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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잃어가는 것에 대한 사색
얼마 전 빈 화분에 파뿌리를 심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파를 흙에 묻어두고서 필요할 때마다 잘라 쓰시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잘라먹고 1cm정도 남은 밑동을 조심스레 흙에 심으면서도 ‘과연 자라긴 할까?’하고 속으로 의심했었다. 하지만 흙이 마르지 않도록 제 때 물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더니, 내 정성을 알아챘는지 새파란 싹이 살며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영락없는 파의 꼴을 갖춰 잘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파 살 일 없다, 생각하니 마음이 흡족하다.
작은 밭을 가꾸는 꿈
도시에 사는 사람, 특히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자기 먹을 거리를 스스로 기르는 일은 흔하지 않다. 주말농장을 이용하거나, 단독주택이라면 정원 한 편에서 야채를 키우거나, 아파트 거주자라면 나처럼 베란다 한 켠에 화분을 놓아두고 야채를 키우는 사람 정도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도시에 살면서 시장이나 마트에 의존해서 식재료를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지, 손수 야채를 키우는 일조차 예외적인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도시에 살면서도 흙을 만지고 야채 키우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난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란 전형적인 도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시절 내 꿈은 특별한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작은 밭을 갈며 사는 삶이었다. 아마도 그때의 꿈이 아직도 내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는 모양이다.
한 해는 근처 산자락 공터 땅을 개간해 깻잎, 고추, 가지, 호박 등을 키워보기도 했다. 척박한 땅의 돌을 골라내고, 퇴비를 주고, 집에서부터 물을 져 나르는 등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열매가 맺힐 때면 그 모든 수고로움을 잊었다. 그 땅이 포장되자, 이번에는 베란다에 과일상자를 구해다 놓고 깻잎, 고추, 방울 토마토 등을 키워 신선한 식탁을 차려내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는 양질의 거름, 분변토를 얻기 위해 꽃화분에서 발견한 지렁이 몇 마리에게 음식물쓰레기를 거둬 먹이며 지렁이 사육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처럼 감히 도시에서 채소 키우는 엄두를 내보는 것도 할머니의 밭농사를 곁눈질해 둔 덕분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집 담벼락 아래 자투리 땅을 이용해 온갖 야채들을 키워 밥상에 올리곤 하셨는데, 호박, 상추, 가지, 고추, 깻잎, 파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물론 내가 할머니의 작은 밭에 가서 물 한 번 준 적 없었지만, 눈으로 보고 자란 것이 그래도 공부가 되었던가 보다.
그래서였는지, 중학교 시절 난 학교 정원에다 밭을 일구기도 했다. 당시, 산 위로 이사한 학교는 건물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 정원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나무도, 꽃도 없었다. 마침 담임선생님께서 고구마를 물에 담궈놓고 싹을 틔우고 있어, 그 싹 난 고구마를 잘라 심는 것으로 내 어설픈 농사가 시작되었다.
