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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서 겪는 폭력을 말로 쌓아가야 하는 이유

복기에서 선언으로, 이라영 작가의 책 <폭력의 진부함>



지난 몇 달 전을 ‘복기’해본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에 대한 예의 있는 애도는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연대를 예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에 모여든 사람들의 행렬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와 산자에 대한 예의는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고민하게 만들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심정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예의를 모르는 철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어떤 이들의 목소리에 더 감정이입을 하는지, 어떤 것을 더 인간적인 문제라 느끼는지 여실히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라영 작가의 말대로 남성의 얼굴로 구성된 권력이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문화적으로 묵살시키는지 ‘예의 있게’ 잘 보여줬다.(7쪽)


이라영 지음 <폭력의 진부함: 얼굴, 이름, 목소리가 있는 개인을 위하여>(갈무리, 2020)


<폭력의 진부함>(이라영 지음, 갈무리)에서는 랠프 앨리슨의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을 인용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꾸며진 것만을 본다. 그야말로 그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보면서도 정작 나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주인공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인간이다. 제목 ‘보이지 않는 인간’은 곧 비가시화된 인간을 뜻한다.(110쪽)


하지만 보이지 않던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당황한다. 그들이 광장에 나서면 불편할 뿐이다. “왜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해야 하지?”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장애인들이 길거리에 나서면 통행에 방해를 준다고 불평한다. 퀴어들에게 광장과 공공장소는 혐오 세력과 때로는 공권력에 의해 오히려 닫힌 공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매번 확인한다. 여성들이 성폭력 경험을 말하면 너도 같이 즐긴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래서 소수자들은 경험적으로, 어딘가에 나서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안전하다는 말로 꾸며졌을 뿐이다.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만은 않다.


여성이라서 겪는 폭력, 너무 일상적이라 생략하는 이야기


1부의 제목은 ‘복기’이다. 작가 자신이 초등학생이었던 1980년대 중후반부터 ‘작가’가 된 지금까지 여성으로서 겪는 일상적인 폭력의 순간을 꼼꼼하게 기록했다.(나는 여기에도 생략된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밑도 끝도 없이 풍기는 성적인 뉘앙스, 여성 비하적 농담 그리고 그 농담에 나도 모르게 웃었던 기억,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 내 몸을 만지던 불쾌한 손과 손가락, 대낮의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버젓이 밀착해오는 몸들. 여성들에게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이야기하기 피곤한 문제이지만, 막상 이야기하면 “에이, 그럴 리가. 니가 오해한 거지” 때로는 “니가 예뻐서 그런 거야”라는 말을 듣는 일들.


작가는 그것을 꽤 긴 분량을 들여, 쓰고 있다. 독자들은 그 경험을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한다. 그 일들을 아마도 꽤 긴 시간을 들여 고심하며 썼을 것이다. ‘복기’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여성들에게 일상이다. 일상이다, 라고 표현하면 무언가 간단해 보인다. 그래서 여성들도 때로 ‘에이.. 무시하고 넘어가면 되지 뭐’, ‘나만 신경 쓰지 않으면, 괜찮으면 되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너무 진부한 폭력, 진부한 이야기이므로 생략하고 넘어간다.


그렇지만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남고, 상처의 순간은 마음 깊이 내면화된다. 혼자 남은 여성들은 그 사건들을 ‘복기’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만만해 보였나?” 나에게도 수많은 복기의 순간들이 있다. 너무 진부하고 따분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그런 복기의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복기’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록으로, 책으로 남기기 위한 복기이다,


지속적으로 말을 쌓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현재는 미래의 편파적인 목소리에 의해 왜곡된 채 남을 것이며,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195쪽)


이라영 지음 <폭력의 진부함>(갈무리, 2020) 목차 중.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한다’는 선언


여성들이 겪는 이런 일상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들은 어느새 모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입장과 의견을 요구받는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성폭력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사람들은 서지현 검사에게 가서 물었다.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라영 작가 역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 “이라영 작가님, 미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투. 허허. 미투 하하하하.” 이에 대한 답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지금부터 말한다.”이다. 그리고 2부로 넘어간다. 2부 전체가 그에 대한 답인 셈이다.


1부에서 개인이 당한 성희롱, 성폭력의 경험을 글로 차곡이 쌓아두었다면 2부에서는 그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왔는지, 우리는 어떤 구조 안에 놓여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설명한다.


‘매일 있는 일인데 뭐’하며 참고 넘기는 착한 여성이었으면 좋았을 여성이 글 쓰는 사람이 되어 그동안 받은 폭력을 차분히 기록하고 여성의 얼굴, 이름, 목소리가 어떻게 지워지고 또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추적하는 과정을 담는다.


‘부르는’ 싸움이 필요하다. 호명에 저항하기. 내가 누구인지 가르치려 하지 말라.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한다.(271쪽)


이 책에 선언 같은 문장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인 선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한다.”


‘복기’를 거쳐 내가 누구인지 내가 말한다는 선언까지 가는 길에는,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소수자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다시 나누는 행위를 통해 성폭력에 대한 설명을 계속 써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책과 글을 읽으며 나 역시 새로운 언어를 계속 발견하고 있다.


성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질문받는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 물음에 당황했고, 내가 모든 것에 대답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너희가 묻는다고 해서 대답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냥 나는 내가 할 이야기를 쌓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차분하게 기록할 것이다. ‘우리’가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도록 말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한다.” 이런 선언의 문장을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함께 떠올리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선언하는 목소리를 찾기 위한 ‘우리’의 과정에 동행할 독서리스트에 <폭력의 진부함>을 추가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필자 소개] 장단편(장수정). 책 팟캐스트 ‘애매한 언니들’ 진행자. 본업은 지역미디어 활동가. 서울 서대문에서 (사)서대문공동체라디오(전 가재울라듸오)를 9년째 운영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위해 지역 공동체 미디어와 대안적 플랫폼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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