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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이름으로 강화되는 불평등을 고발하다

책 <능력주의와 불평등>이 제기하는 질문



차별과 불평등에 대항하기 위해 “성공해야 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정상에서 만나자”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모두가 다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 과연 사람들은 그걸 정상이라고 부를까? 결국 누군가는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계속 차별과 불평등을 마주하게 될텐데 그냥 ‘나만 아니면 돼’인걸까?


일라이 클레어의 저서 <망명과 자긍심>(전혜은, 제이 옮김. 현실문화)


미국의 장애·환경·퀴어·노동운동가이자 작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책 <망명과 자긍심>(전혜은, 제이 옮김. 현실문화)에서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둥거리며 힘겹게 산에 오르고, 그 산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거기서 실패를 겪고, 그 그림자에 묻혀 살아왔을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일라이는 정상에 있는 이들의 모순을 꼬집는다. 그들은 정상에서 보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며 “너희들은 게으르고 어리석고 나약하고 추하기 때문에 거기 아래 바닥에서 살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막상 ‘우리들’이 산에 오르려고 하면 “우리의 움직임에 자극받아 길에 위장 폭탄을 설치한다”고 말이다.


“그들은 매우 깊어 건널 수 없는 협곡 위의 다리를 불태워버린다. 그들은 우리의 지형도를 수정하여 결국 우리가 빙빙 돌게 만든다. 그들은 용역 깡패를 보내 우리를 낭떠러지로 밀어낸다. 어쩌면 우리는 정상에 오를지도 모르지만, 아마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막대하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게으르고 어리석고 나약하고 추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상에 오르는 과정이 이미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음에도, 능력에 따른 결과는 공정하다고 믿는 ‘능력주의’의 환상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공정의 상징이 되어버린 능력주의가 실제론 불평등과 연계되어 있으며, 능력이라는 것 또한 이미 계급화 되었고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이에 부응하듯 10명의 저자가 각기 다른 시선에서, 하지만 한 목소리로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책 <능력주의와 불평등>(박권일 외 9명 지음, 교육공동체벗)이 나왔다.


<능력주의와 불평등>(박권일 외 9명, 교육공동체벗)


소수자·약자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고 있는 능력주의 담론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능력주의는 한국인의 일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바꿀 수 있고 바꿔야 마땅한 사회 제도·법·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피해자 탓하기’와 ‘책임의 개인화’로 귀결시켜, ‘결국 네가 공부 안해서 그런 거잖아’라는 식의 말로 말문을 막아 버리는 일이 흔하게 목격”된다는 거다.


올해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검색요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직접고용 전환을 둘러싸고 불거진 사태도 능력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서울의 좋은 대학 나와 토익 시험 만점을 받아도 가기 어려운 ‘신의 직장’ 공기업 정규직을 스펙 낮은 이들이 차지하는 게 불정공하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저자는 이 사태를 “공정성에 대한 지적은 학벌주의 옹호는 물론, 블루칼라 노동자와 소위 ‘지잡대’ 출신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 발언으로도 이어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갑자기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작년 6월 해고된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한국도로공사에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17일간 농성했을 때(관련기사: 공공부문 정규직화…‘자회사’ 꼼수 막아낸 여성노동자들)도 ‘감히 아줌마가 어디 정규직이냐’는 등의 혐오발언들이 등장했다.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이런 현상이 “최근 10여 년간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공정성을 따지는 싸움은 “금세 공정의 탈을 쓴 혐오 담론이 되고 만다”며, “소수자·약자 혐오를 추동하고 지속시키는 핵심 동기 중 하나가 바로 능력주의”라고 비판한다. “공정성에 대한 집착과 능력 강조는 현실에서 ‘능력자에 대한 우대’라는 차원보다 주로 ‘탈락자·소수자·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형태로 발현된다는 점”은 큰 문제다.


일라이 클레어가 말한대로 “소수자·약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막대”하지만, 오히려 사회는 “자격과 능력도 없는 것들이 무임승차를 통해 과도하게 많은 자원을 가져가고 있다”는 ‘무임승차론’을 이야기한다. ‘무임승차론’이 ‘공정함’이라는 이름과 맞물려 오히려 소수자와 약자가 나아갈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능력주의는 ‘지적 인종주의’와 같아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믿음, 평등의 토대가 무너진 능력주의는 인종주의와 구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능력주의가 어떻게 인종주의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은 “학생들에게 거리낌없이 ‘너는 1등급이다’, ‘너는 9등급이다’라고 규정”하는 지금의 상황이 “가령 1960년대 이전 미국의 버스에서 백인은 앞자리, 유색인은 뒷자리로 구분했던 행태와 얼마나 다른지” 묻는다. 그리고 지금의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이 ‘지적 인종주의’라고 밝힌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처음 피력한 ‘지적 인종주의’는 가장 교묘하여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인종주의”다. 지적 인종주의는 “지배 세력이 우월한 학업 성적 그리고 학위와 자격증으로 입증된 지적 우수성을 과거의 특권이나 귀족 타이틀처럼 내세워 자기들이 차지한 지배적인 위치를 정당화”한다.


