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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학대, 묵인된 성폭력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가 보여주는 것



많은 소녀와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미국 전 국가대표 주치의 래리 내서(Larry Nassar)에게 175년형이 선고된 소식을 접했던 것도 벌써 약 3년 전 일이다.(관련 기사: 성추행 의사에 175년형 선고, 법정에선 무슨 일이… http://ildaro.com/8110) 법정에서 증언을 이어갔던 여성들의 용기 있는 모습과, 가해자가 쓴 ‘반성의 편지’를 읽지 않고 날려버린 판사의 단호함이 만들어냈던 장면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 남아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Athlete A) ©Netflix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Athlete A, 보니 코헨&존 솅크 감독)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영화는 2016년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기 전인 2015년, 코치에게 래리 내서의 성폭력을 고발했지만 전미체조협회의 침묵과 방조로 익명으로만 남아야 했으며, 충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선발팀에서도 배제된 ‘선수 A’(Athlete A)인 매기 니콜스(Maggie Nichols)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유약하고 불행한’ 피해자 서사나 ‘괴물’인 가해자 서사로 꾸려지지 않는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체조를 사랑했기에 몇 시간이고 빡센 운동을 하며 중압감을 이겨내고 다른 선수들과 경쟁한 강인한 사람들이고, 래리는 무섭고 엄격한 코치들을 피해 선수들에게 과자와 캔디를 건네주던 ‘착한 어른’이자 사회에서 명망 있는 인사였다.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를 보며 확인하게 되는 건 ‘피해자 vs 가해자’의 이분법적인 단순 구도가 아니라, 거의 20년 동안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소녀가 성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환경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세상이 어떻게 굴러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다.


성범죄자에 대한 고발을 계속 묵인해 온 전미 체조협회


2016년 리우 하계 올림픽을 앞둔 시점, 언론사 인디스타(The Indianapolis Star)는 전미 체조협회가 감추고 있는 성학대 사건이 있을 수 있다는 기사를 보도한다. 학교 내 성폭력 사건들을 조사하고 있던 기자 마리사 크비아트코프스키(Marisa Kwiatkowski)가 한 정보원의 이야기를 통해 전미 체조협회가 코치의 성폭력을 묵인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사를 이어가던 인디스타 기자들은 전미 체조협회가 ‘성범죄 고발에 대해 피해자나 부모의 서명이 없는 이야기는 소문으로 취급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고, 심지어 협회가 고발된 사건을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은 사실을 밝혀냈다. 고발된 코치가 54명이나 되지만 협회의 서류로만 남아있다는 사실도.


인디스타의 기사를 접한 레이첼 덴홀랜더(Rachael Denhollander)는 과거 15살의 체조선수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인디스타에 연락했다. 전미 체조협회가 코치들의 성폭력을 감싸줬다면 선수들의 치료와 재활을 담당해 온 의사의 성폭력도 덮었을 거라고, 자신이 그 피해자라고 말이다.


인디스타에 연락한 건 레이첼 뿐만이 아니었다. 리듬체조로 3번이나 미국 챔피언을 거머쥐었던 제시카 하워드(Jessica Howard) 또한 피해 사실을 밝힌 후, 범죄를 방조한 협회의 행동으로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때라고 얘기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던 제이미 댄츠셔(Jamie Dantzscher)도 마찬가지였다.


피해 증언은 점점 늘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래리 내서가 전미 체조협회에서 의사로 활동한 시간이 무려 29년이었다.


당시 전미체조협회장이던 스티브 페니는 성범죄 고발이 들어와도 바로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는다고 했다. ©Netflix


코치와 의사의 성폭력이 이렇게 만연할 수 있었던 건 ‘어린 소녀’로만 치부하며 피해자의 증언을 무시하는 협회 정책 탓이기도 했지만 광고·스폰서를 통해 돈을 벌기 위해, 협회의 이미지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한 몫 했다. 소녀들의 ‘임파워링’을 독려하며 꿈을 향한 소녀들의 도전을 지원하는 체조협회의 마케팅은 계속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여린 소녀’를 승리자/우승자/챔피언/영웅으로 만들어낸다는 ‘엘리트 팀 교육’의 학대 문제와 연결된다.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었던 환경은 ‘엘리트 교육’과 연결돼


다큐에 등장하는 생존자들이 성범죄를 고발하면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건 ‘엄격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학대다. 올림픽 선수였던 제이미 댄츠셔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5일 내내 토한 일로 약 3킬로그램이 빠진 걸 보고 코치가 ‘살 빠졌으니까 이제 그대로 유지하면 되겠네’라고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코치는 선수의 건강이 아니라 여성 체조선수로서 날씬해 보이는 몸을 더 신경 썼던 거다.


미국 챔피언이었던 전 체조선수 제니퍼 세이(Jennifer Sey)는 1976년 루마니아 대표였던 나디아 코마네치가 만 14세의 나이로 10.00점 만점을 기록하며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10대 소녀를 기준으로 삼는 체조업계의 관행이 심화되었다고 말한다. 더 어린 몸, 더 작고 가냘픈 몸이 체조를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것.


하지만 나디아 코마네치가 우승을 한 건 엄격하고 혹독한 훈련 때문이었다. 냉전시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과의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던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인 루마니아는 스포츠를 통해 미국을 이기겠다는 집념으로 선수들을 훈련했다. 선수를 향한 폭력도 용인되었다. 그 결과가 나디아 코마네치 같은 ‘국가적 영웅’의 탄생이었다.


1981년 코마네치를 가르친 마르타 카롤리와 벨라 카롤리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이들 부부가 가르친 선수들이 승승장구하자 미국 체조업계는 그들의 ‘엄격한’ 훈련 방식을 적용했다.


