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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에서 만나] 벤 르윈 감독의 영화 <스탠바이, 웬디>

 

‘모든 준비가 완벽히 끝났다.’는 뜻의 스탠바이. 우선 독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하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를 스탠바이 되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하려하는 일에 앞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고 생각하나요?

 

▲ 벤 르윈 감독 영화 <스탠바이, 웬디> 2017


오늘 다룰 영화는 벤 르윈 감독의 2017년 작 <스탠바이, 웬디>다. 주인공 웬디는 글을 쓰는 작가이고, 스타트랙(미국 SF 콘텐츠로, 1966년 원작 드라마가 제작된 이후 수많은 후속작과 영화, 게임, 소설 등이 만들어졌다. 전세계의 팬을 보유 중인 작품)의 광팬이다. 정신질환자를 위한 시설에 살고 있으며, 항상 자로 잰 듯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 밥 먹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글을 쓴다.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을 때면 ‘스탠바이’를 되뇌며 자신을 다스리려고 노력한다.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 웬디에게 목표가 생긴다. 바로 스타트랙 팬 소설 공모전이다. 우편을 보내야 하는 날짜를 불가피하게 놓친 웬디는 직접 LA에 있는 파라마운트 픽쳐스로 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웬디의 여정은 모험이다. 항상 돌아가던 쳇바퀴에서 뛰어내리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과정이 녹록지 않다. 목적지로 가는 매 단계마다 방해물들이 있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장애가 그 어려움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모험 영화는 과정마다 관객에게 긴장감을 준다. 하지만 <스탠바이, 웬디>는 웬디의 장애를 이용하여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 다른 모험서사가 그러하듯 질 나쁜 사람들과, 운 나쁜 사고가 존재할 뿐이다.

 

웬디와 아이레벨

 

카메라 앵글의 종류에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하이 앵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앙각(로우 앵글), 인물의 눈높이에 맞춘 아이레벨 등이 있다. 각 앵글은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쓰인다. 부감은 흔히 인물을 작고 귀여워 보이게, 혹은 외로워 보이게 할 수 있고, 앙각은 인물의 권위를 드러낼 때 쓰이곤 한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많고, 이 효과를 역설적으로 이용하는 쇼트도 많다. 예를 들어,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는 쇼트에서 아이레벨로 서로를 보여주다가 한 쪽을 부감으로 보여주면, 대화 내용에 따라 그 인물이 긴장했음을, 혹은 위협하고 있음을 표현할 수도 있다.

 

▲ 벤 르윈 감독 영화 <스탠바이, 웬디> 포스터, 2017


웬디는 사람과 눈을 잘 맞추지 못한다. 웬디의 시선은 항상 조금 아래를 향한다. 카메라는 그런 웬디를 꿋꿋이 아이레벨로 촬영한다. 하이 앵글로 웬디를 잡았다면 웬디가 사람과 눈맞춤에 있어 겪는 어려움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로우 앵글로 웬디를 찍었다면 웬디와 눈맞춤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눈맞춤을 어려워하는 웬디를 무시한 채, 웬디의 눈을 보고자하는 카메라의 욕망일 뿐이다. ‘웬디의 아이레벨’은 엄밀히 말하면 로우 샷일 수 있지만. 카메라는 웬디가 불편하지 않은 위치인 아이레벨에 위치한다. 앵글은 태도를 담는다.

 

미디어에서 장애를, 빈곤을, 소수자를 그릴 때, 어떻게 표현해왔는가. 하이앵글로 그들의 이상함을, 평범하지 않음을, 비정상적임을 부각하고 드러내며, ‘정상’인 당신과 동떨어져 있음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들의 처지를 연민하고 동정하게 하며, 그들과 다른 처지에 있는 시청자에게 이상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여기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서사도 무시되고 그저 불쌍한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로우 앵글로 과하게 눈 맞추는 경우도 있다. ‘환우’라는 표현이 일례다. 근심 환(患)에 사람 자(者)를 쓰는 ‘환자’라는 표현을 두고 근심 환(患)에 굳이 벗 우(友)를 붙여 ‘친근한’ 단어를 만들었다. 실제로 환자들에게 지나치게 거리를 두는 사회에서 이 표현이 한 폭의 거리를 줄여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건 다가가는 사람 쪽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누가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는가? 무릎을 쪼그려 앉아서 올려다보는 불필요한 친절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스탠바이, 웬디>는 최대한 고정 샷으로, 현란한 무빙 없이, 아이레벨 쇼트로 촬영되었다. 장애를 우스꽝스럽거나 과한 선, 혹은 절절한 슬픔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저 웬디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서 방해물들을 만나고 그 때마다 자신의 방법을 쓰는 사람이다.

 

앵글이 웬디를 동등하게 바라본다고 해서 웬디가 겪고 있는 혼란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사운드 디자인으로서 혼돈을 드러낸다. 시장에서 들리는 오토바이와 사람들의 소리라든지 사무실에서 들리는 타자기 소리를 크게 부각한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웬디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는다. 귀를 막고 중얼거리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다스리면서 목적지로 나아간다.

