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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공부’는 꼭 필요하다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⑩ 정인진


※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10회에 걸쳐 보도하였습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되었습니다. -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숨을 못 쉬게 되면 인공호흡기를 꽂아드릴까요?’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토혈을 하고 119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간 것은 지난 2월의 일이다. 이 사건은 90세는 물론, 100세도 너끈히 사시겠다고 믿었던 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뭐든 너무 잘 드셔서 80이 넘은 고령이라는 사실을 잊고 아무 음식이나 드시게 했던 우리의 책임이 컸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조직검사를 통해 위암 판정을 받았다.

 

갑자기 아버지 일로 의논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산처럼 밀려왔다. 수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향후 아버지의 간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문제 앞에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놓였다. 그동안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오고 나서야 나는 그중 한 가지 질문을 아버지께 드렸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버지, 만약에 아버지가 너무 위독해져서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인공호흡기나 영양튜브 같은 것을 꽂아드릴까요?”

 

그러자 아버지는 분명하게 “싫다!” 하셨다. 당신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만 사시겠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이후에 바로 암 진단을 받았다.

 

▶ 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가셨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정인진

 

암 수술도, 추가 정밀검사도 거부하다

 

아버지가 위암 진단을 받고 나서도 가족들이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다섯 자녀들은 과연 수술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암세포가 다른 부위로 전이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너무나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아버지를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내놓는 의견이었지만, 그 방식이 다들 달랐다.

 

이러다간 제대로 뜻을 모으지 못한 채 배가 산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형제자매들이 각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중단시키고, 원칙 하나만 정하자고 제안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자는 게 그것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아버지의 인생이고, 조금 넓게는 아버지와 반백년 넘게 동고동락해온 어머니, 두 분의 인생이니 두 분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날 밤이었나 보다. 자녀들의 입장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아버지께 당신의 현재 상태를 설명해드렸다. 그리고 두 분은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리셨다. 그날 밤 두 분이 나눈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저 아버지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정성껏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와 이별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술도, 더 이상의 추가 정밀검사도 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병원 측에 전했다. 그러자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며 아버지를 퇴원시키라고 했다. 수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장에 있는 출혈조차 잡아주지 않고 퇴원을 종용했다. 그러면서 “수술을 하지 않으면 다시 토혈을 할 수 있고, 그걸로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어요!” 라는 말을 덧붙였다. 현대 의학이 위장의 염증으로 인해 발생한 출혈을 수술 말고는 멈추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로선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으로 이전 신청하다

 

그렇게 위암 수술을 선택하지 않은 아버지는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하고 퇴원하셨다. 그러나 그날부터는 통증으로 괴로워하셨다. 퇴원한지 삼사 일이 지날 무렵,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옆에서 아버지가 통증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렇게 견디게 할 일이 아니었다. 이빨을 딱딱 부딪쳐가며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당장 조치를 취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내과에서 진통제를 처방받았다. 당장 고통을 잠재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더는 해줄 것이 없다는 내과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로 아버지를 이전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호스피스’는 임종기 환자가 좀 더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료시스템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말기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만성 간경화 말기에 해당하는 환자들이 호스피스 의료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치료가 아닌 고통을 감소시켜줄 목적의 처치인 ‘완화의료’가 결합되어, ‘호스피스 완화의료’라는 독립된 병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질환을 가진 환자들 중 더이상 공격적인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면, 병원에서 발급하는 진단서를 가지고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원이나 병동으로 이전 신청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사시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돌아가시도록’ 뛰어다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의료화된 현대 사회에서 ‘잘 죽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걸 깨닫는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고통이나 삶의 질에는 관심이 없고 돈이 되는 치료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다 의구심이 들었다. 수술도, 추가 정밀검사도 받지 않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 환자는 상품가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 아버지가 이용하는 호스피스병동 풍경 ⓒ정인진

 

아버지의 대리인이 되다

 

마침, 아버지가 위암을 진단받은 병원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가 잘 되어 있기로 유명한 병원이었다. 드디어 호스피스 완화의료 담당 의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수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고통을 덜 느끼면서 편안하게 죽음까지 이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의사는 우선 집으로 방문해 환자와 면담을 할 것이며, 그 뒤에는 환자의 상황에 따라 의료진이 집으로 정기적인 왕진을 갈 거라고 말했다. 의료진이 집으로 방문할 거라는 소식에 엄마도, 나도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마치 구원자가 나타난 기분이었다고 하셨다.

 

호스피스병동의 담당의사와 면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날 바로 의료진들이 아버지의 상태를 점검하러 집으로 왔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전해들은 바로는 먼저 수술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환자의 자발적인 선택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담당의사와 환자의 단독 면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의사 앞에서 더욱 단호하게 수술에 대해 거부 의사를 표했다. 의사가 “할아버지, 수술하면 더 사실 수 있는데, 왜 안 하신다고 했어요?” 하고 물으니, 아버지는 “살만큼 살았습니다” 하셨단다.

 

아버지는 집에서 임종 시까지 있고 싶다는 의견도 밝히셨다. 그리고 나중에 의식이 혼미해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될 때 당신을 대신할 대리인으로 누굴 삼겠느냐는 질문에,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둘째딸’인 나를 지목하셨다. 나는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대리인이 되었다. 나중에 왜 나를 대리인으로 호명했냐고 여쭈었더니 아버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가장 잘 하잖아!”