선수들은 “사람들이 가혹한 코치법과 아동학대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선수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선수들 중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정말 어린 소녀도 있었고 대부분이 10대 초중반이었다. 자신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언어화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음에도 ‘어른들’은 오히려 어릴 때부터 훈련해야 통제가 더 잘된다, 코치에게 필요한 건 잔인함이라며 혹독한 훈련을 부추겼다.


카롤리 부부가 만든 ‘엘리트 팀’에 들어가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건 많은 선수들의 꿈이었고 ‘영광’이었다. 거기다 카롤리 부부는 누굴 국가대표로 선발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텍사스 헌츠빌에 있는 카롤리 목장이라 불리는 훈련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선수의 양육자가 방문할 수도 없고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는 곳이었지만, 훈련소가 올림픽 선수를 만들어 낸다는 결과만 중요할 뿐이었다.


그런 훈련소와 체조업계 환경은 래리 내서가 계속해서 어린 선수들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문제 없이 경력을 쌓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혹독한 훈련 속 유일한 ‘착한 어른’이었던 래리 내서


올림픽 선수였다는 게 자랑스럽지 않다고 말할 만큼 선수 생활 동안 학대와 폭력, 부상을 입어서 아프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 환경에서 지낸 시간이 여전히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한 제이미 댄츠셔는 “그런 학대의 현장에서 래리만이 유일하게 친절하고 상냥한 어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래리의 치료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었다고 말이다.


래리 내서의 성폭력을 처음 고발한 레이첼 덴홀랜더는 “15살 땐 (래리가 한 짓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젠 알기 때문에 지금 고발한다. 이제 밝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Netflix


래리는 엄격한 코치들과 달리 유머 있는 사람이었고, 음식에 대해 많은 규제를 받고 있던 선수들에게 몰래 과자를 건네주던 사람이었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 팀을 오랫동안 맡아온 의사로 상당한 명예가 있는 사람이었고, 자폐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단체도 설립해 활동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범죄 이력도 없었다.


그랬기에 선수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래리가 자신에게 한 행동이 범죄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일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매기 니콜스도 그랬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이 바로 범죄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다른 동료 선수도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알고 나서야 겨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코치에게 얘기했고, 코치는 매기의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래리의 성범죄를 알게 된 매기의 부모는 바로 협회에 고발했다. 2015년 6월의 일이다. 매기의 부모는 선수를 강인하고 훌륭하게 키워낸다는 코치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선수를 보호할 것이고 사건을 수사당국에 넘기겠다는 협회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협회로부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거기다 2015년 매기는 선수로서의 능력에 정점을 찍고 있었다. 미국 체조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시몬 바일즈(Simone Biles, 시몬 또한 2018년 래리 내서의 성범죄를 고발했다)에 이어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었고, 2016년 리우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던 때였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기의 부모는 침묵하는 협회나 코치를 압박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국가대표 선발 결정권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협회는 매기를 국가대표 선발에서 제외시켰다. 매기의 성적을 고려하면 예비 선수로 선발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협회는 끝까지 선수가 아니라 가해자를 지키는 걸 선택했다.


꿈꾸는 소녀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승리, 우승, 성공이라는 목표 아래 잔혹하게 진행된 ‘엘리트 교육’과 아이들을 통제하고 학대한 어른들의 사회는 ‘영광의 순간들’과 많은 돈을 만들어냈을진 몰라도 성/폭력의 가해자를 만들어 냈으며 그 연결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도저히 틈이 없어 보였던 그 연결고리를 끊어낸 건, 지독한 그 사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여성들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피해 사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아남았음을 말하기 시작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짚어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 사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이 성범죄자인 래리 내서가 175년형을 선고받게 했고, 굳건했던 미국 체조 협회장을 구속하게 했고, 영웅이자 스승으로 추앙 받던 카롤리 부부를 물러나게 했다.


물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듯 아직 갈 길은 멀다. 지난 봄, 전미 체조협회가 피해자에 대한 보상 등의 협상에 소극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걸 현 국가대표 선수들이 분노하며 지적한 사례처럼 여전히 변해야 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변화는 분명히 있다.


제이미 댄츠셔는 법정에서 래리 내서를 향해 “당신이 우릴 통제하던 시간은 끝났다”고 말했다. ©Netflix


“여자아이들이 몸을 멋지게 뒤집고 틀며 나는 모습을 보고 저도 하고 싶었거든요. 체조는 제 첫사랑이에요.” 체조의 모든 걸 좋아했다는 제이미 댄츠셔는 래리 내서를 심판한 법정에서의 증언이 끝난 이제야 자신이 올릭픽 선수였다는 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엘리트 팀’에서 은퇴하고 대학 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매기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기록을 내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는 매기의 목소리엔 행복함이 묻어난다.


소녀들이 체조를 사랑하고 체조 선수를 꿈꾼 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소녀들에게 체조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소녀들을 이용한 어른들과 사회가 문제였던 거다.


한국 사회에서도 미투운동(#MeToo) 이후 체육계 내 미투와 스쿨미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가해자 몇 명이 처벌 되었다거나, 혹은 가해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릴 뿐 그 사회에 변화가 목격되진 않는다. 몇 사람의 가해자만 처벌한다고 성/폭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성/폭력이 발생하는 환경과 구조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이 영화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를 통해 다시 한번 드러났다.


또 한번의 대학 입시가 끝난 지금, 과정이 어떠할지라도 능력 있고 성공하면 된다는 이 사회의 메시지가 어떤 상처와 폭력, 범죄로 연결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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