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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경계 위에서] 트랜스젠더의 미투(#MeToo)

 

※ [젠더의 경계 위에서] 시리즈에선 확고한 듯 보이는 성별 이분법의 ‘여성’과 ‘남성‘, 각각의 한계를 재단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경험과 도전, 생각을 나누는 글을 소개합니다. ildaro.com

 

나는 여성으로 길러진 트랜스젠더다.

정체성을 깨달은 건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당연한 신체의 변화들이 나에겐 당혹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남성 호르몬 치료의 텀이 길어지면 불규칙적으로 월경을 하곤 하는데, 십 대 때의 감정이 다시금 느껴진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인 게 아니라, 나에게는 있어선 안 되는 경험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남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지정성별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폭력의 경험들 때문에 내가 트랜스젠더가 된 것은 아니다. 매 순간 느끼는 불쾌한 감정과, 정체성과 몸이 불화하는 경험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온다. 내가 인지하는 성별 정체성과 어긋난 현재의 나에게 굴욕감을 느낀다. 지나가는 남성의 몸이, 내가 끌고 다니는 이 몸과 한없이 대비되어 보인다. 형벌 같은 몸. 바인더를 하지 않아 배 위에 얹어진 양쪽 가슴을 인지하며 이 글을 쓴다.

 



▲ 올해 3.8세계여성의날에 "FEMINISM PERFECTS DEMOCRACY, #METOO, WE CHANGE THE WORLD"(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 미투, 우리는 세상을 바꾼다)라고 적힌 후원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생계와 노동, 여성성과 ‘위법’ 사이에서

 

이십대 중반, 쿠팡에서 일용직 일을 해오던 어느 날 바(bar) 알바 공고를 보았다. 출근까지 한 시간, 그리고 쉴새 없이 8시간 근무,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또 한 시간이 걸리는 일을 했던 이유는 야간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당일 급여가 입금되었기 때문이다. 바에서 일하게 될 경우, 쿠팡보다 시급이 높고 육체노동 강도가 덜할 것 같았다.

 

지원 의사를 밝히곤 내가 가진 가장 타이트한- 가슴 윗선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집에서 삼 십분 거리에 있는 업소로 면접을 보러갔다. 담당자는 내게 술을 잘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말인즉슨 접대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워낙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긴 했지만, 가게에 비치되어 있는 자그마하고 얇은 옷들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가발을 벗고 쉬고 있으려니, 우울증이 심해 규칙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졌다. 뭘 하고 있는 걸까? 나 스스로가 아니면 나를 먹여 살릴 수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아직 성산업이 아닌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한편으로 죄책감도 느껴졌다. 바에서 면접을 보고 난 후에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기까지, 당시 내 머릿속에서 오가던 성노동 관련 직업에 대한 생각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종사자인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이제와서 생각했을 때, 시스젠더 남성으로서는 그곳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없는 ‘여성성’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중학교 시절, 서울의 문래역 근처에 살았었다. 한 번은 동네에서 길을 잃었는데, 분홍색 전면 창이 줄지어진 거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십 대 초반이 되었을 때 그 동네에서 한 캠페인 부스를 만났는데, 우리 동네에 성매매 업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지도로서 알리는 취지의 부스였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거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럼 어디로 가라는 거지? 캠페인을 마주하는 사람 중에 성노동자가 있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일하는 곳조차 말할 수 없는 이들도 있을텐데…

 

사실 그 캠페인은 청소년(그 중에서도 탈가정 청소년)을 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행사가 청소년 당사자가 아닌 그들의 친권자를 타켓팅 한 건 아닌가 불쾌감이 들었다. <2019년 성매매 실태조사>(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위기 청소년(166명)의 ‘조건 만남’ 경험 비율은 47.6%(79명)이다. 나는 19살 때 가정폭력을 피해서 탈가정한 경험이 있다. 친권자의 실종 신고로 인해 불려간 경찰서에서 조사관에게 제일 처음 들었던 말은 “누가 건들지 않았냐.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였다. 여성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일은 생존을 위해 ‘위법’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인지했다. 성매매방지특별법 등으로 ‘범법자’로 몰릴 수 있는 이들에 대해서 떠올리게 되었고, 또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하고 약자를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성추행과 ‘동성’ 간 데이트폭력 경험

