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후원과 기부의 정신은 ‘공정성’
약 2년 전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을 위해 지역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한 국제 NGO의 후원회원이 되었다. 절대빈곤 상태의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고, 화장실을 설치하고, 교육을 지원하는 등 최소한의 기반을 만들어 줌으로써, 해당지역 어린이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취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에서 후원을 독려하는 글을 본 것이 후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지만 ‘나눔’에 대한 생각이 즉흥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나눔’이란 ‘남을 돕는다’거나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기보다는 기울어진 저울추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은 공정함에 대한 욕구, 인간으로서의 의무감에 더 가깝다.
수입의 일정액을 지속적으로 후원이나 기부에 쓰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 중에서 제3세계 절대빈곤 여성이나 아동에게도 일부가 돌아가게 하겠다고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내가 가진 수입 안에서 최대한 효율적이고 공평한 분배 기회를 모색하고 싶었다.
이디오피아에서 온 사진과 편지를 받고
내가 후원하는 단체는 다른 대다수 어린이 후원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후원자와 어린이들을 1대 1로 맺어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후원신청을 하면 후원하게 될 어린이와 그가 속한 지역사회에 대해 소개하는 간단한 자료를 받는다. 후원금은 후원대상으로 지정된 아동에게 예방 접종, 영양식, 교육 기회 등을 지원하는데 일부 쓰이고, 나머지는 지역사회의 기본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사용된다.
첫 후원을 하고 얼마 후, 이디오피아에 살고 있는 한 아이의 사진과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사실 좀 묘하게 마음이 들떴다. 나눔의 대상이 구체적인 한 개인으로 나타났을 때, 내 머리보다 마음이 저만치 앞서 달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 동안 나는 ‘이 아이에게 무엇을 보내줄까?’하는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편지에는 무얼 쓸까? 내 사진은 어떤 걸 보낼까? 우리 동네 사진을 찍어 보낼까? 옷을 보내줄까? 어떤 걸 좋아할까? 그림을 좋아할까? 스케치북이나 크레파스는 어때? 언젠가 만날 기회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일방적인 감정적 친밀함과 만족감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1대 1 후원의 방식이 후원자에게 책임감과 보람을 느끼게 하기도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대 1 후원이 가진 심리적 맹점 고려해봐야
‘잘 사는 나라’의 사람인 내 행동이 후원을 받는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세심하게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후원하는 지역은 이디오피아의 한 마을로 절대빈곤지역이다. 식수와 기초적인 의약품을 확보하는 게 당장의 문제다. 나의 편지와 선물이 ‘희망’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감을 부채질할 수 있다.
아이와 후원자 사이에 정서적, 경제적 의존관계를 고착시킬 수도 있다. 가족이나 지역의 어른들에 의해, 어린이가 원하지 않게 후원자에게 ‘아양을 떨어야 하는’ 분위기로 내몰릴 수도 있다. 개인적 물품후원이 후원아동과 비(非)후원아동 사이에 경쟁의식이나 위화감을 조성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 점들을 무시한 채 ‘우리 애한테 좋은 거 보내야지’ 라는 심정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1대1일 후원이 가진 심리적 맹점이 아닌가 싶다. 이 단체에서 후원자의 개인적 방문이나 고가의 선물 후원 등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그런 위험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제3세계뿐만 아니라 국내 후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아동후원의 경우 딸, 아들, 형제, 자매 식으로 가족관계처럼 이미지화하는 것은, 후원대상과 후원자 양측에 담백하지 못한 관계를 형성하게 할 우려가 있다. 한국처럼 가족주의가 강한 곳은 특히 그렇다. 자칫하면 서로에게 지나친 기대로, 부담이 되는 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다.
후원하는 어린이의 가치를 따져선 안돼
간혹 각종 아동후원단체들에서 내거는 홍보물들을 보고 있자면, 예쁘고 착해 보이는 애들을 앞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지역에서 후원아동을 ‘고르는 과정’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너무 앞서간 염려일수도 있겠지만, 점검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종종 후원자들의 수기나 관련 방송에서 ‘착하고 예쁜 아이’, ‘순수한 모습’,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고 있는’ 같은 표현을 접할 때마다 착잡해진다. 후원대상에 대한 기대치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공부를 잘해야 하거나, 순수한 모습을 지녀야 할 필요는 없다. 착하게 살라고 후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지, 도와줄 가치가 있어서 도우려는 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들에 생각이 미치면서 나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눔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도록 담백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건 나의 작은 나눔으로 그 지역사회가 최소한의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고, 아이들이 극단의 빈곤과 위험에서 벗어날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내가 스스로를 계속 성찰하고, 나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을 계속 개발해나가기를, 새해를 맞아 다시금 기원해본다. 박희정ⓒ일다 | 가난의 악순환 끊어내는 건 ‘교육’ | 네팔어린이 미래의 종자돈 ‘2만원’
'경험으로 말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때문에 고충이 많은 학교 (4) | 2009.07.09 |
---|---|
장애여성문제, 이중차별인가 다중차별인가 (1) | 2009.06.18 |
장애여성 활동가로 사는 것의 의미 (0) | 2009.05.11 |
양육자를 위한 설계 (0) | 2009.05.03 |
젊어야 사는 여자!? (0) | 2009.04.30 |
장애인의 날이 4월 20일이 된 이유 (0) | 2009.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