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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장애여성 활동가로 사는 것의 의미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9. 5. 11. 16:25

4월 말에 장애여성 활동가 재충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주에 다녀왔다. 제주의 생태환경 속에서 활동가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금 전망을 찾으려는 취지였기에, 자연 속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과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활동보조인을 포함한 총 10명의 구성원 중 휠체어사용자가 3명이었고, 뇌성마비 장애여성도 1명 있었다.
 

제주여행을 하며 장애여성 활동가로서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제주도에서 생태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안내자를 잘 만난 덕분에, 우리의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사실 내겐 제주도 여행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에는 안내자인 고제량(제주자연치유시민모임 사무처장) 선생님이 해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인해 예전에 그저 스쳐 지나갔었던 그때 그 장소가 다르게 다가왔다. 제주도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함으로써 비로소 제주도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나 할까?
 
오고 가는 길 혹은 하루 일정을 마친 저녁 무렵쯤 고제량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곳곳에서 부딪혀야 했던 장벽들 앞에서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 미안해했던 그녀는 장애가 있는 몸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 장벽들을 넘어서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기에 이해를 구하거나 싸우거나 때론 울부짖는 것일 뿐.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삶의 과제들을 피하지 않고 그저 직면하는 것일 뿐. 그것이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묶어주게 된 것일 뿐.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을 운동가 혹은 활동가로 정체화하기가 어색한 여자들이다.
 
제주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묻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제주여행에 함께했던 장애여성 활동가들은 선택과 결단에 의해 운동을 하고 있는 운동가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구성원들 모두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가 있는 몸에 각인된 장애여성의 정체성은 숨길래야 숨기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차라리 직면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를래야 도저히 다를 수 없는 조건을 가졌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예전에는 천형으로 여겨졌던 장애라는 조건이 오히려 겉과 속이 같은 나로 살아가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줄이야.
 
길은 보이지 않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스스로에게 운동을 하고 있는 이유를 물었었다. 최근에야 잠정적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찾았다. 내가 운동하는 이유는 아마도 장애여성인 내게 부여된 과제를 정면으로 받아 안아 치열하게 살아감으로써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며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힘들다는 이유로 도망칠 궁리를 하지 않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어렴풋하게나마 운동을 하면서 고달프기만 하거나 더 이상 피폐해지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우리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정녕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왜 이리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는지….
 
이번 제주여행 중 개원 10주년 행사에 우리를 기꺼이 초대해 푸짐한 점심식사를 대접해준 한빛 여성의 쉼터 원장님은 2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1층에 전시되어 있던 그림 몇 점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우리들에게, 휠체어가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리프트라도 빨리 만들겠다고 말했다. 굳이 따지거나 비난하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변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장애여성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잔잔하지만 깊이 각인된 제주도 여행의 여운을 음미하자니 장애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운동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약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언정, 우리들에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음을 제주가 다시금 가르쳐준 것 같다.
 
요즘 여섯 살 난 아들 찬이는 줄곧 제주에 다시 가자고 조르고 있다. 사실 일행에게 불편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찬이를 동반하면서 망설임이 많았다. 하지만 활동가 엄마를 둔 덕분에 늘 엄마와 함께할 시간이 부족한 찬이에게도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아이를 데리고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찬이는 엄마의 품보다 더 넉넉한 제주바다의 품에 안겨 충분히 휴식하면서 잠시나마 엄마의 빡빡한 스케줄에 따라야 하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삼박사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망아지처럼 제멋대로가 되어버린 찬이를 바라보며 원래 아이들의 본성은 그런 것이려니 하는 생각에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다시 전쟁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찬이도 엄마도 함께 자라며 행복해지는 운동을 꿈꾸면서 다시금 용기를 내어보기로 한다. / 김효진님은 <오늘도 난, 외출한다>의 저자이며, 장애여성네트워크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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