 

이십 대 초중반이었던 2012년의 어느 날,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한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하느라 카페테라스에 오래 앉아있었다. 마감이 되어 가는 시간이었는데 근처 테이블에 중년 여성들과 남성들이 자리를 잡았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한 남자를 남겨두고 그들이 자리를 떴을 때, 그가 나에게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필기를 멈췄다. 예상대로 그 남자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말을 걸었고, 자신이 일하는 회사를 이야기하더니 같이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웃으면서 거절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상황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밤거리에서 도망쳤는데, 그 남자는 내 손목을 잡아채며 아주 음흉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가슴 한 번만 만져보자고 말했다.

 

이때의 성추행 경험은 내가 인권활동을 시작하게끔 만들어 주었는데, 이 사건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하기로 마음먹었던 1년 뒤 2013년에, 나는 ‘동성’ 간 데이트폭력을 겪고 있었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주거가 불안정했던 나에게 당시의 애인(?)은 가스라이팅과 폭력 행동을 일삼았다. 그는 나의 케어를 원하면서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선 신기하리만치 무관심했다. 물리적 폭력이 일어난 날, 현장을 직접 목격한 그의 친구는- 당시에도, 그 후에도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묻지 않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과 기분을 감당하는 건 모두 다 나의 몫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울면서 내게 헤어짐을 통보했다. 이후에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어느 공간에서 나를 알아본 그의 친구들은 ‘반가운’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그들에게 안녕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만든 <폭력과 차별에 침묵하지 않는 당신께 드리는 안내서> 팜플렛. 폭력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거나 주변인으로서의 행동 및 태도를 짚어주고 있다.


내가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동성’ 간의 데이트폭력을 경찰서에서 오롯이 인정받을 수 있느냐? 생각했을 때 그렇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즈비언 상담을 지원하는 곳에서 인권활동의 첫발을 뗐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면 고립감과 우울감에 자살했을 거란 확신이 든다.

 

그리고 단체 내부에서도 성폭력 이슈가 터지자, 나는 내가 겪은 폭력의 경험이 관계 맺음을 하는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어느 정도 성인지 감수성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혹은 2차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이야기하려는 이가 있다면, 최대한 지지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두 번의 강간 경험

 

그로부터 4년 뒤인 2017년 어느 날, 기분 좋게 친구들과 한잔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늦어서 숙소를 잡고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몸이 아프고 옷이 풀어 헤쳐져 있었다. 내가 성관계를 원한다는 시그널을 보냈나? 생각해보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술에 취한 상태였는데 yes나 no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방도 그것을 인식해야만 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당시에 강간 가해자인 그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지나가 버렸다. 흔히들 퀴어 관계 내 성폭력은 이성 간 성폭력처럼 법적인 처벌이 어렵기에 성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성폭력이 성립하기 애매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강간은 강간이다. 정말로 좋아한다면 더더욱 상대방이 관계를 원하는지 물어봐야 한다. 그건 분위기를 깨는 일도 아니고, ‘피씨’(political correct)한 것만도 아니다. 도대체 상대에 대해서 얼마나 만만하게 여기고, 평소 얼마나 잘못된 상식을 가져야 술에 취한 사람을 건드릴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같은 일은 최근에 다시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먼저 떠난 트랜스젠더 활동가를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던 A가 한잔하기를 권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기도 하고 워낙 술을 좋아하는지라 바로 승낙하고 한 시간 거리를 이동했다. 그간 쌓였던 근황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활동 등을 공유하고서, 저녁 9시쯤 되어 슬슬 서울로 향할 시간이 되었다. A는 나에게 다음 날 가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마침 아침 8시부터 움직였던 터라 피곤하기도 하고 술도 마셨기 때문에 그러고자 했는데, 전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돌아누워 잠자리에 든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눈을 떠보니 몸 아래쪽이 너무 아팠다. 나는 그 즉시 소리를 지르면서 A를 밀어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서울까지 가는 기차를 기다리려면 6시간은 족히 남은 상황이었다. 새벽에 내가 홀로 거리에 있다는 게 걱정된 애인은 나에게 택시를 타고 서울까지 오라고 했다. 택시비는 20만 원이 나왔다. 우느라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나는 그녀의 곁에서 곯아떨어졌다.

