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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연대…‘단 한 번의 친밀함’의 계보 잇기

이주혜 소설 <자두> 서평 에세이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만남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언급하며 소설 <자두>는 시작된다.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 소설 속 화자인 주인공은 <…깨어날 때>의 번역자로 등장하는데,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깨어날 때>의 내용을 갈무리한 내 독서 메모장을 뒤져 보니, 이 책의 실제 번역자와 소설 <자두>의 작가(이주혜)가 동일인이 아닌가.


이주혜 소설 <자두>(창비, 2020)와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모성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던진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로 이미 에이드리언 리치에 매료된 나로서는, 그녀의 흩어진 글들을 정리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 큰 감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공명시키는 페미니즘의 울림통이 예민하게 반응했고, 호기심 어린 의문도 함께 증폭했다. 의문은 이랬다. 그녀가 가부장제에 균열을 낼 도구라 역설하는 ‘레즈비언 연속체’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일 수 있을까, 그녀가 화두 삼고 있는 ‘mothering’은 어떻게 창의적인 모성으로 변용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mothering'은 ‘엄마-되기’와 ‘엄마-하기’, ‘엄마-노릇’ 중 무엇으로 인식되는 게 적절할까.


그런데 내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을 읽고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의구심만 부풀리고 있던 이 부분이, 소설 <자두>의 도입부에 주인공 화자의 입을 빌려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독서를 하다 보면 책이 문득 내 삶의 갈피에 꽂히는 놀라운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주인공 화자(은아)를 <…깨어날 때>의 번역자로 설정한 것은 우연이 아닐 터, 작가는 어떤 고리를 연결하고자 했던 것일까. 소설은 에이드리언 리치(1929-2012.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와 엘리자베스 비숍(1911-1979.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의 우연한 인연을 도입부에 틈입시킨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거주 지역인 보스턴까지 한 차에 동승한다. 뉴욕에서 조우했을 당시 두 여성은 각각 동성 파트너와 남편의 자살이라는 공통의 불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 삶에서 최근 겪은 자살에 대해, 자기 이야기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처럼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하”며, “단둘이 보낸 거의 유일한 시간”을 통해 “단 한 번의 친밀함”을 완성한다. 이 ‘단 한 번의 친밀함’의 계보를 작가는 <자두>의 두 여자에게 잇고 싶었던 것일까?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단 한 번의 친밀함’은 가시적인 지속적 관계를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두 사람 인생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소설 <자두> 속 주인공의 서사를 경유해 이렇게 확신하려 한 것이 아닐까. ‘단 한 번의 친밀함’은 비록 찰나였지만 영원한 기억으로 봉인된다고. 그리고 이런 미약하나마 강렬한 기억의 감정이 어쩌면 ‘레즈비언 연속체’의 희미한 형태일지 모른다고. 마침내 젠더 이데올로기가 죽인 여성의 영혼이 깨어날 때, 자신에게 이미 매듭지어진 여성 연대의 고리를 목격하는 일이 곧 잠복한 연대감을 부활시키는 일이라고.


며느리의 자리


시아버지는 며느리(은아)와의 첫 만남에서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라고 표현하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학으로 상경해 자수성가했으며 외아들(세진)이 박사가 되도록 뒷바라지한 좀 깨인 어른이다. 하지만 건강의 위기가 닥치자 좀 깨인 어른이란 배경은 그가 정교히 구상한 설정이었음이 드러난다. 그가 애써 꾸민 설정 뒤에 숨긴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들과 며느리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시부는 나름 나 홀로 가구의 삶을 잘 살아내는 듯 보였다. 병마라는 시험에 들지 않았다면, 그는 죽는 날까지 품위로 위장한 설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아들 며느리가 결혼한 지 10년째 되던 해, 시부는 암 선고를 받는다. 수술과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입 퇴원을 반복하자, 간병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버티던 은아와 세진도 시들어 간다. 이들의 돌봄 수행은 노인 부모가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 가기 힘든 현실을 보여준다.


