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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나 ‘조안’ 말고, 성의 글을 계속 읽고 싶다

현재진행형 트라우마 치유기 <남은 인생은요?>를 읽고


한국 독자들은 책 <남은 인생은요?>를 읽으며 저자의 약물중독과 자기 학대 이야기에 흠칫 놀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보고 들어온,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유혹에 굴하지 않고 주님과 공동체의 도움으로 성공했다는 ‘자랑스런 미국 교포’들의 서사와는 다르다. 이 책을 수많은 트라우마를 겪고 ‘살아남은 몸’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으면 좋겠다.


작가 ‘성’이 쓴 에세이집 <남은 인생은요?: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미디어일다, 2020)


‘트라우마, 가족, 중독, 몸에 관한 기록’이라는 부재가 드러내듯이, 가족은 성의 트라우마 경험 속에서 가해자 혹은 목격자로 빈번히 등장하고, 진통제가 필요한 몸은 중독으로 이어졌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불가피한 폭력을 겪고 귀가하는 자녀의 치유를 도울 의무가 있지만, 이주민 부모는 그 과제 앞에서 한층 무능할 때가 많다. 그 자신들 역시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화적 혼란과 존재의 모멸 속에 살기 때문이다. 성의 부모도 그랬다. 위로하고 공감하기보다, 침묵하고 비난하고 처벌했다. ‘술을 마시고 숨는 법을 배운’ 아버지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틀어놓고 매실주를 마시며 “백인 남자라는 이런 슬픔을 연주하지 않지”라고, 에둘러 말할 뿐이고, 엄마는 ‘자기혐오의 연장선’인 딸에게 멍자국을 남겼다.


아이를 ‘사랑했지만 제대로 사랑하는 데는 실패한’ 부모와 단절되어, 성은 방문을 닫아걸고 말문도 걸어 잠근 채 점점 자란다. 자기혐오와 학대를 되풀이하는 그는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누군가의 온기와 관심이 절실해 밖으로 떠돈다. 심리상담실과, 낯선 남자들의 침대, 정신병원, 서비스직 아르바이트, 문예창작과 강의실, 참전 군인 친구들이 모인 하우스파티에서 성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죠’와 ‘정말 미안해요’를 오가며 ‘멀쩡하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그 시간 내내 그의 몸은 인종 차별을 받는 몸, 성 착취와 학대를 견디는 몸, 약 성분을 해독하고 자해로부터 회복되는, 그런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몸은 어찌되었건 살아남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관찰하며, 기억을 운반하고 숙성해 다른 이가 독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내는 몸으로도 기능해왔다.


그리 편안한 독서는 아니지만 초반의 충격과 껄끄러움을 극복하면, 독자들은 예상치 못했던 이해에 도달할 것이다. ‘약물중독자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향정신성 약물에 대한 금기와 통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약물중독은 대개 혐오와 편견의 대상이지만, 저자는 섬세한 묘사와 감각의 복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너무 많이 느껴져서 괴로웠다고, 그걸 무디게 해줄 뭔가가 필요했다고. 너무 무겁고 어두웠다고, 거길 따뜻하게 밝혀줄 뭔가를 먹었다고.


나의 독서는 저자의 중독 문제를 독해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남은 인생은요?”라는 질문이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정신 수양을 통해 “낭비를 최소화한 삶, 뚜렷한 목표와 책임으로 이뤄진 삶”이 가능해졌다며 성에게 “지금은 매일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괜찮겠지만” 남은 인생은 어쩔 거냐고 개과천선을(49쪽) 촉구하는 지인 바스티앙은 저자가 한껏 음미하는 시간 역시 살아가고 있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다.


오후까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을 할일 목록에 넣어야하며, 한껏 약에 취하지 않고서는 차마 들어갈 수 없는 너저분한 집으로 대표되는 ‘게으른 생활’은 저자가 자기혐오를 계속하는 동력이 되고 이는 곧 삶은 낭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은 어떤 순간들은 영겁의 시간처럼 살고 있다.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들, 정신 병원에서 마주치는 비참한 얼굴들, 어린 시절 도시락 반찬 위로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던 학급 친구까지, 저자는 많은 삶의 시간을 넘치도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종이 위에 풍부하게 되살려 다른 사람과 나눈다. 그건 삶을 음미하는 것 아닌가. 무엇이 낭비인지 남의 인생을 감히 누가 재단한다는 건지. 그리고 인생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법은 또 어디 있는지.


책 <남은 인생은요?> 속 글귀들. (디자인: 허미경)


우울과 환희: ‘너무 지쳐 있지만’ 계속 쓸 수밖에


삶의 모순과 혼란을 음미하는 이주민의 글쓰기, 이제는 이 책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성의 용기 있는 작업에 힘입어 나도 미뤄온 나의 글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정말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근래에 발견, 혹은 발병한 정신질환이 나의 일상과 존재를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지에 관한 글이다. 물론 마음을 먹었다고,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이 든다고 일이 술술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프게 된 나는 “제가 회복되었거나 심지어는 회복되는 중이라고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성의 자기 불신과 “문제가 계속 나타났다가 잠잠해지길 반복하고 그걸 억제해보려고 하지만 때때로 엉망이 될 것”같은 확신에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거나(19쪽),” 무심코 저녁거리를 썰던 식칼을 자기 팔뚝에 내리꽂고 싶은 온 사방으로 뻗는 분노와 적의, 정신 차리고 보면 뭔가를 부수고 내던져버린 뒤 자기혐오와 자책에 시달리는 것. 주기적으로 극심한 공허와 피로에 절어 어제까지 해온 일들이 전부 부질없으며 결코 완성할 수 없다고 납득하고 마는 것. 그 기진맥진한 날들이 지나가면 또 뭔가를 써보고 싶어지지만 사실 그 정도의 힘은 없음에 한참 비관하다가 이빨 대신 잇몸, 어눌해져 버린 언어를 내려놓고 사진기를 들고, 수공예를 하는 것. 나는 이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런 내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이야기를 가치 있게 보지 않는 것” 같다는 성 덕분에 내 삶의 가치를 본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음 문턱에 갔던 성은 퇴원을 했고, 악의나 폭력 없이 온전한 사랑만을 나눌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났으니까. 무사히 데뷔작을 출간해내고 대학원에도 진학했으니까. 무엇보다 위악과 모순, 혐오가 공공연한 데다가 약하고 변덕스러운 성의 이야기에 또다른 수많은 성들이 독자의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그걸 보면서 나도 살아 보기로 한다. 그 서서히 소용돌이치는 느리고 거대한 치유의 에너지, 그 품에서 계속 살아 보기로 한다. (하리타)


(이 기사는 일부 요약문입니다. 기사 전체보기:  미국 교포 서사와는 다른, 이방인 ‘성’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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