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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의 날개옷과 바다표범 ‘셀키’의 가죽을 훔친 사회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삶은 이야기를 통해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책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의 아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아빠가 고기잡이 하느라 집을 비우는 날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앵무조개, 이불문어, 인어와 해마, 구눈박이 장어, 도둑 달팽이처럼 바다에 사는 신비한 존재들의 이야기! 아이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놀란다. 어부의 아내는 헤엄치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면서 엄마는 바닷물에 발 한번 담근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바다 세상 이야기를 이토록 잘 알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이는 엄마에게 바다표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바다표범은 육지에 올라와 가죽을 벗고 인간이 된다고 했어. 그런 바다표범을 셀키라고 부르는데, 셀키는 가죽을 보물처럼 잘 숨겨 놓는대. 인간으로 있다가 다시 바다로 가려면 가죽이 있어야 하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정말로 셀키 가죽을 보게 된다. 거실 소파 밑에 돌돌 말려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아이는 그것이 아빠의 것인 걸 알고 있다. 며칠 전에 아빠는 엄마가 잠든 사이 살금살금 나오더니 반짝이는 꾸러미를 집안 어딘가에 가져다 두었다. 그 모습을 우연히 본 아이는 반짝이던 것이 궁금해서 집안을 살폈는데 셀키 가죽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는 바다표범인 것일까! 아이는 이 놀라운 비밀을 엄마에게 들려주는데….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 그림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김경연 역, 풀빛)


그림책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는 북유럽에서 전해져 오는 셀키(Selkie) 전설을 뿌리에 두고, 아이의 시점에서 서술한 그림책이다. 본문에 나온 것처럼 전설에 나오는 셀키는 가죽옷을 입고 벗으며 인간과 바다표범을 오갈 수 있는 요정이다. 지역에 따라 세부 설화는 다르지만, 대체로 많은 셀키 전설에서 여자 셀키는 가죽을 훔친 어부와 결혼하고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다.


옷을 훔친 남자와 강제 결혼을 하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전설은 우리나라의 구전설화 ‘선녀와 나무꾼’과 닮아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우리가 흔히 듣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와 달리, 그들의 아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고 다른 결론을 맺는다. 아이가 엄마에게 셀키 가죽을 보여준 다음 날, 엄마가 혼자 사라진 것이다. 바다표범 셀키는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인데, 이제 남겨진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옷을 훔친 아빠와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 사이에서, 아이는 막막한 마음을 품은 채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는 이 땅의 여자들이었다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도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흔셋 지리산 마을에 사는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어릴 적에 유치원에 다녔지만, 초등학교는 3학년 때 중퇴했다. 어른들은 여자가 배우면 위험하다면서 학교에 가는 걸 금지했다. 글을 배운 여자는 일본에 끌려간다는 무서운 말들이 들렸다.


일본에 끌려간 건, 할머니의 신랑이었다. 농고 졸업을 앞둔 열아홉 살 신랑은 혼례를 치르고 이틀 뒤 징용되었다. 열다섯 살 새색시였던 할머니는 슬플 겨를이 없었다. 신랑도 없는 시댁에 가서 살아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옆에서 잠을 자고 바느질을 했다. 두 해쯤 지났던가, 해방이 되었다고 했는데 신랑은 돌아오지 못했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낯선 말들이 떠돌았고, 자꾸만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시어머니는 쌀 두 가마니와 함께 며느리를 지리산 중산간마을 친척집으로 보냈다. 세상이 좋아지면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때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건넛집에 밥을 해주러 다녔다. 아내를 잃고 아이 다섯과 살던 마흔 넘은 남자네 집에 빨래며 바느질을 해주고 품삯을 받았다. 어느 날 남자에게 겁탈을 당했다.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 집에서 아이 넷을 더 낳았다. 몇 년 뒤, 남자는 병을 얻었고 누워서 지냈다. 십 년 넘게 남자의 병수발을 하면서도, 할머니는 소를 키워 살림을 불려갔다. 어느 날, 남자는 자신이 곧 죽을 걸 예감했다. 누워있더라도 집안 재산은 모두 남자의 것이었다. 남자는 첫 부인 사이에서 낳은 장성한 자식들과, 어린 자식이 딸린 부인이 엇비슷하게 살 수 있도록 재산분할을 해두었다. 환갑을 넘기고 며칠 뒤 남자가 죽었다. 장성한 자식들은 아직 젊은 여자였던 할머니의 재산을 상당수 가로채갔다.


마흔이 넘어 있었다. 뼈 빠지게 일했다. 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삼천포까지 걸어가서 염색물과 소반을 팔아 올 만큼 용맹하고 지혜로웠지만, 과부라는 사실은 흉이었다. 뒷마을에서 곡식을 빻아 이고 오던 날, 남편의 친구이기도 했던 남자에게 산에서 겁탈을 당했다. 도망가고 피하고 뛰었지만 막지 못했다.


아이가 들어섰다. 언덕에서 구르기도 하고 진한 간장을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지만 열 달이 지나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겁탈한 남자가 아니라, 여자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세상의 비방은 무시하려고 애썼지만, 자식들 넷이 자신을 멸시할까, 아기를 미워할까 두려웠다. 멀리 부산에 생겼다는 보육원에 아기를 맡겨야 하나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자식들이 아기를 예뻐했다. 그때 낳은 막내아들이 지난해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에게 가장 애틋하게 굴었지만, 세상에서는 실없고 무능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그게 누이형제들과 아비가 다르게 태어난 탓인 것 같고, 당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지금도 내내 가슴이 아프다.


이 이야기는 내가 생애사를 듣게 된 아흔셋 할머니의 특별한 이야기이지만, 지난 시절 여성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과 한국전쟁, 산업화, IMF 금융위기, 신자유주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낸 사람이고 지혜롭고 용감하게 삶을 개척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동시에 가부장제에 내내 핍박받아온 여성이다.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 그림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김경연 역, 풀빛) 중에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를 새삼 떠올렸다. 그림책이 아닌 이 현실 세계에서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 아닌 여성이 드물고, 셀키 아닌 여성이 별로 없는 것 같은 건 나만의 착각일까? 전설처럼 살아온 여성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새삼 실감한다.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사회와 개인들 속에 나 역시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이 기사는 일부 요약문입니다. 기사 전체보기: ‘선녀’의 날개옷과 바다표범 ‘셀키’의 가죽을 훔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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