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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노점상인, 이제 내 인생의 주인!

<망원시장 여성상인 구술생애사 작가들의 이야기> 정숙희 작가


※망원시장 여성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가 담긴 책 <오늘은 맑음>(푸른북스, 2017)을 기록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마지막 연재의 필자 정숙희씨는 희곡작가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는 부모님과 함께 20년 세월이 쌓인 집에서 살고 있다. 장롱과 사용하지 않는 책상과 버리지 못하는 책장이 방마다 둘러싸여 있고, 부엌은 온갖 가전제품과 마트에서 대형포장으로 구입한 먹거리들이 구석구석 싸여 있다. 살림의 주체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어떤 기구가 어느 구석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TV홈쇼핑을 보며 080을 눌러 주문을 한다. 배달되어온 물건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꿈꾼다.


홈쇼핑에서 배달된 반제품 식재료나, 마트에서 구입한 간편식 중 하나를 골라 저녁을 때우는 맞벌이로서는 호박 한 개, 두부 한 모로 방금 차려놓은 구수한 밥상이 로망이자 미니멀리즘 라이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도, 중국에 친지 방문 갔을 때 인근 시장에서 한 끼분 반찬거리-물경 백 원어치!-를 사 와 해 먹던 기억이다. 시장은 그때그때 필요한 식재료만, 필요한 수량만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박한 감동을 준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감동을 경험한 곳이 망원시장이다.


▶ 망원시장 전경 (사진: 이경훈 작가)


망원시장 여성상인 유순자를 만나다


망원시장은 망원역 2번 출구에서 200여 미터를 걸어 들어간다. 스마트폰의 지도로 보기에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나 싶게 길게 느껴진다. 좀 부끄럽지만 시간을 쪼개어 사는 내게는 걷기에 부담스러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길이 심상치 않다. 초입부터 펼쳐지는 온갖 채소와 과일이 파장이 아닌 시간인데도 ‘떨이’의 향연이다. 가격면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 정도 품질이면 마트에서는 가격이 두 배는 될 터이니 주부로서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게다. 망원시장 안에 있는 구술자를 만나러 갈 때마다 웬만큼 자제하지 않으면 양손 가득 물건을 사들기가 일쑤다.


“뭘 또 이렇게 많이 샀어?”

“그러게나 말이에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니까요.”


천정이 씌워진 망원시장에 들어서면 번듯한 규모의 시장이 펼쳐진다. 통로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상점마다 물건이 넉넉하다. 포장하지 않은 날것으로 풍성하게 진열된 채소며 생선들이 반짝반짝 윤이 나 보이고, 시식해보라는 상인들의 호객소리조차 사람 사는 정을 느끼게 한다. 마트만 이용한 지 40년인 필자로서는 이게 바로 신세계가 아닌가 싶다. 신선한 것은 기본이고 안 파는 물건이 없으며 가격은 또 놀랍도록 인정이 넘치지 않는가. 얼핏 보아 노점(길가의 한데에 물건을 벌여 놓고 장사하는 곳)이라 생각되지 않는 가게에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모자와 양말을 팔고 있다.


▶ 망원시장 모자나라 유순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이거 이렇게 봬도 권리금 주고 들어왔는데(2001년), 천막 친 노점이다 보니까 불법이지 말하자면. 그러니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많았어. 여러 가지로. 늘 불안하기도 하고. 은제든지 고만둬라 하면 고만둬야하는 거니까. 이거(천장) 씌우고는(망원시장은 2008년 ‘전통시장 시설현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시장 환경을 개선하고 2015년에는 실외냉방장치를 설치했다) 진짜로 쫓겨날 뻔했는데 그때 피눈물 나는 역사를 썼지. 결국은 상인회랑 얘기가 잘 되어가지고… 구청에서 아예 도로점유세를 매긴 거지. 그래야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으니까. 구청에서 나와서 측정을 하더라고. 한 5년 동안 장사한 거를 최저로 계산해서 그때(2008년) 삼백만 원 돈인가 냈어. 최저로… 할부로 해줬어. 삼 개월로 나눠서 내고 그다음서부터는 구청에 일 년에 두 번 그렇게 내지. 이제 자리가 잡혔어. 얼마나 다행이야…”


1950년생 베이비붐 세대, 신도시 개발로 ‘밀려난’ 원주민


유순자는 한평생 여성 노동자로, 노점 상인으로 일했다. 베이비붐 세대가 한국현대사와 함께 노정을 걸어왔다면, 유순자는 그중에서도 중심에서 밀려난 약자 신분으로서의 노정이었다. 유순자는 전쟁이 막 끝난 1950년, 수도권 변두리 구 일산에서 태어났다. 지금 대곡역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동네다. 영화 <초록물고기>(이창동 감독, 1997년 작)에서 주인공 막동이의 고향집이 있던 곳이다. 어린 유순자는 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오빠와 올케들 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학교에 다녔다.