 

사실 아버지가 나를 대리인으로 삼은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내가 한 노력이 아버지의 바람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는 조금 안도했다. 혹여,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죽음 워크숍에서 배운 것들

 

그러나 호스피스병동 측의 방문을 받은 다음날, 위의 출혈을 잡지 못한 상태로 있던 아버지는 다시 토혈을 하고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 당시는 늦은 밤이었는데, 호스피스병동에서 담당의사가 달려와 아버지를 직접 살펴주셨다. 그리고 ‘제발 이번 한번만 살려 달라’ 매달리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즉시 입원실로 옮겨 치료에 들어갔다. 이후 호스피스병동에서는 아버지를 꼬박 40일을 입원시켜 위의 출혈을 잡았다. 암수술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내과의사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해 있는 중에도 아버지는 매일매일 바꿔가며 오는 자원봉사자들과 꽃 심기, 공작, 음악 감상 등 다양한 활동을 하셨다. 상주해 있는 간병인들의 친절한 보살핌은 아버지를 편안하게 해주었지만, 무엇보다 옆에서 간병하는 가족들의 수고를 많이 덜어 주었다. 환자의 가족들도 휴식이 필요하다며, 좀 쉬었다 오라고 어머니를 먼저 채근한 사람은 병원 측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호스피스 완화의료와 인연을 맺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진들과 연결이 된 이후에는 모든 상황이 편안해졌다.

 

처음에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지만,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지도 모를 큰 사건 앞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지난겨울에 열린 ‘죽음워크숍’에 참가한 덕분이다.

 

’죽음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무엇보다 가슴 깊이 새긴 것은 ‘우리는 모두 죽을 존재’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마치 죽지 않을 존재인 것처럼 삶에 매달리고 있다. 더욱이 이런 심리와 의료시스템이 잘 만나서, 오늘날 사람들은 정말 잘 죽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사전 의료의향서’를 꼭 작성해 두어서, 의식이 없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을 미리 해놓아야 한다는 것도 이 워크숍을 통해 알았다. 무엇보다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있다는 것과,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은 정말 좋았다. 아버지 일과 관련해, 재빨리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생각해낼 수 있었으니까.

 

▶ 지난 봄 호스피스병동에서 ‘가족 봄나들이’ 갔을 때 부모님 모습 ⓒ정인진

 

간병을 전담하지 않고 분담하기

 

아버지가 호스피스병동에 40일 입원해 있는 동안, 주변 침상에서는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내가 목격한 바로는 호스피스병동에서 뵌 분들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하나같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계셨다. 그것은 ‘죽음워크숍’에서 이론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호스피스병동에서 목격한 것이다. 그분들의 모습이 어찌나 평안한지, 아버지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임종을 맞는 것을 당신의 상황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집보다 여기가 좋다!”고 얘기하실 정도였다.

 

호스피스병동에서 살아서 퇴원한 사람은 한명도 보지 못한 가운데, 아버지는 많이 회복되어 주변의 축하를 받으며 퇴원을 하셨다. 기적이라고, 축복이라고 하나같이 축하해주셨다. 퇴원한 뒤에는 일주일에 한 번 간호사와 의사가 번갈아가며 집으로 방문했다. 가을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방문해 아버지의 상태를 점검해주시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 위장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죽과 다진 반찬들로 식사를 준비해주신다. 어찌나 아버지를 잘 돌보셨던지, 예전에 비해 살은 좀 빠졌지만 현재 진통제 없이 생활할 만큼 아버지 위장의 염증은 진정되었다.

 

아버지의 간병과 관련해서는 어머니가 책임지고 계시며, 다섯 자녀들이 시간이 되는 대로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부모님은 현재 남동생 집에서 살고 있지만, 남동생 내외는 맞벌이를 해서 아버지 곁에 매달려 있을 처지가 아니다. 또 네 명의 여자형제들은 비혼, 이혼, 기혼 등 다양한 상황에 있지만 누구 한 명이 일방적으로 간병을 떠맡지는 않는다. 다들 직장이 있고 할일이 있는 이유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드나들면서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다. 물론, 어머니 역시 연로하신 상태라 간병인의 도움을 추가로 받고 있다. 어머니가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다섯 형제들은 시간을 분배해 아버지를 간호한다. 다행히 아직까지 마찰 없이 의논이 잘 되고 있다.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평안하게

 

만약 호스피스병동에 문의하지 않고 수술을 했더라면, 또 그 후 항암치료를 받았더라면,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죽으려고, 잘 죽으려고 한 선택이 살 길을 밝혀준 것이다.

 

평소 죽음과 관련한 성찰의 기회를 외면하지 않은 것도 중요했다. 내가 죽음워크숍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존재를 모르는 건 물론이고,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사람과 어떻게 동반해야 할지 몰라 실수를 엄청 많이 하고 후회도 많이 했을 것이다. 물론, 처음으로 경험하는 가까운 사람의 임종을 앞두고 나는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그래도 죽음워크숍에서 배운 원칙과 자세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버지를 대하고 있다.

 

실제 이런 일을 겪고 보니, 누구라도 시간을 내어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권하게 된다. 그 방법은 독서일 수도 있고, 나처럼 워크숍에 참여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간단하게는 하루 이벤트라고 하더라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상태와는 분명히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현재 근육도 많이 빠지고, 움직임도 둔해지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실 때도 생겼다. 위암 때문이라기보다 노쇠로 인한 다양한 증상들이 늘고 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옴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더 살게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속에서 아버지가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그날이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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