 

결과야 어떻든 웬디는 끝까지 간다. 이는 <내일을 위한 시간>(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2015년) 속 우울증을 갖고 있는 산드라의 여정과도 비슷하다. 산드라는 해고 위기에 놓이지만, 주말 내내 자신의 노동권을 위하여 끝까지 노력한다. 두 영화 속 주인공을 나란히 보고 있노라면 정신질환은 결코 나약함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그리고 삶이라는 투쟁 속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단 결과의 성패에만 달려 있지 않다. 투쟁하는 매순간 우리는 얻게 될 것이다. 노동력을 착취해 만든 천만관객 영화가 스태프들과 최대한 소통하며 만든 작은 영화보다 더 나은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 벤 르윈 감독의 2017년 작 <스탠바이, 웬디> 중에서


웬디의 능력과 증명

 

웬디의 능력은 글쓰기에 국한되어있지 않다. 열정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랙에 관한 기억력은 아마 스타트랙 작가와 맞먹을 것이다. 반려견인 피트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책임감 또한 굉장하다. 그런 웬디가 가족인 언니 부부가 있는 집에 갈 수 없는 이유는 아기인 조카 때문이다. 웬디의 언니는 웬디를 불안해한다. 여정을 마친 웬디가 언니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씬이 있다. 웬디가 말한다.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2016년 대검찰청의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은 0.1%다. 비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은 1.4%다. 하지만 몇몇 언론은 정신질환자 범죄 사건이 일어날 경우 마치 그 병이 원인인 것처럼 대서특필하여 정신질환에 관한 왜곡된 정보와 혐오를 조장한다. 영화 속에서 웬디는 지갑과 아이폰을 절도 당하는 피해자가 되지,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다. 피해자가 되는 일을 겪으면서까지 웬디가 자신의 능력과 책임감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이 영화 속 일만은 아니다.

 

사회는 소수자들에게 증명을 요구한다. 여자에게 ‘남자만큼’ 할 수 있음을, 성소수자에게 ‘평범함’을, 흑인에게 ‘무해함’을 증명하길 바란다. 그들이 말하는 디폴트, 정상성에 들기 위해 소수자들은 쓸데없는 노력을 퍼부어야 한다. 왜 항상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쪽은 오해를 만들어내는 쪽이 아니라 오해를 받는 쪽이어야 할까. ‘정상’을 외치는 그들은 과연 자신들의 편견이 불쑥 솟아오를 때마다 ‘스탠바이’를 외치고 있을까?

 

병과 글쓰기

 

나는 불안장애를 갖고 있다. 2010년부터 공황장애가 가끔 있었지만 심리학과를 다니면서도 내가 공황장애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서 가끔 머리가 하얘지고 얼굴이 빨개지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그럴 뿐이라고 여겼다. 2017년 우울증이라고 느껴 처음으로 병원에 갔고, 불안과 우울이 다 심각한 수준으로 나왔다. 꾸준한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으나, 한 번 가고 말았다. 나약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내 힘으로 이겨 보겠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 시간이 흐르고 어쩌다보니 우연히 병이 나았던 것도 같다. 그리고 2020년 중반, 사라진 것 같았던 공황장애가 다시 돌아왔다. 병원에 갔지만 역시 두 번 내원을 하고 그만두었다. 약 몇 알 먹으니까 좋아진 듯 싶어 귀찮은 마음에 가지 않았다.

 

2020년 말, 새로운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불안장애가 극에 달했다. 불안 때문에 벌벌 떠느라 일은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자책으로 이어졌다. 시나리오가 꼬리의 꼬리를 물어야하는데 불안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심지어 글을 읽기가 어려웠다. 글자들이 얼음판인 것처럼 눈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니 ‘불안장애가 있는 내가 글을 쓸 수나 있을까?’에 도달했고 또 연관된 새로운 불안이 생겼다. 불안장애를 가진 작가가 있을 거야, 나를 달래가면서 ‘불안장애, 작가’를 검색해보았다. 불안하고 정신이 없다 보니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 내가 <스탠바이, 웬디>를 다시 한 번 봤더라면 더 좋았을까?

 

▲ 벤 르윈 감독 영화 <스탠바이, 웬디> 2017


지난 6월부터 마음을 다잡고 미루고 미루던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문득, 2018년 만났던 <스탠바이, 웬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스탠바이, 웬디>의 원제는 “Please Stand By”다. 자신의 병을 다스리고자 하는 웬디의 바람과 노력, 갈망이 그대로 담겨 있다. 번역된 제목은 다른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스탠바이 해, 웬디야’라고 스스로 말하는 원제의 느낌과 비슷하게 들렸지만, 여러 번 보고 나니 새로운 해석이 보인다. ‘스탠바이가 된 웬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슛만 들어가면 되는 상태의 웬디로 다가온다.

 

나는 나 자신을 ‘스탠바이’되지 않은 상태로 생각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그 생각은 또 불안과 자책을 불렀다. 하지만 ‘스탠바이’ 상태라는 것은 뭘까.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려고 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지병이 없으며, ‘건강’한 상태를 뜻하는 걸까? 맞다, ‘스탠바이’를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연결지었던 것 같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지음, 동녘) 책을 읽으며 건강한 상태를 정상으로 상정하고,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비정상으로 규정짓는 건강중심주의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실 진짜 건강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온몸에 혈액이 깨끗하고, 장기는 탱탱하고, 정신은 맑고, ‘정상적인’, 스탠바이 된 사람이 있기나 할까. 글 서두에서 던진 질문에 독자들은 몇 분이나 자신감 있게 끄덕였을까.

 

정상은 없다. 그러니까 비정상도 없다. 완벽한 스탠바이는 허상이고 웬디도 나도 이미 스탠바이 상태다. 그니까 이렇게 쓰고 있지. 사회를 둘러싼 수많은 비정상이라는 카테고리는 아직 우리 사회가 스탠바이 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뿐이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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