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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그 이후의 삶> 어머니의 죽음 이후 20년
젠더폭력 생존자들이 기록하는 <폭력 그 이후의 삶>을 연재합니다. 젠더폭력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피해와 저항과 생존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본 기획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옷을 입을 땐 배를 확실히 가린다.
머리를 빗을 땐 절대 왼쪽으로 가르마를 타지 않는다.
밝은 표정과 높은 목소리 톤을 유지한다.
옷을 입을 때 배를 확실히 가리는 건, 어릴 적에 끓는 물이 담긴 솥에 담가졌을 때 생긴 흉터를 가리기 위함이다. 머리를 빗을 때 절대 왼쪽으로 가르마를 타지 않는 건, 쇠파이프로 맞아서 생긴 흉터를 가리기 위함이다. 밝은 표정과 높은 목소리 톤을 유지하는 건, 나 스스로가 불행하게 컸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한 나의 외출용 가면이다.
▲ 항상 웃는 표정에 활발해 보이는 내 모습은 외출용 가면이다. 실제 나는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나‘를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일러스트 제작: 두두사띠) |
나도 어머니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거란 두려움
199x년 x월 x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죽음으로써,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교도소로 갔으며, 나와 동생은 더 이상 아버지에게 맞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했다.
딱히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기에, 나는 동생과 함께 홀로 생활하고 계셨던 할아버지를 모시며 매달 국가에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와 학업을 이어갔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가난한 내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재학 중에만 10여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에 입학할 수는 있었지만 학업을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동생을 위해서, 취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을 자퇴하고, 세무회계를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회사에 다니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면서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성이 드러나며 우리는 잦은 다툼을 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칼은 물론이고 가위나 포크까지 숨겼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오면 심장이 멈춰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근거렸다. 남편이 목소리를 높이면 내가 아예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폭력성은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아이들 앞에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고, 나를 때리는 바람에 큰아이가 경찰에 신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머니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게 했다. 아버지가 교도소로 간 것만으로 해결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는 걸,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20여년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다.
▲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은 시기에 쓴 일기들. |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기를 포기한 이유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된 지 2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가출했다.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은 나는, 몇날 며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만 했다. 눈물이 말라서 더는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을 때, 내가 많이 지쳐 있다는 걸 알았다.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만 있으면 이 악몽 같은 세상에서 사는 걸 그만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근처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저 죽고 싶은데 아이들 좀 봐 주세요.”
구청 사례관리팀으로부터 긴급 개입이 시작되었다. 사례관리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의 양육을 최대한 도울 테니 상담 치료를 시작하자고 제의하셨다.
하지만, 상담 치료 선생님이 40대 중후반의 남자 선생님이라는 걸 알고 곧바로 나는 상담을 거부했다. 나와 선생님이 내담자와 치료자라는 관계라는 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방에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남자와 단 둘’이라는 것만 되새겨졌다. 벽에 걸린 액자의 유리가 흉기로 보였고, 방을 밝혀 주는 스탠드가 쇠파이프로 보였다.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큰 소리가 날 것 같았고, 혹시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맞을 것 같았다.
곧바로 상담 치료 선생님이 지긋한 연세의 여자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내가 도통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 치료를 시작하고 처음 몇 달은 선생님의 질문에 간단한 답을 하는 데 그쳤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걸 선생님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동생이 태어나기 좀 전의 일이었으니,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니, 현관에 쌀이 쏟아져 있었고 밥통이 부서져 있었다. ‘오늘도 엄마가 맞았구나.’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엄마를 찾았다. 안방에서 수건을 목에 대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수건에 빨간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칼로 어머니의 목을 그은 것이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동생을 지키려면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을 잡아가 주는 사람은 경찰’이라고 여겼던 나는, 경찰이 ‘나쁜 아버지를 잡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러나 경찰은 ‘엄마와 아빠가 싸운 것은 집안일’이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데려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네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도 너를 똑바로 교육시키지 못한 네 엄마를, 내가 교육시키는 거다.’라고 말하며 어머니가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 그 일 이후 나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걸 포기했다.
