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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에서 만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아이들의 시간>
‘맨’이 모든 사람을 포함하듯, 모든 퀴어는 ‘게이’라고 불릴 때가 있었고, 이는 영화에도 반영되었다. 초기의 퀴어영화 대부분이 남성 간의 사랑을 그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무려 1961년에, 무려 오드리 햅번과 셜리 맥클레인이 나오는 여성 퀴어영화가 있었다. 캐스팅부터 가슴이 뛰는 이 영화, 바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아이들의 시간>(1961)이다.
▲ 영화 <아이들의 시간>(윌리엄 와일러 감독, 1961) 스틸컷. 카렌 역의 오드리 햅번과 마사 역의 셜리 맥클레인. |
괴랄한 샷이 보여주는 ‘중립’, 공포스러운 불균형
영화의 배경은 가장 진보적이어야 하지만 역으로 항상 보수적인 곳, ‘학교’다. 카렌 역의 오드리 햅번과, 마사 역의 셜리 맥클레인은 기숙사 학교의 교사로, 학교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하는 꿈을 이뤄 가고 있다.
카렌은 학교가 안정이 되는 대로 남자 애인 카딘과 결혼할 예정이다. 마사는 카렌의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또 카딘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짜증이 난다. 하루는 카렌의 결혼 이야기에 마사가 학교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며 버럭 화를 내는데, 학교의 악동 매리가 이를 엿보게 된다. 매일 거짓말을 해 꾸지람을 듣던 매리는 새로운 거짓말을 꾸민다. 매리는 카렌과 마사가 ‘자연스럽지 않은(unnatural)’ 관계라며, 밤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거짓말을 보태 할머니에게 전한다.
마사의 방에서 카렌과 마사가 실랑이를 할 때 매리가 벽 뒤에서 엿듣는 샷이 있다. 이 샷은 좌측 원경에 마사 방과 방에서 나오는 카렌이 보이고, 우측 전경에 매리가 위치해있다. 엿듣는 자와 대상 간의 거리는 가깝지 않다. 매리가 숨어 있는 벽으로 인해 이 샷은 카렌, 마사와 매리를 완전히 분리시킨다. 마치 다른 두 샷을 편집으로 붙여놓은 듯한 효과를 준다.
일반적인 샷이라면 카렌과 마사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매리를 포커스 아웃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매리에게 포커스를 주고 카렌과 마사를 포커스 아웃시켰을 것이다. 이 영화는 아주 심도 높은 렌즈를 사용하여 인물들 모두에게 초점을 맞춰 원근감을 혼동시킨다. 무엇이 멀리 있고 무엇이 가까이 있는지 모르게 착시현상을 줘 괴랄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성소수자라고 소문이 나 힘들게 일군 학교의 학생을 모두 떠나보내게 될 두 교사와,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릴 인물에게 초점이 고루 간다는 것은 이 샷에서 보이듯 실로 괴랄하다.
▲ 영화 <아이들의 시간>(윌리엄 와일러 감독, 1961) 스틸컷. |
‘중립 기어를 박는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 쪽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중립에 서있겠다는 의미다. 기울어진 언덕에서 기어를 중립에 놓으면 차는 어느 쪽으로 갈까? 언덕 밑으로 추락할 것이다. 렌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물들이 나란히 놓여있을 때는 모두에게 초점이 가도 균형 잡힌 샷이 된다. 평지에서 기어를 중립에 놓았을 때 차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 쪽이 과하게 앞에 있을 때, 멀리 있는 쪽과 가까운 쪽 모두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아이들의 시간> 속 비극이 출발하는 씬처럼 괴상한 샷이 완성된다.
모든 이야기에 초점을 공평하게 맞춰야 한다는 말이 있다. 혐오에도 차별에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샷이 그 ‘공평’의 결과를 짐작케해준다. 공포스러운 불균형이다. 당대의 괴상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샷이었을지, 단지 매리의 사악함을 부각하기 위한 샷이었을지 정확한 연출자의 의도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매리의 클로즈업 샷을 통해 영화는 당시의 누군가를 퀴어라고 소문내는 것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이며 사악한 일인지 분명히 전달한다.
