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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그 이후의 삶> 나는 지금 연경하다프로젝트 진행 중

젠더폭력 생존자들이 기록하는 <폭력 그 이후의 삶>을 연재합니다. 젠더폭력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피해와 저항과 생존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본 기획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 ‘임작가’는 예술을 동경해서 스스로에게 붙여준 예명이다. 나는 지금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시도-하고 싶은 걸 해보기-를 하고 있다.


임작가의 2022년 해야 할 일

 

- 장편 다큐멘터리 <연경하다프로젝트> 절찬리 상영해서 감독으로서 데뷔하기

- <연경하다프로젝트> 구성안으로 책 출판해보기

- 영상과 그림, 만든 음악들을 전시하는 공간에서 동료들과 춤 공연을 하고 디제잉 파티하기

- 유튜브 ‘탐닉가들’ 1,000명 채워서 수익이 날 정도로 공감과 소통해보기

- 마이너레이저에서 작품과 연계된 조명디자인 프로젝트 성사시켜서 브랜드화 구축하기

- 매달 보낼 양육비 80만원 무리없이 해결하기(감액 소송 고려)

 

또 뭘 써야 할까.. 연습하고 있는 악기 핸드팬으로 나만의 곡을 만들어 연주하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그에 비해 게을러서 정말 다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느리지만 천천히 해나가면 못할 것도 없을 거 같아서 나의 꿈은 ‘백발의 할머니 디제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하고 싶은 걸 해보며 사느라 얼마 전까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다. 주변에선 몇 년 뒤엔 아이들 양육비도 보내줘야 하는데,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려스러운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 걱정해주는 마음이야 고맙지만,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엄마 없는 티 내고 다니지 말라’

 

나도 이런 생활이 사실 도전인 셈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10대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 직종이 20가지가 넘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아무 일이나 하는 것은 내가 늘 살아왔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장 쉬운 선택이다.

 

집에 들어가면 혼자였던 초등학교 고학년, 상을 타고 좋은 일을 해도 칭찬해주는 사람 없이 자랐다. 그러다 보니 ‘어른 없이 잘 컸다’는 칭찬을 받으면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서 늘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 쉼터에서 제공된 일주일 한번 심리상담 시간에 그린 내 그림들에 상담의가 붙인 코멘트. “나도 꽃이고 싶은데 이쁜 색이면 안될 것 같아서”(좌) “외부에서 받는 많은 것들이 나를 뒤덮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뿐”(우)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3년간, 나와 외출하는 척하고선 외진 놀이터에 혼자 두고 늦은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던 새엄마는 아빠와 싸운 다음 날이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다 터지도록 나를 때렸다. 할머니 손에서 떠나 아빠의 새 신혼집으로 가기 전날, 어른들은 내게 미국에서 돈 벌어서 들어온 네 친엄마니까 말 잘 들어야 한다, 말 안 들으면 널 두고 도망갈 것이라고 했다.

 

말을 잘 들어야 했으므로 새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다. 엄마가 도망가면 안 되므로 매질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맞았다. 사실 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어른들 말씀을 잘 안 들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밤마다 두 분이 싸우시는 소리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벌벌 떨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깊게 잠이 든 척 조용히 있는 것이었고 간절히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결국 아빠는 새엄마의 가족에게 보증 서준 빚만 떠안고 이혼을 했다. 촌사람이 인천에 올라와 일만 해왔던 아빠는 두 번의 결혼 실패로 매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골라준 옷을 입던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먹고 자는 모든 것을 혼자 선택해야 했다.

 

어느 날 집에 오신 아빠는 내게 ‘엄마 없는 티 내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말을 잘 듣는 예쁜 어린이가 되고 싶어서, 새엄마가 두고 간 옷들을 꺼내서 입고 멋을 부렸다.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내가 지나갈 때마다 옷을 어디서 사 입느냐고, 멋쟁이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아빠 말대로 엄마 없는 티가 나지 않게 잘한 것 같아서 뿌듯함에 한층 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드리곤 했다.

 

신원을 숨긴 채, 연고 없는 도망자 생활

 

2019년 3월, 온몸에 얼마 전 자해한 칼자국이 여전히 선명하던 즈음에 쉼터에 자진 입소하였다. 더는 숨어다닐 여력이 없었다. 쉼터에 오기까지 4, 5년간을 지방 곳곳에 숨어 살았다. 내가 해결해야 할 나의 가정 문제였기 때문에, 쉼터에 들어가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무력함으로 느껴졌다.

 

돈을 벌어서 집을 구하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혼 소송할 동안의 안정된 생활자금을 모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속도로 휴게소 캐셔를 시작으로 한 달 벌어 다음 숨을 장소를 향해 거처를 옮겨 다녔다. 나중에 아이들이 알게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일을 하면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일당직을 찾아 골프캐디, 모델하우스 상담사, 온천 호텔 프런트, 서빙 등의 일들을 했다.

 

이름을 숨기고, 길에선 고개를 숙이고 다녔으며, 밤마다 문 앞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상등 켜진 차가 서 있으면 몇 시간이고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았다. 날이 갈수록 공황 상태에서 망상으로 이어졌으며 불안은 극에 달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내 목을 조르고 있거나 칼을 들고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워 목적지 없이 사람 많은 길거리를 몇 시간이고 걸어 다녔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불필요한 쇼핑을 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직장 동료나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정신이 좀 나간 애 같다고 수군거렸다. 그 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불안의 감옥 안에 가둬 버린 것이다. ‘혼자서 잘 컸다’는 것이 나를 가장 인정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자랐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도망 다니며 살게 되면서, 술 마시며 만난 모르는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나를 예쁘다고 했다. 그 잠깐의 사랑받는 순간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었지만, 다음 날이 되면 다시 혼자가 된 나 자신이 역겨웠다. 칼을 들고만 있지 않고 긋기 시작했다.

