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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는 없는 머시기마을 이야기①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제 삶을 따뜻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열두 명이 밀도 있게 들려주는 주거생애사이자, 물려받은 자산 없이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갈 곳을 찾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는 독자들에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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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나오지 않는 한 ‘마을’이 있다. 특정 지역을 거점으로 삼지 않은 채로, 사람들의 느슨한 연대로 이뤄진 이 마을의 이름은 ‘머시기마을’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주민의 대다수이다. 때때로 만나 서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생존 신고’를 이어오고 있다.

 

어쩌면 우린 매일 전쟁을 겪고 있는지도

 

시작은 이랬다. 2020년 여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상영회 뒤풀이에 모인 여성들이 있었다. 영화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 뿐 아니라, 영화를 본 사람들 각자가 일상에서 겪는 수많은 전쟁과 치열한 생존에 관한 이야기들을 끌어냈다. 정답 없는 질문, 바뀌지 않은 세상에 대한 갑갑한 마음을 솔직하게 꺼내며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유쾌함으로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밤이었다.

 

한참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때로 이렇게 만나 생존 신고를 이어가자’ 제안한 이는 이길보라 감독이었다. 그 제안에 한 마디 두 마디가 얹혔다. “마을 이름은 머시기마을이 어때?” “웅을 마을 이장으로!” 머시기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호명하고, 우리의 구심점을 모색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2020년 7월 22일, 전환마을부엌 밥.풀.꽃,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이길보라 감독, 2018) 공동체 상영회 “어쩌면 우린 매일 전쟁을 겪고 있는지도”의 현장. 영화 상영 후 작은 원으로 모여 서로의 소감을 나누는 모습.  ©강효선

 

그 날의 공동체 상영회는 ‘어쩌면 우린 매일 전쟁을 겪는지도’라는 제목으로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이 모여 만든 자리였다. 이미 다른 곳에서 진행한 상영회에 참여했던 우리에게는 영화를 본 후 제작진과의 질의응답만으로 풀리지 않는 복잡함이 남았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함께 보길 원했고, 함께 이야기를 꺼내놓고 들어보고 싶었다.

 

영화 상영을 마치고 감독과 관객 구분 없이 원으로 둘러앉아, 영화를 보고 떠오른 생각들을 나눴다. ‘결국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와 한국 정부가 책임지는 모습은 없었던 결말, 차오르는 갑갑함, 한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무거움, 연결되어 떠오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 참사,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들, 코로나19…’ 등 여러 단어와 문장들이 우리 대화 속을 채웠다.

 

“저는 광주에서 왔어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세대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어요. ‘문화’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접근하는 게 아니라, 광주 사람이니까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요의 말로 역사를 접해왔어요. 그런 것에 반감이 있었던 저는 어떤 방식으로 5·18을 기억하고 활동하고 생각해야 하나 계속해서 저의 화두로 가지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며 그 생각이 또 떠오르는 거예요. 5·18은 광주에서 한국인이 한국인을 학살한 사건이잖아요. 영화에서는 한국인이 베트남인을 학살하죠. 이게 결국 뭐가 다른가. 똑같이 인간이 인간을 죽인 거죠. 학살이라는 건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인데 어디서나 폭력적인 일들은 벌어지고 있고 또 나도 폭력이라는 걸 행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폭력'이란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조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기억해나갈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이 들어요.”

-하리 (출처: 기억의 전쟁gv, 어쩌면 우린 매일 전쟁을 겪고 있는지도, 2020년 7월, 녹취록) 

 

“흥미로운 지점은 베트남 전쟁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들은 의심되는 곳에 살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태워버리는 방식으로 일어났었는데, 사실 그 방식이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부터 있었던 군대 문화이고 그것이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진 거고, 또 사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광주로 갔거든요. 이런 연결을 읽어내려는 시도를 물론 학자들도 하겠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시선으로 20대의 시선, 30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력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실제로 나의 몸은 어디로 통과해서 어디를 경유해서 2020년에 서 있는지, 어떤 문화들이 사라지지 않고 잔존해서 그런 폭력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지, 정말 사라졌는지? 저는 그게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를 중심에 두고 이렇게 올라가 보려는 노력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개인 서사, 여성 서사를 만드는 걸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오늘 아침에 장애학 관련 책을 읽었는데, 장애 극복 서사가 아닌 장애 해방 서사를 만드는 게 너무너무 중요하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서사가 정말 많구나, 왜냐면 내 앞에 걸어간 수많은 여성들이 있지만 그 여성들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더 많은 시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나와 우리를 중심에 두고 계속해서 역사쓰기를 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길보라 (출처: 기억의 전쟁gv, 어쩌면 우린 매일 전쟁을 겪고 있는지도, 2020년 7월, 녹취록)

 

▲ 2020년 7월 22일, 전환마을부엌 밥.풀.꽃,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이길보라 감독, 2018) 공동체 상영회 “어쩌면 우린 매일 전쟁을 겪고 있는지도”의 현장. 모두가 동등하게 위치한 원에서 질의응답과 소감을 나누고 있다.   © 강효선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책에 묻은 흔적과 공책에 적힌 편지로 만난 스무 명

 

어쩌면 우린 수많은 전쟁과 폭력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닐까? 기후위기와 코로나19를 마주하며 생존을 위한 저항은 일상 속에서 더욱 절실해졌다.