<아이들의 시간> 속 카렌과 마사의 결말은 비극일까?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릴리언 헬먼의 희곡 <아이들의 시간>을 원작으로 한다. 1930년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이 희곡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하려 했으나 1930년대는 헤이즈 규약(Hays Code)으로 인해 많은 매체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검열되던 시기였다. 헤이즈 규약은 당시 미국 영화제작배급협회장이었던 헤이즈의 이름을 따 만든 규약으로 신성 모독, 성적 도착, 변태적 행동과 이혼, 불륜까지 제재했다. 동성애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윌리엄 와일러는 1936년 <이 세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원작과는 조금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 결혼을 앞둔 카렌의 남자와 마사 간의 추문으로 인한 오해와 고립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나중에’ 1961년 윌리엄 와일러는 <아이들의 시간>이라는 원작의 제목을 살려 오드리 햅번, 셜리 맥클레인이라는 멋진 두 배우와 함께 다시 이 영화를, 퀴어영화를 찍게 된다. 25년이 지나 퀴어영화 <아이들의 시간>은 비로소 완성된 셈이다.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셀린 시아마 감독, 2019) 스틸컷 |
마사가 카렌의 결혼 이야기에 과도하게 불안해하는 장면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셀린 시아마, 2019)을 떠올리게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는 사랑하는 여인 엘로이즈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환영에 시달린다. 사랑의 상징, 웨딩드레스가, 결혼이 누군가에게는 왜 이토록 불안한 이미지일까. ‘정상’이라고 사회에서 정해놓은 수많은 것들 때문에 울타리 밖의 누군가는 정상의 이미지에 상처를 받고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매리의 거짓말이 일파만파 퍼져 학생들이 모두 학교를 떠난다. 카렌과 마사만이 기숙학교에 남아 갇히듯 시간을 보낸다. 이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인지 씬들이 유독 길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장소이동이 이뤄져야 할 시점에서 관객을 내보내지 않고 카렌, 마사와 함께 머물게 한다. 학생 한 명 없는 텅 빈 기숙사 학교에서, 문만 열어도 호기심 가득한 차별의 시선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카렌과 마사, 관객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그 숨 막히는 공간을 공유한다. 답답함에 지친 카렌은 결국 카딘과도 이별을 한다.
정말 카렌과 마사만 남았다. 소문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은 두 여성이 넋을 놓고 앉아 있다. 그리고 마사가 입을 뗀다. 사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이 샷에서 두 여성은 프레임의 끝과 끝에 위치한다. 오드리 햅번은 가장 왼쪽 끝에, 셜리 맥클레인은 우측 끝에서 대화를 한다. 갖은 혐오의 시선에도 함께하던 둘이, 한 쪽이 사랑을 표하자 카메라는 둘 사이의 거리감을 담는다. 하지만 이내 카렌이 마사에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소문에 정신이 혼란해진 것 아니냐며 추궁하다가, 마사의 진심 어린 고백에 조용히 들어준다.
이 씬의 셜리 맥클레인의 연기는 가슴을 찢어놓는다. 얼마나 불안하며,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힘들었으며, 자기혐오에 시달리는지 온몸으로 표현한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유부남과 연애할 때는 마스카라를 바르면 안 돼요.’라며 눈물 흘릴 일 많은 연애에도 염세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셜리가, 카렌의 손을 붙잡으며 처절하게 절규한다. 카렌은 마사가 잘못한 일은 없다고 말하며 속상함과, 가슴아픔, 안타까움이 모두 담긴, 허나 원망은 정확히 없는 표정으로 마사를 바라본다.
