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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이 낮은 의료…왕진 다니는 페미니스트 주치의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이 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의사가 쓴 책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의원)의 ‘멋찐 언니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던 터. 그날 밤,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엔 한없이 하락했던 인류애가 놀랍게도 회복되어 있었다. 미국 대선을 보도하는 뉴스에서 온종일 떠들어 댄 ‘파랑’(민주당)과 ‘빨강’(공화당)이 아니라,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그 삶에 무엇이 있을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있을지 차분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이 선사한 마법이었다.
살림의원 추혜원 원장이 쓴 책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동네 주치의의 명랑 뭉클 에세이>(심플라이프, 2020)
공대생은 왜 의대생이 되기로 했을까?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은 원래 공대생이었다. “4층짜리 건물 전체에 여자 화장실이 단 한 개도 없는 건물이 버젓이 있는” 그런 공대에 다니던 그는 “언니들을 만나고 싶은 목마름에 공대 여성위원회에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1학년 겨울방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게 된 추 원장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증언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에 꽂혀 “내가 가야겠다, 의대”라고 결심한다.
그건 사명감이었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순수한 피해자’였던 경험과 ‘순수한 피해자’가 될 수 없었던 경험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가 어떤 시선 앞에 놓이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추혜인 원장은 의대에 합격 후, 입학도 하기 전에 성폭력상담원 교육부터 받았다. “의학 교육보다 그걸 먼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회고는, 요즘처럼 의학과 의료의 가치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시기에 여전히 사람에게 희망이 있음을 보여 준다. 자본에 휘둘리고 있는 의학/의료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또한 여성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병원과 의사가 여성의 아픔과 통증을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도 짚는다. “남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 심장내과로 보내지고, 여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 정신과로 보내진다는 얘기는 자조적인 농담이 아니”라며 의학 내 성차별도 꼬집는 것이다. 여러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중증장애인 환자와 가족이 오히려 병원과 가까워질 수 없는 장벽을 마주한다는 이야기도, 트랜스젠더가 찾아올 수 있는 병원에 관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추혜인 원장이 전하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무엇이 문제인지 발견하게 된다. 현재 의학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해가 낮을 뿐만 아니라 비남성, ‘정상성’ 범주에서 벗어나는 모두에게 불친절하다는 것, 남성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주민과 조합원이 함께 만드는, 누구나 올 수 있는 병원
그랬기에 그는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의료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한다. 의사나 의료인 중심이 아닌, 조합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다.
살림 유튜브 <살림의료협동조합 10원칙이 만들어지기까지> 영상 중 (출처: https://youtu.be/Dsh8xfNCS8o)
물론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젊은 페미니스트 비혼여성들이 모여 지역사회에 들어가면 기혼여성들과 경쟁?!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기”도 했고, “동네에서 자리 잡기 위한 수단으로 ‘중매’를 제안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젊은 페미니스트 비혼여성들은 서울 은평구에 살림의원을 만들었다.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 제도”를 가진 살림의원은 “진료받고 싶은 사람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의원”이다.
“누군가 들어오려고 했을 때 그 진입을 방해할 우려가 있는 물리적, 사회적 장벽을 낮추고 없애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개방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 아래,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 월세가 비싸더라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공간을 꼭 확보하고자 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살림의원이 병원장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조합원이 함께 만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좌충우돌 그 자체인 살림의원의 창립 스토리, 그리고 병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한켠엔 꼭 조합원이 있다. 의사와 환자라는 이분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병원과 우리 동네 의료, 돌봄 체계를 구축하는 일원으로 함께 움직이는 조합원들. 이들은 좋은 병원이나 의사를 찾는 게 복불복이거나, 인맥을 털거나,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꿈꾸는 병원을 위해 직접 뛰는 사람이다.
페미니즘이 담긴 왕진 가방
이렇게 다양한 지역주민, 조합원의 이야기가 책에 담길 수 있었던 건 추혜인 원장이 왕진을 다니는 의사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큰 몫을 한다.
살림 유튜브 <왕진 가방, 왓츠 인 마이백?(2) [왕진시리즈 3탄]> 영상 중 (출처: https://youtube.com/Salimcoop)
추 원장은 왕진이 더 이상 당연시 되지 않는 대도시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나선다. 그가 왕진을 통해 환자와 그 가족을 만나는 경험은 여전히 왜 왕진이 필요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역설적으로, 의사 한 명이 동네 전체를 책임지는 주치의가 되긴 어렵다는 점을 드러낸다. 실제로 추혜인 원장은 왕진 중에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하고 조합원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렇기에 ‘팀 주치의’가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거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이 정말 흥미로운 건 다양한 목소리,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갑고 서늘한 병원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나와 가까운 병원과 의사, 더 나아가 주치의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팀 주치의’라니, 말만 들어도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더 멋진 건, 그 왕진 가방 속에 수천 명의 동료, 주민, 조합원이 함께 만들어 온 페미니즘이 들어있다는 거다. 나도, 우리도 그 일부가 될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의학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살림의원만큼 이 책 또한 환대로 가득하니까.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이 기사는 일부 요약문입니다. 기사 전체보기: 문턱이 낮은 의료…왕진 다니는 페미니스트 주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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