 

집을 나온 날, 주머니엔 500원이 전부

 

‘통통거리며 다니지만, 전형적인 피해자 상이고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있다. 나를 나라도 미리 제한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사람도 아닌데 계속 점프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가정폭력 생존자들의 문화예술 프로젝트 ‘마음대로, 점프!’ 에세이 중-

 

▲ 환희(임작가, 2021) “어린아이마냥 활짝 웃어대는 나의 입.. 그리고 나의 눈에선..”


2015년 11월 30일, 처음 친구들에게 남편의 폭력 사실을 털어놓은 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머니엔 500원이 전부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정말 이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집을 나올 생각을 한 것도 갑작스러웠던 것만큼 준비되지 않았었다. 도와주겠다는 친구들에게 내가 너무 힘들면 연락하겠다고 한 뒤, 숙소가 제공되는 휴게소 계산원 일자리를 구했다.

 

월급 받기 전까지 배고프면 물을 마시고 친구가 사준 속옷으로 번갈아 입으며 버텼다. 휴게소에는 가족들이나 현장직 일을 하는 트럭들이 많이 보였다. 두고 온 아이들 생각에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트럭을 보면 혹시나 아이들 할아버지가 아닐까, 숨을 쉬기 힘들었다.

 

26살, 갑작스러운 임신은 가족 없이 자라온 내게 어쩌면 희망이었는지 몰랐다. 나는 그때도 만삭이 되도록 폭력의 징조가 보였음에도 애 아빠 말만 믿고 임신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 땅에 태어나 내가 한 가장 위대한 일은 아이들을 만난 일이었다. 가슴 저 밑에서부터 저릿저릿한 게.. 처음 느껴보는 무한한 우주의 사랑이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이고 삶의 스승님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칼이 날아가고 온 집안이 부서지는 소리, 사이렌(구급차)의 반짝거림이 폭죽 같았다. 믿음이 있었기에, 살아왔던 대로 주문을 외우며 밝게 지내었다. 내가 잘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집 식구들과 남편의 잦은 싸움으로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며 4년 동안 두 아이를 출산했다. 시부모님 집에서 나와 또다시 작은 집을 구했을 때는 360도 돌아가는 CCTV가 설치되었다. 3분 거리 슈퍼만 다녀와도 바로 전화가 왔고, 그날 밤은 어김없이 악에 받쳐 울부짖게 되었다.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너무 예뻐하셨다. 젖을 물고 막 잠든 갓난이를 데리고 갈 정도로 육아 주도권을 가져가셨기 때문에 아기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떠나면 울어도 내가 곁에 없는 것에는 울지 않았다. 아이들마저 건드는 아이 아빠를 보고, 차라리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 있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생각에 다음 날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다.

 

나는 ‘연경하며’ 살기로 했다

 

그 뒤로 4년이 지나, 쉼터에 있는 동안 국선 변호사를 선임해서 이혼할 수 있었다. 위자료는 줄 수 없다고 해서 대신 3년 뒤부터 내가 양육비 80만 원을 보내주는 것으로 조정 이혼을 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그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무력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혼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 폭력을 수용하지 않고,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연경하며’ 살기


최근 남자친구가 생겨서 함께 지내게 된 지 1년이 되어 간다. 서로가 하는 일을 돕고 있다. 전처럼 무조건 밝게 지내진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 화를 내야 할 때는 이 화가 나의 과거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화가 내게 전이가 된 것인지, 나 자신을 먼저 인지해본다.

 

수많은 밤을 서로의 우주를 들여다보았다. 남자친구도 12년의 결혼 생활을 했고 거짓으로 끝이나 이혼을 했다. 서로가 같은 속도일 때 만나 관계에 대해서, 그동안의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로 또 같이 사는 법을 다시 배워가며 그동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포기했던 하고 싶은 것들을 느리게 도전하며 지내고 있다.

 

어떤 이는 내게 상당히 빠른 변화라고도 했다. 변화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아마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인 거 같다.

 

나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용기 낼 수 있었던 시작은 ‘마음대로, 점프!’라는 가정폭력 생존자들의 문화예술 프로젝트에서였다. 쉼터 생활이 답답하던 차에,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온 모집 글을 보고 공식적인 외출이 가능할 거 같아서 뭔지도 모르고 지원서를 작성했다. 그곳에서 만난 또 다른 생존자들과 몸짓, 말하기와 눈물과 웃음들로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겪은 일들이 나만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지면에 닿는 발바닥의 감촉,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있는 눈썹, 나의 호흡.. 안전한 공간에서 그동안 숨겼던 이야기들을 꺼내고 농담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었던 가지각색의 일들은 너무나도 공통점이 많아서 꼭 한 사람이 저지른 폭력인 것만 같았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는 말들에서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었을 때의 나로 돌아갔다. 엄마라는 사람은 우는 나를 장롱 속에 두고 나갔다고 한다. 나는 인제야 장롱 속에 있던 나를 내가 꺼내주었다. 나의 이름은 임연경이다. 더는 폭력을 수용하지 않고 과거와 반복된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연경하며’ 살기로 한다. (임작가) ildaro.com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541234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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