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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상품화의 고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가 던지는 질문
“가장 교묘하게 해를 끼치는 억압은 우리의 기본 일상과 마음 깊은 곳에 은밀하게 침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마이클 파렌티(Michael Parenti)
페미니스트 동물연구가가 쓴 ‘어느 암소의 서사’
황윤 감독의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2015)에서 아기 사람과 아기 돼지가 병치되던 도발적인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케스린 길레스피가 쓴 책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는 아기 돼지만 암송아지로 대치했을 뿐, 그때 기억을 그대로 소환해주었다. 1389번 암소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책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에 삽입된 이미지 1.1 Sadie, Animal Place (Grass Valley, CA)
케스린 길레스피(Kathryn Gillespie)는 젠더(gender)와 생물학적 성, 식품과 농업,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자이자 비판적 동물연구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의 낙농업계에서 자행되고 용인되는 폭력과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 규범 및 체계, 그리고 상품화가 소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외면하는 형태에 저항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외면하는 형태가 암소뿐 아니라 사육되는 모든 동물, 업계 노동자와 인간,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고찰한다.
컬 경매에서 본 소들은 모두 도축장으로 끌려가 죽기 직전이었는데 왜 유독 1389번 소만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소의 고통이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던 나에게 너무 생생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또 어쩌면 낙농 생산 과정에서 너무 지치고 소진되어 도살되기 직전 마지막 경유지인 경매장을 자기 발로 걸어 나갈 수조차 없을 정도의 몸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1389번 소는 계속 나를 괴롭힌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눈만 감으면 그 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1389번 소(그리고 그와 같은 처지의 동물 모두)가 바로 이 책의 제목이고,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개와 소를 차별하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생명을 서열화하게 된 걸까? 저자는 인간과 특정 동물의 단절을 인간에 의한 종(種)의 “계층화”와 “범주화”에서 찾는다. 반려동물, 유해동물, 식용동물, 실험동물 등과 같이 동물을 범주화하고 인간은 그 최상층에 위치시키거나 예외로 두기 때문에, 지정된 범주에 따라 인간이 동물을 취급해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일찍이 소나 돼지, 닭 등을 식용동물의 범주에 넣었으며, 재고의 여지없이 일반적인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동물이라는 범주 자체는 인간을 제외한 종(種)을 인간의 하위에 있는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게 하며, 그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한다. 동물의 정체성은 인간에 의해 개념화되고 이미지화된 대로 규정되어 소비되거나 향유될 뿐, 그들의 서사는 강제적으로 침묵당했다.
어떻게 특정한 생명과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로 자리 잡고, 그 결과 폭력이 전혀 폭력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은 인간 이외의 종에 대한 폭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폭력이 (법과 자본주의 같은) 제도적 장치, (역사, 문화적 관습, 지배적 담론 등의) 사회적 규범,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는 인간 예외주의 등의) 불평등한 사고의 틀에 의해 지속, 재생산, 소거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영양과 식품군에 관한 지식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관련 업계의 정치성이 작용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낙농업계의 성공적인 로비 활동으로 현재의 식생활 가이드라인에서 중요한 위치를 계속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케스린 길레스피(Kathryn Gillespie) 저서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 고기도 가죽도 아닌, 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 원서 표지와 번역서(윤승희 역, 생각의길, 2019) 표지 이미지
과학의 탈을 쓴 정치는 그 진위를 따질 새 없이 소비자들에게 끊임없이 주입된다. 이는 정책의 결정이 소수의 엘리트나 전문가들에게 집중되는 기술관료제(Technocracy)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자 병폐이기도 하다. 이것이 비정상화의 정상화를 낳는다. 문제를 감지하고 이 상황을 전복하려는 소수는 대체로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행동과 실제 자신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동물에 대해 쉽게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축산품이 상품화되는 첫 출발점부터 동물의 존재는 간단하게 잊거나 부정해버릴 수 있다. 애초에 식품을 섭취할 때면 동물은 보이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
1949년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는 ‘빅 브라더’(소설에서 정보를 왜곡하여 민중을 호도하고, 텔레스크린으로 이들을 통제하는 독점적인 권력을 칭함)의 눈이 시민을 감시하는 암울한 미래를 묘사한다. 사회의 구성원들, 심지어 가족들마저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지만, 결코 ‘빅 브라더’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오웰은 그의 소설 속 세상에서 이중사고(doublethink)라는 개념을 작동시켰다. “알면서도 모르는 것, 진실을 완전히 꿰고 있으면서 공들여 지어낸 거짓말을 하는 것,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을 견지하면서, 그들이 서로 모순인 것을 알면서도 둘을 똑같이 옳다고 믿는 것. 의식적으로 무의식 상태가 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방금 시행한 최면 행위마저 의식하지 않는 것”은 이중사고가 강요되고 개성 있는 사고력이 거세된 암울한 사회의 특징이다.
케스린 길레스피는 미국 낙농업계에 오웰식 이중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동물을 사육하는 데에 고통스러운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면서도, 이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머리에서 지워버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한다. 철판에 삼겹살을 굽다가 도살당한 돼지를 애도하는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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