 

악몽 같은 연휴 기간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내 주변에 나를 걱정하는 이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밥을 챙겨먹지 못할까 봐 배달음식 상품권을 보내주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 내가 강간 피해를 겪었다는 걸 알게 된 지인이 걱정스런 마음에 보내준 배민 상품권. 식사를 챙기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공식화되지 못하는 경험

 

화장실에 갈 때마다 통증을 느끼지만, ‘여성의학과’에 가서 내 상태를 진료받는 것이 무섭다. 정말 다친 걸까 봐. 내가 '여성' 신체라고 인정해야 할까 봐. 내가 강간당한 걸 인정해야 할까 봐.

 

그는 FtM(female to male transgender)이었다. 가해자인 그는 강간을 하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담배가 떨어졌다고 하기에 내가 몇 개비 빌려주었고, 탈가정을 원한다고 하기에 그렇다면 우리 집으로 와도 된다고 권했던 사람이었다. 그날 겪었던 몸에 대한 감각을 깨우면 자해를 하게 될 것 같아 필요시약으로 받았던 안정제만 매일 먹고 있다.

 

나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난 게 아니게 되는데, 내가 말함으로 인해서 내가 속한 소수자 커뮤니티 전체가 욕을 먹는 일이 생길까 봐 두렵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커뮤니티가 혐오자들에게 타겟팅 될까 봐. 우리의 기본권이 보장되기도 전에 범죄 서사로만 부각될까 봐.(감히 내가 누군가를 대표한다 생각하지 않지만, 외부에서는 충분히 그리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생존자로만 받아들여지게 될까 봐. 나를 만났을 때 강간 피해자로만 받아들이고 ‘배려’해줄까 봐.

 

그럼에도 언론 지면을 통해 내 이야기를 남기게 된 이유는- 첫째, 누군가에게 당신과 같은 사람이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다음은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성별 위화감이나 외과적 이슈만이 있는 게 아님을, 온오프라인 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여전히 성폭력에 취약한 상태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되지 않냐고? 불특정 다수에게 트랜스젠더임을 드러내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 성소수자자살예방프로젝트 마음연결 홍보 이미지. “마음연결이 성소수자 자살예방을 위한 전화상담을 운영합니다. 자살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는 성소수자들은 주저하지 말고 전화상담을 이용해 주세요.”


처음 상담심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 교육을 통해서 이전의 경험을 정리하는 계기로 삼고 더는 그로 인해 영향받기를 중단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젠더 폭력 피해는 한 순간 멈춰지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도 유려하게 탈각되는 게 아니라, 슬라임에 먼지가 붙듯이 통합되면서 본체를 뒤흔든다. 가부장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정부 부처 공직자들을 파면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성차별적 판결을 내리는 법원에 불을 지른다고 법이 공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찾아가고 싶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강간 피해 22일 차. 일단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이드) ildaro.com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데이트 초기부터 헤어짐, 이별 후 과정까지 피해자의 눈으로 낱낱이 재해석하며, 데이트폭력이 일어나는 과정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며 데이트폭력의 전모를 밝힌 책이다. 책의 전체 구성은 연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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