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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서평 에세이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성인 여성의 절반 이상이 경험한다는 데이트폭력데이트 초기부터 헤어짐, 이별 후 과정까지 피해자의 눈으로 낱낱이 재해석하며, 데이트폭력이 일어나는 과정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며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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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결혼했다. 동기들에게는 J의 이른 결혼도, 결혼 상대도 모두 뜻밖이었다. 남자는 꽤 연상이었고,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인물이라서 친구들 모두 그를 어려워했다. J는 예비 남편의 뜻에 따라 그의 고향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이후 J의 출산과 육아가 수순처럼 이루어졌기에 한동안 그 애를 보지 못했다.

 

어느 날, J가 뜻밖의 전화를 걸어왔다. 내 집에서 잠깐 지내면 안 되겠냐고 묻는 그 애의 불안정한 목소리를 듣고, 신변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했다. J가 고백한 가정폭력의 진상은 충격적이었다. J의 남편은 아내가 집을 탈출하자 내게 득달같이 전화해서 질문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로 나를 압박했다. 짐짓 처음 듣는 소식인 양 연기했지만 구타와 강제 성관계, 심지어 칼을 들이대고 아내를 위협하는 그 남자가 무서웠다.

 

대책을 궁리하기 위해 집에 돌아왔을 때 J는 사라지고 없었다. 휴대폰을 쓰던 때도 아니어서, 그 애가 연락해오지 않는다면 찾을 길이 없었다. 남편이 끌고 간 건 아닌지, 설마 죽인 건 아닌지 애를 태운 이튿날, J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사하다고, 고마웠다고, 지금은 쉼터에 있다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것이 J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의 일이 선명히 되살아난 것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죽은 여자들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레이철 루이즈 스나이더가 쓴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은 결국 살리지 못한 여자들에 대한 깊은 회환과 책임감 그리고 더이상은 죽게 두어선 안 된다는 조바심을 가지게 한다. 연락이 끊긴 J는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눈물이 났다.

 

▲ 레이철 루이즈 스나이더 저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황성원 역, 시공사

 

“집은 여자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 매년 5만여 명이 죽는다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에서 만나게 되는 피해자의 이야기는 생생하지만 낯설다. 내가 J 말고는 남편에게 맞는 여성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맞는 여자를 서로 알지 못한다. 책의 원제가 “No visible bruises”(보이지 않는 상처들)인 것도, 아내에 대한 폭력이 가시화될 수 없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학대의 상처가 눈에 보이는 육체의 피해를 초월하고 있음을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불완전하게나마 밝히고 있는 남편에게 학대당하다 죽은 여자들의 숫자는 충격적으로 많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에서 가정 내 살인 사건으로 사망한 피해자는 1만600명이나 된다. “집은 여자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다.” 2017년 UN의 한 연구 보고서는 한 해 전 세계 약 5만 명의 여자가 반려자 또는 가족에 의해 살해당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친밀한 폭력’으로 죽어나가는데도 여성이 겪는 피해,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페미사이드(여성살해)는 사회가 직면해 시급한 대책을 내놔야 하는 중차대한 의제가 되지 못한다.

 

아내 살해범은 때로 아내만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 모두를 몰살시킴으로써 가족의 생살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가족 살해 후 불특정 혹은 특정 대중을 대상으로 살인 사건을 벌이기도 한다. 1분에 20명의 폭력 피해자를 발생시키고 1년에 1,200명의 여성을 살해하는 강력범죄가 각 가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을 위협하는 가정폭력 범죄는 코피 아난 전 UN 사무총장의 말처럼 “전염병 수준의 전 세계적인 건강 문제”이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맞는 아내는 물론. 맞는 엄마나 가족을 바라봐야 하는 이들 역시 폭력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 상처는 오랫동안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파괴시켜 사회적 대가를 치르게 한다. 가정폭력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중 보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다.

 

▲ “집은 여자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다.” UN 사무총장이었던 코니 아난은 가정폭력에 대해 “전염병 수준의 전 세계적인 공중 보건 문제”라고 말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위기의 여성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책의 1장에서 피해자가 왜 죽어야 했는지를 사후 부검한 저자는, 2장에서는 아내를 죽여도 된다고 여기며 “사랑해서 때린다”고 폭력을 낭만화하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들이 아내나 가족을 죽이면서까지 믿고 따른 규범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를 규명하고 해석하기 위해 저자는 아내 살해범들을 만나 인터뷰한다.

 

솔직히, 이들의 기만을 끝까지 읽을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렵다. 자신이 벌인 범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이 남자들을 교육하고 교화한다고 달라질 것인지 회의가 든다. 그럼에도 폭력이 문제 해결의 방식이라고 믿는 남성들의 사고방식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젠더 규범으로 학습된 집단반응임을 깨닫게 한다는 점, 가해자나 학대자에 대한 개입 프로그램이 늘어나야 아내폭력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 저자의 견해는 의미가 있다.

 

3장은 어떻게 여성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내 살릴 것인가를 끈질기게 고민하고, 그 연구 결과를 정부와 관료들에게 알리고 설득해 나가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활약상을 다룬다. 광산의 카나리아와 같은 이들이다.

 

특히 재클린 캠벨의 노력과 성과는 인상적인데, 그는 가정폭력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 대응방법을 바꾸기 위해 ‘위험평가’를 가정폭력 현장에 도입해 숱한 목숨을 지켜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가정폭력 피해자의 위험도를 평가하기 위해 3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가 무기로 위협한 적이 있나, 그가 당신이나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나, 그가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지역 가정폭력 긴급전화에 연결해 즉각 보호 조치에 나선다. “타이밍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캠벨의 위험도 평가 모델은 미국 30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사용되고 있다.

 

책을 덮고 한국 사회의 가정폭력과 친밀한 폭력의 현실로 돌아오니 마음이 무겁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20년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남편이나 애인 등) 내 여성살해’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최소 97명이 살해되었고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31명이라고 한다. 여성의 범죄 피해에 대한 젠더 데이터의 공백과 가정폭력 등 친밀한 폭력의 상당 부분이 암수 범죄인 것을 고려하면, 이것도 과소한 수치일 것이다. 게다 코로나로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까지 생각하면, 위기에 처한 여성들의 생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이들을 구할 것인가.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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