은아와 세진 역시 부실한 사회적 돌봄이 낳은 막막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선 각자 구축한 삶의 큰 축을 허물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 ‘국가가 책임지는 돌봄’이라는 슬로건은 마치 국가가 노년을 책임진다고 믿게 하지만, 현실에 직면하면 허상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미 위태롭게 금이 가고 있던 일상은 시부가 세 번째 입원 중 잠에서 깨어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됨으로써 박살이 난다. 섬망(주로 병원에 입원한 노인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뇌의 기능장애) 증상으로 무장해제된 채 혼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그는 스스로 진실 폭로자가 된다. 그가 “기억의 결계에서 풀려”나 혐오와 분노로 쏘아올린 포탄은 은아에게 유리 파편이 되어 꽂혀 회복 불가능한 상흔을 남긴다.


며느리를 어여삐 여겨 그리 부른 줄 알았던 “봄꽃”이란 실상, 언젠가 여차하면 그 꽃에 뿌려버리겠다고 감춰둔 제초제와 같은 잔혹한 마음이었다. “반짝이는 내 태양을 가로챈 아이. 내게서 세진이를 빼앗아 간 아이. 저 도둑년”이라고 분기를 삭이지 못하고 발설하는 시부는, 절치부심 적을 제거하려 갈아두었던 혐오의 비수를 기어이 은아의 심장 깊숙이 밀어 넣는다.


박탈감의 분노로 이글대는 시부의 살벌한 눈빛은, 언뜻 광장을 분기로 채운 태극기 부대 속 늙은 남자의 날 선 눈빛을 떠올리게 한다. 오직 발전만 앞세운 개발독재는 살육으로 점철된 전쟁 속에 비틀린 남성성을 돌보지 않았고, 무능한 복지의 부재를 개인의 노력으로 메꾸게 했다. 고군분투로 아들을 박사로 키워낸 시부의 비틀린 자부심은 고된 세월을 보상하지 않는 무책임한 국가에게 분노의 과녁을 놓는 대신, 저임금 노동의 최전방에 있는 비정규직 여성 돌봄노동자와 돌봄을 당연한 의무로 수행해야 하는 며느리에게로 향한다. 근면과 애국을 내면화한 허약한 식민지 남성성은 ‘노화’라는 몸의 위기에서조차 자신의 보잘것없는 몸을 약자로 재구성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더 약한 여성에게 분풀이함으로써 남루함을 드러내고 만다


소설 <자두>와 영화 <69세>


시부의 섬망이 폭풍처럼 달겨들며 은아를 해치기 시작할 때, 그녀가 왔다. 하루 일당 8만 원이 책정된 간병인 황영옥은 간병 일머리가 척척인 노련한 간병인이다. 은아와 세진에겐 고마운 유능한 간병인이지만, 시부는 그녀를 못 믿어 하고 섬망을 빙자해 욕설을 서슴없이 날린다. 결국 황영옥을 내치고 남자 간병인으로 대체되었을 때, 시부가 남자 간병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그의 돌봄(지시)에 매우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은, 그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여성을 하등한 존재로 여겨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뜬금없이 자두가 먹고 싶다는 시부에겐, “기순네 어미가 보기 전에 얼른 저 자두를 한 알 훔쳐내 베어” 먹고 싶던 어린 날의 가난과 외로움이 스며있다. 깨끗이 씻은 자두의 과즙을 삼키며 그는 과거의 어떤 자신과 만나고 있는 것일까? 죽을 날이 다 되어도 소외당한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는 노인의 모습은 국가가 돌보기를 포기한 이방인의 모습이다. 자두를 베어 물며 과거를 악무는 그가 마침내 은아에게 “도둑년”의 일성을 토해내던 날, 황영옥은 은아를 데리고 황급히 분풀이의 현장을 빠져나온다.