“전쟁 통이라 출생신고를 늦게 했겠지. 육 남매였어. 나는 끝에서 두 번째. 원래는 한 열 명인가 열한 명인가 낳았대는데 새에(중간중간) 죽고 육 남매가 남았대. 그때는 낳기도 많이 낳고, 죽기도 많이 죽고 그랬지. 고향은 일산이야. 곡산역이라고 거기서 내려서 (걸어) 들어갔어. 거기가 나 태어날 때는 다 벌판이었지. 논도 있고 밭도 있고 그랬지. 아버지, 큰오빠, 둘째 오빠 다 농사지었어. 벼농사, 밭농사. 힘들었지. 옛날엔 벼도 비어갖고 싣고 집에 갖고 와서 털고 그랬잖아. 타작도 손으로 한 거야. 발틀로. 신도시 되면서 진짜 있던 사람은 떠나고 타향사람들이 많이 들어갔지. 내가 초등학교를 거기서 다녔는데 신도시 되면서 떠났지. 나는 서울 올라오고 친정 식구들은 다 근처로 이동했지. 고향이 없어진 거야. 그 자리는 아파트 들어섰지. 그때 당시 보상금은 뭐 얼마 나왔나. 친정 오빠들이 받았지. 우리(딸들)한테 돌아온 거는 없지. 여자야 뭘 줘. 나는 내가 벌어서 시집갔지.”


1989년 일산 신도시 건설로 농사짓던 오빠들이 고향 집을 떠나야했다. 얼마간 받은 보상금마저 아들이 아닌 유순자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서 밀려나면서 받은 농지 보상가는 평당 8만9천원이었다. 그 자리에 지어질 신도시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평당 600만 원을 내야 했다. 터무니없는 갭이다. 원주민들은 절대로 재입주가 불가한 현실이었다. 자족도시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각종 공공시설과 기관을 배치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원주민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일산 신도시 개발 결과로 주변지역 화정, 능곡, 본일산은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그곳은 원주민들이 일산을 떠나 정착하게 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신도시 건설을 위해 고향집을 내놓고 옮겨 앉은 곳이, 신도시 때문에 더욱 쇠락하게 된 것이다. 개발에 반대해 원주민 4명이 목숨을 끊었던 가슴 아픈 역사도 있다. ‘원주민 몰아내는 비참한 개발’, 이 땅을 지키며 살아왔던 이들을 고려하지 않은 ‘뿌리 없는 개발’이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원주민을 내쫓고 허허벌판이던 일산은 1992년에 완공, 입주를 시작해 2017년 현재 인구 백만에 59층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도시가 되었다.


▶ 망원시장 모자나라 유순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1970년 이대앞 양장점 시다, “내가 돈 벌어 결혼했어”


“난 양재를 했어. 이대입구에서. 그거 해서 돈 좀 벌다가 시집갔지. 양재 배우려고 동네친구랑 같이 올라왔지. 그땐 서대문에 노라노양재학원이 유명했어. 거기서 기초적인 거 다 배워가지고... 기술은 뭐, 나는 시다만 했어. 그때는 맞춤(옷)이 많았잖아. 양장, 투피스 그런 거. 우리가 옷을 만들어주면 이대 가게(양장점)에서 받아서 팔지. 사실 미싱사보다 시다 분들이 일이 많지. 하루에 몇 벌인지는 모르겠고 맞춤이니까 언제까지 해준다, 약속한 게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바빴겠지? 아홉시 출근해서 야근도 했지. 늦게 끝나니까 방 읃어서 근처에서 자취했는데 친구랑. 아침에 아홉시까지 가면 저녁에 열 시까지 하고. 급한 거 있으면 밤도 샜는데 뭐. 내가 미싱만 안 했지 웃시다까지 올라갔나? 미싱사 월급이 그때는 괜찮았는데 나는 그냥 시집가지, 하고 안 했어. 70년쯤이었을 거야. 76년에 결혼했으니까. 시집갈 때까지 그렇게 했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농사일에서 도망치다시피 상경해 봉재 산업에 뛰어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한창 경제부흥을 외치며 기술과 수출, 생산성 등을 내세우던 때였다. 전쟁 후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던 전국의 청년들이 ‘입 하나 덜’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농촌을 떠나 서울의 산업현장으로 몰려들었고, 여성들은 소규모 공장이나 식당, 버스 안내양으로, 여의치 않으면 ‘식모’나 유흥가로도 흘러들어갔다.


