으로 들어갔다.>
밤마다 그녀가 찾는 것은 말의 간이다. ‘간을 빼 먹는다’, ‘간이 크다’, ‘간담이 서늘해진다’는 표현처럼 간은 생명의 정수이자 위엄과 용기를 주관하는 장기다. 더구나 말은 민가에서 흔히 기르던 소와 달리 행정과 전쟁에 동원되는 짐승이다. 막내딸이 갈망하는 ‘사람’은 정치 군사 권력의 주인이며, 천 명을 죽여야 얻을 수 있는 절대 권력자의 자리다.
그녀에게 동원 가능한 수단은 탄생을 주관하는 여성의 성역할이며, 첫 번째 제거 대상은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을 물려받을 아들들이다. 그녀는 오라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끼를 받아주는 산파를 가장하여 말의 목숨을 빼앗는다.
그녀의 전략은 적중한다. 아버지가 도리어 목격자인 아들들을 내쫓은 것은, 미심쩍게 여겨오던 아들들과 달리 막내딸을 의심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가 감히 성인 남성의 권력을 탐하여 ‘요망스레’ 자리를 넘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티 없는 그의 막내딸은 아버지의 등 뒤에서, 가장 내밀한 공간인 큰 방을 근거지로, 부엌과 외양간을 오가며 치밀하게 한밤의 전쟁을 이어간다.
<싯째아덜은 집에서 내쫓겨서 발 가는 대로 그저 걸어갔다. 하루는 어떤 마을에 지내가니랑께 아그덜이 거북이 한 마리를 잡어각고 샌내키에다 묶어각고 이리 끌고다니고 저리 끌고다니고 해서 보기가 불상히서 그 거북을 사각고 바대다 넣어 주었다. 그러고 (...) 강가에 쉬여 앉어 있니랑께 강물이 짝 갈라지더니 강 속에서 하연 말을 탄 최립됭이가 나오더니 “당신은 우리 누님이 죽게 된 것을 살려 준 사람이니 우리 아버지 용왕이 모시고 오라고 히서 왔이니 같이 갑시다”하고 말힜다.>
폭력이 지배하는 인간의 땅은 아이들조차 산목숨을 희롱하는 지옥이 되어간다. 셋째 아들은 그 땅의 끝에서 바다를 만난다. 바다는 세상의 물이 모두 흘러드는 곳으로, 지구 생명의 근원이다. 용왕은 깊은 바닷속에서 거대한 품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인물이다. 자기 딸을 새끼줄에 묶어 끌고 다니며 학대한 어리석은 뭍의 인간들을 응징하는 대신, 딸을 구해준 은인을 용궁으로 초대한다. 용왕의 아들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짚풀 모자를 쓴 소박한 모습이며, 겸손한 태도로 떠돌이인 셋째 아들을 등에 업고 용궁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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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아들은 용왕의 딸인 거북의 남편이 된다. 물의 신인 현무(玄武), 곧 검은 무사의 배필이 된 것이다.
<싯째아덜은 용궁에서 재미나게 잘 살었다. 그런디 (...) 부모가 어텋게 사넌가 보고 싶어서 각시보고 전에 살던 디를 다녀오고 싶다고 힜다. (...) 각시는 정 가보고 싶으면 가보라고 험서 흰 백마를 한 마리 주고 또 노란 병 허연 병 퍼런 병 뻘건 병 니 개를 줌서 정 급헐 적이는 병 하나씩을 뒤로 내던지라고 힜다.>
여우가 세상을 검게 태우는 붉은 불이라면, 검은 현무는 세상의 모든 빛깔을 품고 다룬다. 그녀는 남편과 여우의 위태로운 대면을 훤히 내다보고 소박한 말 한 필과, 폭력에 맞설 몇 가지 빛깔을 호리병에 담아 내준다.
<가 봉게 동네는 없어지고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 각담 우그에는 사람으 해골바가지랑 말 소의 뺍다구가 질비허니 놓여 있었다. (...) (누이가) “아이고 오래버니, 이거 웬일이요. 어서 오세요. 이거 멫 해 만이요, 어서 집이로 들어갑시다”이럼서 반갑다고 손을 잡고 방으로 끌고갔다. (...) 누이동생은 오래비를 오래간만에 왔다고 밥을 히 주겄다고 정지로 들어갔다. 들어감서 노끈으로 오래비 몸을 매고 노끈 한 끝은 지 손에 쥐고 있었다.>
정복자가 된 여우누이는 노끈과 밥과 해골바가지로 통치하고 있다. 노끈으로는 묶고, 밥으로는 달래고, 해골바가지로는 공포를 짓고 퍼뜨린다. 무엇을 옭아매고 조르는 노끈은 아주 오래된 폭력이다. 앞에서 아이들이 거북을 학대할 때 쓰던 새끼줄과도 겹친다. 밥은 ‘밥이나 먹고 가라’는 여성적인(?) 지배 방법이다. 그녀는 오라비를 안방에 묶어놓고 부엌으로 나간다. 안방은 대접받는 자리지만 칼자루는 부엌에 있기 때문이다. 뼈다귀와 해골바가지는 공포와 질서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지 않다. ‘각담 위에 즐비하게’ 전시된 죽음은 폭력에 대한 숭배가 주요 통치 수단임을 나타낸다.
<(...) 오래비는 (...) 지 몸에 매여있는 노끈을 풀어서 문고리에다 매고 뒤 베람빡을 뚫고 나와서 말에 올라타고 나는 간다 허고 쏜살같이 말을 몰고 달아났다.
그렁게 정지서 밥을 허던 누이는, “히히 오라버니 하하 오라버니, 진지 자시고 가라넌디 어찌서 기냥 가요?” 이럼서 뒤를 쫓어왔다. 보니께 누이는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불여시가 되어서 쫓어왔다. 누이는 “말 한 때 사람 한 때 두때 먹을 것을 놓친다. 내가 구백구십구 명을 잡어먹고 한 사람만 더 잡어먹어서 천 명을 잡어먹어야 되넌디 놓치게 됐다, 아이고 분해 아이고 분해” 이럼서 차꼬 쫓어왔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알려진 것과 같다. 오라비는 거북의 호리병을 차례로 던져 여우를 불태우거나 얼음에 가둬 죽이고 살아남아 아버지의 땅을 등지고 아내의 큰 바다로 돌아간다.
실제로 여우라는 동물은 산 사람을 잡아먹거나 소나 말을 공격하지 않는다. 잡식성이며, 마을 근처 야산에 굴을 파고 쥐 등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산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여우 때문에 마을이 폐허가 되기보다 이미 폐허가 된 마을이 여우를 불러들인다. 전쟁이나 기근, 전염병이 휩쓴 뒤에 쑥대밭이 된 마을이라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라면, 주인 없는 무덤에 여우들이 몰려들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그런 세상을 만들어 온 것은 남성 가부장 권력이다. 여우는 온몸을 불태우며 아버지인 당신을 ‘미러링’하고 있는 ‘빌런’인 것이다.
한편 거북은 여우가 재현하는 불의 폭력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슈퍼히어로’이자, 여우를 넘어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 자신이기도 하다. 오늘도 드넓은 이야기 바다의 그녀들은 세상의 모든 빛깔 중에서 또다른 이야기를 호리병에 담고 있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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