20년간 나를 짓눌러 온,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한 번 입을 열기 시작하니, 그 다음부터는 좀 더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때의 이야기를 했다.
중학생이 된 지 4개월이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에 없는 사이에 나와 동생을 데리고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가난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14년 중 가장 자유롭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2주일이 채 되지 않아, 주민등록을 통해 내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낸 아버지는, 학교로 날 찾아왔다. ‘엄마와 사는 곳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너를 어떻게 할지 나도 모르겠다.’라고 협박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집에 데려갔다. 그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도주한 지 5일 만에 경찰에 붙잡혔고, 곧바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일가친척이 없었던 탓에, 그간 있었던 아버지의 폭력을 증언해 줄 사람은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유리한 쪽으로 증언하지 않으면 네 동생을 고아원에 버리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가정적이었고,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던 사람’이라고 위증을 했다. 법원은 ‘아내에게 교재중인 남성이 있었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했다.’라는 일방적인 아버지의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가 그 집에 아버지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저 때문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거예요. 제가 동생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았어요. 그런데도 저는 아버지에게 이로운 증언을 했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전부 제가 잘못한 거에요.”
20여 년만에 어머니를 향한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며, 끝없는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 생존자의 말하기는 고통만이 아니라 치유의 힘과 용기를 공유한다. (일러스트: 정은) |
배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
과거를 돌아보는 힘겨운 시간을 지내는 한편으로, 나는 구청의 사례관리 선생님이 소개시켜 준 ‘여성의전화‘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남편과의 완벽한 분리를 위해 이혼 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엔 협박이 섞인 편지를 보내며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으로 인해 많이 위축되었지만, 선생님들과의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용기를 얻고 이혼 소송을 강행했고, 성공했다.
남편이 가출한 시점으로부터 약 4년이 지난 지금, 가장 큰 변화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이들의 표정이라고 단연코 이야기할 수 있다. 남편의 존재로 인해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던 집안의 공기가 가시자,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많이 어렸던 탓에 아빠의 기억이 전혀 없는 작은 아이를 보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하는 큰 아이에게 ‘잘 버텨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사소한 일에도 ‘내가 살아 있는 게 잘못이야.’라고 귀결시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였다.
상담 치료가 계속되면서, 죄책감이 분노로 바뀌었다.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제도가 있었다면, 가해자의 영역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증언할 수 있었을 텐데!! 주민등록 열람 금지 제도와 비밀 전학 제도가 있었다면, 아버지가 내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오지도 못했을 거고, 어머니와 살던 그 집에 내가 아버지를 데리고 가지 않았을 거고, 어머니도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어머니를 살리고 싶어서 경찰서에 찾아갔을 때, 경찰들이 집안일이라며 덮어버리지 않았다면! 가정폭력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명백한 폭력 행위라고, 아버지를 우리와 분리시켜 주었다면! 그랬다면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은 지금까지도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사회는 우리 가족을 버렸어요!!”
화를 내고, 소리도 치고, 억울함에 울기도 했다.
내 마음 속에는 죄책감과 분노, 억울함, 슬픔 등의 감정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심지어 한 달에 두어 번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 어린 시절의 내가 된 채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려 안절부절 못 하곤 한다. 현실로 돌아오는 데에는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이 걸리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미쳐가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 겁이 나곤 한다.
그렇게 어린 시절에 겪었던 폭력의 흔적은 그 배의 시간을 넘게 흐른 지금까지 계속 내 안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었다면 그 아픔에서 회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남들은 항상 밝은 표정을 짓고, 활발하고 경쾌한 목소리를 내는 나를 ‘진짜 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만들어진 나’를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언제쯤 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잊어버리는 게 가능하긴 할까?
나에겐 꿈이 있다.
내 한 몸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에서 실컷 잠만 자는 꿈.
더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아주 많이 자고 일어나면,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악몽이었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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