어린 유순자는 작은 옷공장에서 봉재시다(보조)로 일했다. 청계천에서 재봉사를 하던 전태일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했으나 알지 못한 채, 야근과 밤샘일을 밥먹듯 해도 밀려오는 일감의 납기를 지키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라 믿었다. 방 하나 얻어 동료와 자취하며 고추장에 밥 비벼 먹는 게 어린 유순자가 해결할 수 있는 식사방법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벌어서 ‘시집을 갔다.’


1997년 IMF로 ‘밀려난’ 남편, 아파트 팔아 빚 갚고


“신혼살림이래 봤자 장롱하고 이부자리만 해가는 거지. 결혼하고는 일은 안 했지. 집에서 애들 키우고 살림하느라고 바깥출입을 어떻게 해. 결혼하고는 아무래도 신혼 때가 제일 좋았지. 우리 아저씨(남편)가 월급 따박따박 받아오고 퇴근도 일찍 하고 술도 조금만 하고. 나는 살림이 재밌었어. 그 옛날에 애들 빵도 만들어주고 돈가스도 튀겨주고, 돈을 뭐 넉넉하게 쓰거나 모으거나 그렇게는 못해도 애들 키우며 고만고만하게 살았지. 애들 학교 가고부터는 점심하고 저녁까지 도시락 두 개 씩 싸줬어. 그러다가 남편이 그만뒀어. 뭐 오십 살이면 정년퇴직할 때도 아닌데 그렇게 나오데?”


스물여섯에 친척의 소개로 얼떨결에 결혼했다.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녀는 행복했다 한다. 부부의 성 역할이 분명하게 각인되던 시절이었으므로 무리가 아니다. 수동적이던 개인의 삶은 1997년 국가 경제 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IMF로 남편이 전남방직에서 해직되었다.


유순자는 가족 생계를 위해 마흔다섯의 나이에 명동 길거리 포차로 나왔다. 떡볶이 소스를 만들며 삶의 목표가 분명해졌다. 나만의 가게를 갖는 것이었다. 다리가 퉁퉁 붓고 겨울에는 발이 꽁꽁 얼어도 목표를 위해 참아냈다. 그러는 사이 생활비와 아이들 학비로 카드빚과 신용대출 액수가 늘어갔다. 2002년 신용카드 대란 때였다. ‘현금서비스’와 ‘돌려막기’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부모님께 물려받은 아파트를 팔아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 망원시장 모자나라 유순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명동 떡볶이 포장마차에서 시작한 상인인생


“나도 떡볶이 배워서 가게 하나 해야겠다, 했지. 그때 월급도 셌어. 백오십 만 원 받았지. 더 있다가 한 이백 줘서… 세게 줬어. 얼마나 고생했게. 리어카를 놓고 했는데 거기는 포장도 못 쳐. 그냥 한 데야. 겨울에 그 추운데 옷은 뭐 제대로 입기나 했나, 발 시리고 다리는 막 얼고 말도 못 하고… 여기 와서도 힘들었지만 그때도 뭐 많이 힘들었지. 그렇게 고생을 했지 한 삼년.”


명동에서 삼년 떡볶이 기술을 배워 망원시장으로 왔다. 양옥집 앞에서 리어카 하나에 권리금을 주고 떡볶이 노점을 시작했다. 힘들었다. 전기와 물을 인근 가게에서 얻어 써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단속 때문에 도망 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시장 초입에 경쟁노점이 있어서인지 매상도 없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고 비가 오면 발이 다 젖었다. 갑순이처럼 ‘피눈물 나는 역사를 썼다.’(2016년 8월부터 방송된 SBS연속극 <우리 갑순이>의 유행어)


그렇게 또 삼년을 고생하고 지금의 모자나라 자리가 나서 들어앉았다. 비록 노점이지만 최소한 비를 피할 수 있고 전기를 쓸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떡볶이 가게를 하려고 했지만 이 가게 역시 물을 쓸 수가 없었고 시설도 추가할 수 없었다. 친한 이웃 가게 동생의 도움으로 모자와 양말로 업종을 바꾸었다.


“지금은 나이도 먹고 하니까 이걸로 만족하고 사는 거지. 모자, 양말 판매가 일하기엔 깨끗해. 이거 바꾼 거 잘했지 뭐. 지금 아픈 건 없잖아. 그거(떡볶이 장사) 했으면 손이 마디마디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그렇다더라고. 이거는 내 가게야. 이것두 처음에는 힘들었지. 어떤 게 잘 팔리는지 알 게 뭐야. 그러니 업종변경이 어려운 거야. 그래가지고 한 달 정도 하니까 좀 나아지더라고. 처음에는 기본만 깔고 하다가 물건 나가는 거 봐서 조금씩 늘렸지.”


