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경험으로 말하다/이경신의 죽음연습

봄의 시간 속에서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9. 4. 6. 14:17
생명체로서 자연의 시간을 체험하며 
 
봄맞이 물청소를 했다. 겨우내 흙투성이로 더러웠던 베란다 바닥을 물로 닦아내니 마음까지 가벼워졌다. 지난 겨울 실내에 갇혀 추위를 피하던 화초들을 모두 내놓은 지도 벌써 보름. 개나리가 노오랗게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던 것은 지난 달 20일경이었던 것 같다. 일교차가 심해서인지 선인장은 다소 파리한 빛을 띠고 있었지만, 은행나무, 단풍나무도, 철쭉과 백화등도 연하고 보드라운 새 잎을 가만히 내밀고 있다. 그래서 4월을 ‘맑은 잎새의 달’이라고 하나 보다.
 
‘내 시간은 봄에 맞춰 있다’
 

꽃마리-"야생화 쉽게 찾기"에서

열어둔 창을 통해 보니 봄은 봄이다. 만발한 노란 개나리, 만개하기 시작한 연분홍의 벚꽃, 그리고 터지기 직전인 하얀 목련꽃, 봄꽃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3월 중순경 하천가를 거닐다 우연히‘봄의 정령’에게서 봄꽃 소식을 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하천 주변 풀밭을 뒤덮기 시작한, 파아랗고 작고 귀여운 꽃무리,‘봄까치’는 올해 처음 내가 만난 꽃이었다.

 
3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동네 아파트에서 매화나무가 흰 꽃, 분홍 꽃을 선보이기 시작하더니, 아파트 울타리 곳곳이 노란 개나리꽃으로 뒤덮히는 것이 아닌가! 마침 근처 햇살 좋은 동산에는 일찌감치 진달래의 연분홍꽃이 사태를 이뤄 깜짝 놀라기도 했다. 산 자락에는 이미 생강나무와 산수유의 노란 꽃들이 불꽃처럼 터지고 있었고, 하천가 버드나무는 겨울눈 털코트를 벗어던지고 연초록 이파리의 봄옷으로 푸릇푸릇해졌다.
 
4월초가 된 지금, 샛노랗게 눈부셨던 산수유꽃, 생강나무꽃도 퇴색되어 시들어 가고, 꽃을 잃고 잎을 달기 시작한 개나리도 하나 둘 늘어나는데, 가로등 근처의 벚꽃나무는 때이른 꽃들로 화사한 표정이다. 아파트 울타리 쥐똥나무도 새 잎으로 풍성하고, 아파트 정원의 목련은 잔뜩 부풀어 오른 새하얀 꽃망울로 환해졌다. 공원의 마가목과 꽃사과는 각각 연두빛과 붉은 빛의 여린 새 잎을 꺼내놓았고, 산길을 걷다 만난 잣나무와 소나무도 연두빛으로 물이 올라있었다. 또 하천가 풀밭의 누런 마른 잎 사이로 쏙쏙 고개 내미는 초록풀들은 바라만 봐도 흐뭇하다.
 
요즘 같은 봄에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내 주변의 자연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생긴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 키우는 화초, 창 밖의 가로수와 아파트 정원수를 보기 위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거나 볼 일 보러 밖을 나가 걷는 동안에 가끔씩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시간은 봄에 맞춰져 있다.
 
또 일교차가 심하다 보니, 한낮 외출 때는 봄햇살을 가리기 위해 챙 모자를 쓰긴 해도 가벼운 차림으로 가슴을 활짝 편 채 햇살을 즐기지만, 늦은 밤 공원이나 하천가로 밤산책을 나설 때면 눌러 쓴 털모자와 동여 맨 머플러, 그리고 겨울코트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바람을 피하느라 분주해진다. 그래서 실외에서는 봄날 하루 동안 사계절을 맞고 보내고 한다. 물론 난방을 하지 않는 실내에서는 봄햇살도, 서늘한 바람도 없어 밖과는 다른, 또 다른 계절을 사는 기분이다.
 
자연순환과 나이에 따라, 또 기후변화로 달라진 ‘시간체험’
 

개족두리- "야생화 쉽게 찾기"에서

우리에게 시간체험이란 이렇듯, 계절의 순환, 밤낮의 주기와 같은 자연의 변화와 함께 한다. 물리적 시계가 똑딱거리며 규칙적으로 흘러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연을 통해 생명체로서 체험하는 시간은 다르다. 그래서 매년 사계절이 똑같이 되풀이되는 듯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봄은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 봄꽃 피는 시기도, 황사의 횟수도, 봄비량도 다르다. 자연은 절대로 시계처럼 똑같이 반복하지 않는다.

 
또 내게 어린 시절의 봄과 중년이 된 지금의 봄은 분명 다르다. 봄 자체의 차이도 있겠지만 성장하고 노쇠해가는 생명체로서의 내 시간체험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봄날의 요란스러움이 싫어, 왜 봄이 계절의 여왕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 내게 봄은 봄꽃과 봄햇살로 눈부신,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아마도 더 나이가 들게 되면, 나는 봄마다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찬란한 봄을 향유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봄은 더욱 짧아지기만 할테니…. 이처럼 어린이의 봄과 노인의 봄이 같을 수는 없다. 비록 개개인의 시간체험 차이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런데, 우리의 봄 체험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 봄이 앞당겨지고, 봄의 흐름이 가속화되며, 봄이 짧아지는 등, 봄이 기후온난화로 놀라울 정도로 변화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역에 따라 그 변화의 속도와 양상은 또 다를 것이다.
 
이른 봄 하천가 산책길에서, 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물 속에 두 발을 담근 채 꼼짝 않고 있는 백로와 왜가리를 만나곤 한다. 그들은 여름 철새였지만, 어느덧 텃새가 되어 우리 동네에서 겨울을 나고 봄을 맞고 있는 중이었다. 이 멋진 새들을 동네에서 사계절 내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떤 동물은 자꾸 북으로 이동하여 새터를 잡아가는 반면, 또 다른 동물은 자기 터전을 잃고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마음 한 켠이 씁쓸하다.
 
이대로라면 10년 후 ‘경칩’때, 물가에서 개구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어, 아이들은 할 수 없이 자연사박물관으로 달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또 농부들에게는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청명’이 그 의미를 상실하고, ‘곡우’에도 봄비가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봄 체험은 과거 속에 묻혀 버리고 영영 봄을 맞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올까 두렵다.
 
어쨌거나, 화창한 봄날 오후, 나는 밖으로 마구 달려나가고 싶다. 곧이어 달려올 찜통 더위는 잠시 잊어 버리고 봄만 즐기고 싶다. 멀리서 들려오는, 뛰노는 아이들의 명랑한 목소리에도 봄기운이 잔뜩 묻어 있다. 이경신 일다는 어떤 곳? 
 
*함께 읽자. 송기엽·윤주복 <야생화 쉽게 찾기>(진선, 2008)


[철학하는 일상] 좀더 불편하면 지구가 살아난다 이경신  2009/03/30/
[철학하는 일상] 날마다 걸어보자 이경신  2009/03/16/
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 BlogIcon 실비단안개 잘 읽었습니다.
    그리 달갑지않은 블로그일텐데 엮인글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긴 목련은 지고 있구요, 개나리도 잎과 함께지요.
    명자나무와 박태기가 가장 활발합니다.

    들에는 - 자운영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소풍을 가야 하는 때니, 늦기전에 봄소풍을 가셔요.
    건강하시고요.
    2009.04.06 16:05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