조난당한 은아를 옥상으로 끌어올린 황영옥은 옥상 한 귀퉁이에 숨겨놓은 담배에 불을 붙여 건넨다.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지만 두 사람이 나눠 피우는 담배 연기는, 위기에서 자신을 구조한 것이 믿었던 가족이 아니라 생판 남이라는 아이러니를 피워내며, 둘의 식도와 기관지를 훑고 심장에 도달한다. 몰아칠 폭풍을 예감하고 그 위기에서 사람을 구해낸 예민한 촉수는 그 공포의  고통을 겪어본 자만이 터득한 본능일 터, 역지사지의 공감이 건네는 무언의 위로는 희미한  회복의 친밀함을 낳는다. 이 장면은 영화 <69세>(임선애 감독, 2019)의 한 장면을 플래시백처럼 터뜨리게 한다.


젊은 남자에게 성폭행당했지만, 누가 늙은 여자를 건드리겠냐는 만인의 불신과 질타가 <69세>의 주인공 심효정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동거하며 돌봐주던 노인에게조차 불신받고 마침내 그의 집을 떠나던 날, 그녀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겨우 몸 누일 곳을 찾은 곳이 몸을 혹사하며 돌보았던 중환자의 집이라는 노인 여성의 현실은 아프다. 영화는 효정이 몸을 혹사당한 그곳을 다시 찾은 이유 중 하나를 그 노인 환자의 딸에 대한 공감으로 연결한다. 자영업으로 가게를 어렵게 꾸려가며 가장으로 오랜 세월 묵묵히 아버지 병수발을 드는 딸의 신산함과 고독은 효정의 처지와 닮았다. 둘이 옥상에서 말없이 나누어 피는 담배 연기엔 서로의 고단함을 살피는 희미한 공감의 연대가 묻어난다. 이들처럼 황영옥과 은아가 병원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나눈 담배 역시, 말을 넘어선 공감의 친밀함을 보여준다.


▲ 영화 <69세>(임선애 감독, 예수정 주연, 2019) 중에서. 


‘아이를 안 가진 여성’


시부가 사망하고 치르는 장례식에서 은아는 공고한 남성동맹의 민낯을 목도한다. 세진을 박사로 만든 헌신적인 홀아비 시부를 모시지 않았고, 게다 독자인 세진의 아이를 낳아 대를 잇지 못한 쓸모없는 며느리에게 퍼부어진 비난이 그것이다. 친척의 몰지각한 비난에 빙의된 남편마저 가세하자, 그간 사랑한다고 믿고 살아온 남자의 실체를 서늘히 자각하게 된다. 사나운 가부장의 후예들이 여성 혐오로 무장하고 쏘아대는 타격의 좌표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임을 정확히 맵핑한 것이다.


아이 없는 여자 은아는 에이드리언 리치가 세심히 다룬 ‘아이를 안 가진 여성’(unchilded)의 페르소나로, 왜곡된 여성성-즉 아이를 낳은 여자가 정상이라는 맹목이 지금 여기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음을 폭로한다. 따라서 은아의 결단은 ‘정상이 아닌 여자’라고 재단할 권력을 남루한 가부장 따위에 양도하지 않겠다는 결기인 것이다. 과거에서 떠나온 페미니스트 에이드리언 리치는 죽어 있던 여성(은아)의 영혼을 부활시켰고, 이것이 작가가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소설에 잠복시킨 이유일 것이다.


야수들의 우리에서 겨우 벗어난 은아는 문득, 병원 옥상에서의 그날을 떠올린다. 황영옥과 무언으로 공유한 담배 한 대와 ‘단 한 번의 친밀함’이 자신을 위기에서 구한 에크모(호흡보조장치)였음을 깨닫는다. “그날 우리는 옥상에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리치와 비숍의 ‘단 한 번의 친밀함’이 황영옥과 은아에게 연결된 순간이다.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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