노점으로 시작한 ‘나의 가게’ 모자나라


2008년, 망원시장은 ‘전통시장 시설현대화사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환경 개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모자나라 외 일곱 개의 노점은 불법노점이라는 이유로 쫓겨날 위기에 놓였다. 유순자는 이십 년 동안 포차를 전전하며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싸워왔는데, 어렵게 잡은 노점마저도 정식 가게로 인정받기는커녕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현실에 새삼 절망했다.


그러나 유순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협상에 매달렸고 결국 노점 허가를 받아냈다. 5년 치의 도로점유세를 나라에 납부함으로써 10년 무허가 노점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유순자가 이즈음 얻은 혜안은 ‘능력이 된다 해도 정식 점포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도한 임차료에 대한 현실감각에 따른 스스로의 선택이다.


“요즘에는 평소에도 명절같이 사람이 많아. 여기 시장이 많이 좋아졌다니까. 명절같이 매상이 많이 오르면 그때는 이거 하기 잘했구나, 보람을 느끼지. 또 단골손님이 와서 인정해줄 때, 그럴 때 보람을 느끼지. 물건이 괜찮구나, 할 때. 내가 진짜 오래 한 보람이 있구나, 그러지. 처음엔 먹는장사 부러웠는데 이젠 괜찮아. 좋아.”


▶ 망원시장 모자나라 유순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긍정의 힘


유순자는 요즘 행복하다. ‘옆 생선가게에서 꽃게 할인행사를 하길래 사서 맡겨두었다’며 가족에게 저녁 반찬 만들어 줄 생각에 즐겁다. 요즘은 마흔 넘은 약사 딸이 결혼하지 않은 것을 빼면 모든 것이 좋다고 한다. 유순자는 시어머니가 구십이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부양했고, 몸이 불편한 남편의 식사와 건강을 챙기며, 가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제적 책임까지 다한다.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비혼이면서 함께 사는 중년 딸의 옷을 다림질해준다. 부양의 연속이자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낀 세대’이다. 베이비부머의 삶이 그렇듯이 중심에서 벗어난 노정을 걸어온 유순자의 삶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유순자는 행복하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돕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한다고 했다. 역사의 흐름에 떼밀리고, 국가의 폭력에 휘둘리며 살아왔으면서도 그러한 순간들을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생각한다. 현재도 큰 욕심 내지 않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역할에 충실하며, 상인들과도 화합하고 연대한다. 지금까지 평생 가족 생계를 위해 노점에서 일했지만 ‘호랑이 띠값을 하는 것 같다’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는 것’에 자긍심을 가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남자든 여자든, 남편이든 아내든 누구든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하면 된다고. 능력 있는 사람이 일하는 거지. 안 그래?”


이러한 긍정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심리적 방어였다고 보기에는 유순자는 참 해맑다. 내면에 어쩔 수 없었던 매 순간을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현명함이 내재된 듯하다. 한마디로 유순자는 현명하다. 이제 와서 유순자의 삶이 불이익했고 계급의 불평등이었다고 우긴들 무슨 소용일까. 행복했다 생각하는 긍정의 힘 앞에 계급적 논리가 무슨 소용일까.


은퇴하면 커피 한잔에 음악 들으며 책을 읽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유순자. 지금까지는 몸을 무기로 하루하루 버텨왔지만 더 나이 들어 그나마 노점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앞선다. 노점상인은 공적연금의 사각지대 계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한 구성원이면서도 중심에서 소외된 채 스스로 가족을 보호해온 유순자. 이제 국가가 보호해줄 차례다.


젊은 부부가 애기를 안고 온다.


유순자: (애기 안은 아빠에게) 어~ 이쪽은 애기엄마야? 

애기 안은 남편: 네. (웃음) 

유순자: (애기 들여다 보며) 얘는 둘째? 

애기 안은 남편:네 . 어떻게 아세요? 

유순자: 아니 접때 애 아빠가 수면양말 사러 왔었잖아. 누가 여름에 수면양말을 찾어. 내가 딱 알았지. 애기 낳았구나, 그러고.

애기 안은 남편: 아 맞다. 그랬죠. (웃음) 이쁘죠? 

유순자: 에유 똑 닮았네. (웃음) 아들이야?

애기 안은 남편: 네. (웃음) 

유순자: (애기한테) 야! (웃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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