고구마로 시작했지만, 그 밭은 같은 반 친구들이 가져온 묘종들 덕분에, 깻잎, 고추, 옥수수 등 다양한 야채로 뒤덮이게 되었다. 퇴비를 줘야 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초보 농사꾼이었던지라, 결국 고구마 몇 알을 수확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그때의 농사는 참으로 즐거운 놀이와 같았다. 그 행복한 기억 때문이었는지, 고등학교 시절 어느 순간부터 난 밭 갈며 사는 미래를 그려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농사에서 ‘생명 순환’의 자연적 체험을
내 꿈이기도 했었지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농업을 직업으로 하는 농부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흙을 가까이 하고, 내 먹을 거리를 스스로 키워내며, 나와는 다른 생명을 보살핀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생명의 순환과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먹거리를 스스로 키워내는 과정에서, 다른 생명체를 돌보고, 돌본 생명체의 소중한 생명을 취해 내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언젠가는 내 몸 역시도 흙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체를 살리게 되리라는 사색에도 빠져보게 된다. 그래서 농사는 우리를 자연과 문명의 조화로운 경험으로 인도하고, 우리 삶을 자연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게 하여 보다 풍요롭게 해 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요즘의 아파트촌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질서정연한 가로수 길을 걷고, 멋진 공원에서 뛰어 놀며 잘 가꿔진 아파트 정원을 바라보고 지내지만,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환경 속에는 농사가 안겨주는 자연 체험의 기회가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인스턴트 음식이나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우는 행위는 먹는 일 자체가 단순한 생명유지 행위를 넘어 자연의 생명순환과정에 참여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리라. 봄에 화초를 사서 겨울이면 밖에 내놓고 얼려 죽이는 행위는 자연, 생명을 진정으로 돌보는 마음이 빠진 소비행위일 따름이다. 또 보도블록으로 덮인 인도 위를 걷고, 포장된 도로 위에서 교통수단에 의지해 이동하는 도시인에게 흙이란 낯설기만 하고, 비 오는 날, 길 위의 지렁이도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사실 비자립적인 도시는 과도한 화석연료 소비에 의존하고 있어, 화석연료가 부족하거나 결핍되는 순간, 도시는 활기를 잃고 마비되게 될 것이다. 아니, 더 이상 그처럼 화석연료 의존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비적이고 비자립적인 도시는 건강하지 못한 공간이다. 날로 비대해져 가는 도시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면, 지금처럼 언젠가 고사하도록 도시를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도시에게 생기를 되찾아줄 방도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본다.
도시에게 생기를 되찾아줄 방도
거대하지만 취약한 도시, 그 도시만큼이나 건강하지 못한 도시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해법은 바로 농사로부터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먹을 거리를 대부분 도시 밖에서 구하는 도시와 농사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농사는 도시로 하여금 자연의 흐름에 참여하고 소통하도록 하여 왜곡된 삶의 방식을 치유해나가도록 도울 것이 분명하다.
도시인인 내가 끊임없이 농사를 열망해 온 것도 어쩌면 도시가 잃어가는 것, 상실한 것에 대한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오래 전 아파트 정원의 꽃과 나무를 뽑아내고 그 땅에 채소를 길러 먹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참 황당했던 기억인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 할머니도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쑥쑥 잘 자라는 파를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채소도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오늘은 산 밑에서 상추 모종을 사 들고 왔다. 파릇파릇한 상추 잎이 참 탐스럽다. 이경신 ▣일다는 어떤 곳? ※ 함께 읽자. 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녁, 2004)
의사도,약도 맹신해서는 안된다 | 좀더 불편하면 지구가 살아난다 | 자가용차 없이 살수는 없는가?
얼마 전 빈 화분에 파뿌리를 심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파를 흙에 묻어두고서 필요할 때마다 잘라 쓰시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잘라먹고 1cm정도 남은 밑동을 조심스레 흙에 심으면서도 ‘과연 자라긴 할까?’하고 속으로 의심했었다. 하지만 흙이 마르지 않도록 제 때 물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더니, 내 정성을 알아챘는지 새파란 싹이 살며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영락없는 파의 꼴을 갖춰 잘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파 살 일 없다, 생각하니 마음이 흡족하다.
작은 밭을 가꾸는 꿈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살기 ⓒ일다
그런데 나는 도시에 살면서도 흙을 만지고 야채 키우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난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란 전형적인 도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시절 내 꿈은 특별한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작은 밭을 갈며 사는 삶이었다. 아마도 그때의 꿈이 아직도 내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는 모양이다.
한 해는 근처 산자락 공터 땅을 개간해 깻잎, 고추, 가지, 호박 등을 키워보기도 했다. 척박한 땅의 돌을 골라내고, 퇴비를 주고, 집에서부터 물을 져 나르는 등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열매가 맺힐 때면 그 모든 수고로움을 잊었다. 그 땅이 포장되자, 이번에는 베란다에 과일상자를 구해다 놓고 깻잎, 고추, 방울 토마토 등을 키워 신선한 식탁을 차려내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는 양질의 거름, 분변토를 얻기 위해 꽃화분에서 발견한 지렁이 몇 마리에게 음식물쓰레기를 거둬 먹이며 지렁이 사육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처럼 감히 도시에서 채소 키우는 엄두를 내보는 것도 할머니의 밭농사를 곁눈질해 둔 덕분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집 담벼락 아래 자투리 땅을 이용해 온갖 야채들을 키워 밥상에 올리곤 하셨는데, 호박, 상추, 가지, 고추, 깻잎, 파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물론 내가 할머니의 작은 밭에 가서 물 한 번 준 적 없었지만, 눈으로 보고 자란 것이 그래도 공부가 되었던가 보다.