때마침 매리가 거짓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모든 오해는 풀린다. 하지만 이미 차별과 혐오를 체험한 둘에게 이는 단지 사건의 해결일 뿐 어떤 감정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당시 퀴어영화가 그러하듯 끔찍한 비극으로 끝이 난다. 카렌은 마사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걷는다. 마지막 샷은 빠른 걸음으로 걷는 카렌의 ‘달리 아웃’ 팔로우 샷이다. 카렌은 바스트 샷에서 클로즈업 샷까지 다가온다. 그리고 카메라를 지나치고 The End가 뜬다.
비극적인 엔딩 속에서 이 마지막 쇼트만큼은 희망으로 보고 싶다.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알게 된, 혐오자들의 우스운 꼴을 다 지켜본, 마사의 사랑을 품은 카렌이 편협한 사회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비웃듯 내일로 나아가는 걸음으로 해석하고 싶다. 영화를 본다면 오드리 햅번이 단순히 시대의 아이콘, 예쁜 여자 배우가 아닌 연기의 신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퀴어영화의 해피엔딩
‘퀴어영화’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세상의 핍박에 이뤄지지 못한 예쁜 남자들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시스젠더 남자 배우가 연기한 트랜스여성의 험난한 삶? 누가 볼 새라 마음을 김장독에 넣고, 또 그 김장독을 땅 밑 깊숙이 파묻어 흙을 덮은 다음 몇 년이 지나고 나니 어디에 묻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아니 묻은 사실조차 까먹었다는 이야기?
아, 퀴어 참 슬프다. 맞다, 세상은 비극이니까. 눈꼽만큼 나아지고 가시처럼 쏴대니까. 하지만 퀴어라고 24시간 눈물만 흘리는가? 어쩌면 정상성의 사회가 그것을 바라는 것 아닐까? 그들이 정해놓은 울타리 밖의 삶은 힘들고 괴로우니 쉽게 동정해 버리고 말면 끝인 것처럼 단순화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 신나는 퀴어퍼레이드가 얼마나 고까울까.
▲ 영화 <톰보이>(셀린 시아마 감독, 2011) 스틸컷 |
근래에 들어 열린 결말, 혹은 해피엔딩의 퀴어영화들이 등장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2011)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성별 이분법에 저항해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하던 여성 어린이가 이런 여성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혹은 트랜스남성 어린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적당히 나를 숨기며 살기로 다짐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논바이너리 어린이가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저 자신으로 정체화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하나의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퀴어라는 존재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비평일 뿐이다.
강물결 감독의 <털보>(2019)는 확실한 해피엔딩이다. 주인공은 자기혐오를 갖고 있으며 이는 ‘털’이라는 오브제로 표현된다. 주인공의 자기혐오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혐오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내 이겨낸다. 그리고 털 많은 애인과, 퀴어 앨라이 친구들과 함께 달려 나간다.
▲ 영화 <털보>(강물결 감독, 2019) 스틸컷 |
<아이들의 시간>, <톰보이>, <털보>에는 모두 퀴어로서 겪는 갈등이 담겨있다. 유구한 차별의 역사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이 땅에 박혀있다. 그걸 무시한 채 무조건 행복한 퀴어의 모습만 담는다면 이 또한 미디어의 희망고문일 것이며 고증의 실패일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의 차별을 재현하는 데 그친다면 확인사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있다. 많으면 된다. 행복한 퀴어영화도, 슬픈 퀴어영화도, 열린 결말의 퀴어영화도, 액션, 코미디, 공포, SF 등등 이런저런 다양한 퀴어의 모습이 비춰져야 한다. 같잖은 동정은 얼씬도 못하게, 웃기고 괴팍하고 못나고 무섭고 섹시한 퀴어들이 프레임을 메워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퀴어영화 속 갈등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길 바란다. 그때는 그랬구나, 하는 차별의 사료로서 존재할 뿐, 동시대적 공감은 불러일으킬 수 없길 바란다. 그것이 퀴어영화 역사의 진정한 해피엔딩일 것이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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