지금 사회는 누구든 ‘노오력’ 하면 된다는 능력주의에 사로잡혀 이 ‘지적 인종주의’가 가진 문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정용주 초등학교 교사는 ‘현수’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능력주의에 의해 가려진 불평등을 고발한다. 영구 임대아파트에서 6명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현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학습부진아’가 되었지만 그의 학습에 대해 논의할 양육자가 없다. 현수는 “빈곤이 인위적으로 집중된 곳”에 살면서 그에 따른 “낙인을 부여받았고, 낙인을 내면화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현수에겐 “축소된 관계망을 확장시킬 여지”가 없다.


“능력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차별적 특혜를 주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며, 타고난 계층 배경이나 부모의 사회적·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제공해야 함”에도 현수에겐 그것이 제공되지 않았다. 정용수 씨는 이것을 “마땅하지 않은 불평등”이라 꼬집는다.


‘개천용 신화’에 가려졌던 것들


때로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증명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사례를 부각시키면서 사회는 ‘네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지만,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제도화된 규범으로 존재하는 능력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고시’만 봐도 “개인 대 개인의 순수한 능력 경쟁인 것처럼 보이지만 터무니 없는 기만”이라 비판한다. ‘개천용 신화’가 가리는 게 있기 때문이다. 고시 준비가 “결코 혼자서 가능하지 않다”는 거다.


저자는 “적어도 수년간 밥 먹고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의 경제적·정서적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는 점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가 고시의 출발선에 설 수 없다”는 점을 꼬집는다.


또한 수많은 ‘개천용 신화’의 가려진 여성의 얼굴은 얼마나 많았던가. 남성형제 혹은 남편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출발선에 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들 말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도 남성은 그래도 고시를 보겠다고 하면 가족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성은 고시는커녕 상급 학교 진학조차 ‘주제넘은’ 일이었기에, 고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도 한다. 여성의 대학진학률, 전문직 비율은 분명 과거에 비해 높아졌다. 하지만 이게 정말 평등한 기회의 결과일까? 이유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기획운영위원은 “신자유주의적 개인에는 젠더가 없으며, 중요한 건 그저 ‘능력’뿐이라고 역설”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사람들이 속고 있다고 진단한다.


지금의 ‘청년 담론’에서조차 그 얼굴은 남성으로 대변되며, 여성이 겪는 차별은 ‘능력부족’으로 치환된다. “청년 세대의 노동 시장의 진입 문제를 다룰 때도, 여성 청년이 경험하는 노동 시장의 조건이 ‘청년 일반’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지형에 놓여 있다는 현실은 쉽게 누락”된다. “여성들은 고용 조건의 악화와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오롯이 감당”하고 있음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부는 ‘일-가족 양립 정책’을 통해 “여성이 노동자이자 돌봄 책임자로서 이중 역할을 하는 것을 전제하고, 여성의 출산력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해결하고자 나서지 않는다.


여성의 능력은 돌봄과 육아?


이렇게 능력주의는 오랫동안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약자를 배제시키고 차별해온 담론이다. 거기에 더해 소수자·약자를 혐오하는 기제로 쓰이며, 오히려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사다리를 타고 유리 천장을 깨는 것은 페미니즘이 될 수 있을까?”


이유림 셰어 운영위원은 “불평등한 파이를 해체하고 나의 파이(몫)를 찾기 위해서는, 평등하지 않는 방식으로 파이에 연루되어 있고, 얽혀 있고, 상호작용하고 있는 구조를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정한 능력이 특정한 방식으로 평가되고, 능력 자체에 차등적인 가치를 두고 있는 체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는 거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는 왜 돌봄, 공감, 감정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기대되는지, 그리고 여성들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아나 간병과 같은 일들은 가족 내에서 고용되지 않은 여성이 ‘무급’으로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지, 또한 육아나 가사, 노인 돌봄과 같은 영역이 임금 노동으로 편입될 때 얼마만큼의 경제적 보상을 획득하는지” 등을 질문해야 한다는 것.


공정하게 일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이 가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능력’ 때문에 불안정한 일자리에 내몰리고 채용차별을 겪고 불평등한 임금을 받는 상황에서, 이 ‘능력’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능력주의로 인한 차별은 계속될 것이니까 말이다.


“누군가를 ‘능력없음’과 ‘능력있음’으로 규정하고 세분화하는 권력은 어떠한 구조 속에 있으며, 그 구조에서 가장 능력있다고 여겨지는 몸은 어떠한 몸인지 페미니즘은 질문했다.” 이유림 운영위원은 이렇게 설명하면서 “뛰어난 여성들이 자신의 파이를 찾기 위해서는 능력을 규정하는 권력 자체에 대한 더 급진적인 도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얼마 전, 30대 발달장애인 아들과 함께 방배동에 살던 60대 김 씨의 죽음이 5개월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아들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종이를 들고 노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죽지 않고, 길거리에 내몰리지 살아가기 위해 요구된 ‘능력’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정당하고 공정한 것이었을까?


더 늦기 전에,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을 깨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뎌보자고 <능력주의와 불평등 -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는 제안한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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