그래서였는지, 중학교 시절 난 학교 정원에다 밭을 일구기도 했다. 당시, 산 위로 이사한 학교는 건물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 정원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나무도, 꽃도 없었다. 마침 담임선생님께서 고구마를 물에 담궈놓고 싹을 틔우고 있어, 그 싹 난 고구마를 잘라 심는 것으로 내 어설픈 농사가 시작되었다.
고구마로 시작했지만, 그 밭은 같은 반 친구들이 가져온 묘종들 덕분에, 깻잎, 고추, 옥수수 등 다양한 야채로 뒤덮이게 되었다. 퇴비를 줘야 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초보 농사꾼이었던지라, 결국 고구마 몇 알을 수확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그때의 농사는 참으로 즐거운 놀이와 같았다. 그 행복한 기억 때문이었는지, 고등학교 시절 어느 순간부터 난 밭 갈며 사는 미래를 그려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농사에서 ‘생명 순환’의 자연적 체험을
먹거리를 생산한다는 것의 의미 ⓒblog.naver.com/aboveink
다시 말해서, 내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먹거리를 스스로 키워내는 과정에서, 다른 생명체를 돌보고, 돌본 생명체의 소중한 생명을 취해 내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언젠가는 내 몸 역시도 흙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체를 살리게 되리라는 사색에도 빠져보게 된다. 그래서 농사는 우리를 자연과 문명의 조화로운 경험으로 인도하고, 우리 삶을 자연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게 하여 보다 풍요롭게 해 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요즘의 아파트촌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질서정연한 가로수 길을 걷고, 멋진 공원에서 뛰어 놀며 잘 가꿔진 아파트 정원을 바라보고 지내지만,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환경 속에는 농사가 안겨주는 자연 체험의 기회가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인스턴트 음식이나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우는 행위는 먹는 일 자체가 단순한 생명유지 행위를 넘어 자연의 생명순환과정에 참여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리라. 봄에 화초를 사서 겨울이면 밖에 내놓고 얼려 죽이는 행위는 자연, 생명을 진정으로 돌보는 마음이 빠진 소비행위일 따름이다. 또 보도블록으로 덮인 인도 위를 걷고, 포장된 도로 위에서 교통수단에 의지해 이동하는 도시인에게 흙이란 낯설기만 하고, 비 오는 날, 길 위의 지렁이도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사실 비자립적인 도시는 과도한 화석연료 소비에 의존하고 있어, 화석연료가 부족하거나 결핍되는 순간, 도시는 활기를 잃고 마비되게 될 것이다. 아니, 더 이상 그처럼 화석연료 의존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비적이고 비자립적인 도시는 건강하지 못한 공간이다. 날로 비대해져 가는 도시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면, 지금처럼 언젠가 고사하도록 도시를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도시에게 생기를 되찾아줄 방도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본다.
도시에게 생기를 되찾아줄 방도
무우 싹ⓒ미루님 블로그 blog.naver.com/aboveink
도시인인 내가 끊임없이 농사를 열망해 온 것도 어쩌면 도시가 잃어가는 것, 상실한 것에 대한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오래 전 아파트 정원의 꽃과 나무를 뽑아내고 그 땅에 채소를 길러 먹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참 황당했던 기억인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 할머니도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쑥쑥 잘 자라는 파를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채소도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오늘은 산 밑에서 상추 모종을 사 들고 왔다. 파릇파릇한 상추 잎이 참 탐스럽다. 이경신 ▣일다는 어떤 곳? ※ 함께 읽자. 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녁, 2004)
의사도,약도 맹신해서는 안된다 | 좀더 불편하면 지구가 살아난다 | 자가용차 없이 살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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