 

머시기마을의 두 번째 생존신고는 장기화되는 코로나19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만들어졌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다. 찐한 첫 만남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었고, 마침 그 시기에 출간된 이길보라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두 달 후에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기약 없이 미뤄졌다.

 

동시에 ‘조용한 학살’이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코로나19로 여성 자살(시도)율이 급격하게 늘어난 현상을 뜻하는 단어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우울감이 깊어진 지인들이 많았다.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만나야 했다. 위기 상황에 사회는 거리를 두라고 했지만 마냥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우린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온라인으로만 연결될 수밖에 없을까? 인터넷을 쓸 수 없고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의 소식을 듣고 연결감을 느껴왔을까?

 

▲ 2021년 1월 6일~2월 17일(1차 책 릴레이), 2021년 3월 14일~6월 26일(2차 책 릴레이). 머시기마을의 두 번째 생존신고,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만남의 매개체가 되었던 책 보따리. 책 보따리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이길보라 지음, 문학동네, 2020) 1권과 공책 1권으로 구성되었다.

 

이런 질문들이 모여 두 번째 생존 신고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책 릴레이가 만들어졌다. 책 릴레이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한 권과 하나의 공책으로 구성된 ‘책 보따리’를 ‘우편’으로 주고받으며 진행되었다. 책 보따리를 받은 사람은 2주간 책과 다른 사람이 공책에 남긴 글을 읽는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하고픈 이야기를 그 위에 다시 쓴다. 2주가 지나면 다음 사람의 주소로 책 보따리를 보낸다.

 

책 릴레이를 진행하며 “굳이 그렇게 만나야 해?”라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SNS에서 서로를 태그하거나 온라인 플랫폼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보다 효율적이고 눈에 띄는 방법이 있었다. 책 보따리를 우편으로 교환하는 만남은 배송 사고나 분실의 위험도 있고, 배송료나 배송 시간 등의 여러 비용도 발생했다. 그럼에도 책 릴레이를 선택한 이유는 직접 만나기 위해 기꺼이 해오던 수고로움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만나기 위해 시간을 잡고 길을 찾는 것처럼, 우린 제각기 다른 글씨체와 문장들 속에서 타인과 만나려 애썼고, 나와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은 누군가의 흔적에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약 4개월 동안 책에 묻은 흔적과 공책에 적힌 편지로 스무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책 릴레이 중 한 공책에 쓰인 익명의 메모.

 

‘머시기’처럼, 경계와 경계 사이의 빈 공간

 

“경계와 경계 사이를 오가려면 먼저 내가 걸쳐있는 경계가 무엇인지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지금껏 내가 나의 '단점'이라고 인식했던 면들이 어쩌면 소중한 '다름'일 수도, 내가 발 딛고선 '경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기혼여성 + 무자녀 + 프리랜서 + 페미니스트’로서 사람들의 무례한 질문들을 참 많이 받아왔고 오랜 기간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경계들을 오가며 만난 사람들과 새롭게 열리는 세계가 있어 한편으로는 기쁜 시간이었다.”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책 릴레이 참가자가 책 보따리에 남긴 메모.

 

첫 만남 이후로 세 번의 ‘생존신고’를 이어왔다. 지금은 40여 명의 사람들이 머시기마을에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회에서 흔히 드러나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생존신고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는지 알아차린다. 또한 내가 어떤 서사를 가진 사람인지 감각한다. 사회의 납작한 시선 속에서 나는 가난한 활동가지만, 머시기마을 속에서 나는 농부의 딸, 결혼을 꿈꾸는 퀴어, 지속가능한 삶과 커뮤니티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된다.

 

‘머시기’라는 모호한 단어는 대화 속에서 빈 공간을 만들어준다. ‘머시기마을’이란 따뜻한 연결감 속에서 ‘우린’ 경계와 경계 사이 생존자들의 서사를 다시 읽어본다.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생존신고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필자소개] 웅: 커뮤니티 빌더, 머시기마을 이장(머시기마을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삶을 듣고 지지하는 역할). 속도가 느린 사람이다. 안전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 흙을 살리고 씨앗을 뿌리는 일에 관심이 많다. 현재는 고정된 소속 없이 채식식당 밥풀꽃, 넥스트젠, 길잡이별을 찾는 여행, 머시기마을, 핫핑크 돌핀스, 새벽이 생츄어리, 퍼머컬쳐 공동체에서 활동 중이다. 때로는 최백조라는 이름으로 타로를 읽는다.   일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제 삶을 따뜻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열두 명이 밀도 있게 들려주는 주거생애사이자, 물려받은 자산 없이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갈 곳을 찾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는 독자들에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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