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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을 누가 알겠나? 
 
부처님 오신 날, 만날 사람이 있어 친구와 오대산 월정사를 찾았다. 지난 겨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기다리는 동안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우산을 받쳐들고, 목도리도 동여매고 옷깃도 꽉 여민 채 절 마당을 서성거렸다. 잔뜩 찌푸린 저녁 무렵이었지만, 절 안은 마당 가득 매달려 있는 색색의 연등들로 오히려 봄꽃이 만발한 듯 화사하기만 했다. 그 사람은 월정사의 중심이라는 팔각구층석탑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을 직시한 이후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만나자마자 인사를 건네면서 난 그의 안색부터 살폈다. 다소 지쳐 보였지만, 작년 겨울보다 더 나빠 보이진 않았다. 작년 겨울에 이곳을 떠나면서 올 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긴 했지만, ‘과연 살아서 서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벌써 26년째 당뇨를 앓아 온 그는, 일주일에 세 번 신장투석을 받아야 하는 위중한 상태에 있다. 그럼에도 홀로 오대산 자락에서 지내면서, 매일 새벽 2시에 길을 나서 근처 절과 암자를 순례하며 예불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생활을 수년째 하고 있었다.
 
죽음을 직시하면 현재 삶에 더 충실해진다
 
“내일은 어디서 예불을 드리시나요?”라는 우리의 질문에 그는 “내일 일은 몰라요.” 라고 답했다. 내 기분 때문이었을까? 그의 대답은 ‘건강이 많이 나쁘니,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곧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형수의 절박한 삶과 그의 삶은 닮아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누구나 내일 일은 모르기 마련이다. 누가 자기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모두에게 미래의 시간은 예측 불가능하다. 이 예측불가능성 덕분에 우리에게 미래가 열려 있는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건 불만족하건, 다들 꿈과 희망으로 미래시간을 채우며 살아갈 수 있기에 삶이 더 살만한 것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이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도 미래를 계획하고 기대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죽음과의 거리가 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을지 알 수 없는 까닭에, 자신의 죽음에 무관심해지고 영원히 살 수 있듯이 살아간다. 하지만 사형수나 중병환자처럼 죽음이 임박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현재 순간’에 더 집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앞날을 기획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고 불가능하게 여겨지면서, 미래는 거의 닫힌 시간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건강한 자, 병든 자를 가리지 않는 것이 죽음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면, 미래를 열어두더라도 현재 삶에 집중할 수 있다. 이때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은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중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내 죽음의 현실성에 근접하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내가 내 죽음과의 거리를 좁히게 된 것도 잦은 잔병치레에 시달려 오다 심하게 앓으면서였다. 그때부터 난 ‘그래, 언제 죽을지 모르지. 언제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자’는 다짐과 더불어 진지한 노력을 시작했던 것 같다. 확실히 그 노력과 함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비록 미래를 풍성한 가능성으로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현재를 미래에 희생시키지 않고 현재 삶에 충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니까.
 
가까운 이의 상실이 두렵지만
 

정진홍의 저서 "만남, 죽음과의 만남"

누구나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여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기 직전까지 계속 우리를 따라다닐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나의 죽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새벽 2시에 숙소를 나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바로 이웃한 방에서 민박을 하던 우리는 새벽 2시가 조금 못돼서 갑자기 잠을 깼다. 그리고는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혹시 그가 저혈당 쇼크나 고혈압으로 인해 쓰러져 못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잠시 후, 옆방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물소리가 나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난 후에야 우리는 다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그날 밤의 불안감은 오래 전의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당뇨환자였던 내 어머니도 합병증으로 인해 신장기능에 문제가 생겨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투석을 받으셨다. 어머니의 상태는 나날이 나빠져만 갔고 수없이 응급실에 실려가며 생과 사를 넘나들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 당신은 물론이겠지만, 자식들인 우리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슴을 졸였다. 실제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난 꿈 속에서 셀 수 없이 어머니의 죽음을 맞곤 했다. 그렇게 어머니란 존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우리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이상, 그 관계의 매듭 하나를 상실할 때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특히 죽음으로 인한 관계상실은 더 그렇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듯이, 내 가까운 존재들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 비록 지금 그들이 건강하고 활기차다고 해서 죽음을 면제받고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지금껏 여러 차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에 빼앗기면서 내가 얻은 지혜가 있다면, 현재의 관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 죽은 경우에는 그 죽음의 여파를 좀더 빨리 헤쳐나올 수 있었지만, 잘 대해주지 못했던 사람을 잃은 경우에는 그 죽음이 그림자처럼 긴 시간 동안 달라붙어 내 삶을 어둡고 힘들게 했다.
 
‘좋은 삶’을 통해 ‘좋은 죽음’으로
 
사실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고는 해도, 살아있는 동안 생명체는 살고 싶은 욕망, 생명의 의지, 삶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죽음에 사로잡혀 삶을 등한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생명체라는 것 자체가 탄생과 죽음을 전제로 하는 존재인 만큼, 죽음을 직시하는 진지함을 견지하고 산다면 더 잘 살아낼 비결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또 좋은 삶을 살 때만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니….
 
아직도 병상에서 “죽음이 두렵다”고 고백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십 년 간을 앓아왔으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채, 끝까지 삶에만 집착하다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병든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이른 새벽 예불을 드리러 다니는 그 사람은 어머니와는 다르게, 초연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놀라운 의지력이야말로 생명에 대한 집착의 또 다른 표현일까?
 
아무튼 우리 모두 사는 동안에는 자기 의지를 최대한 발휘하는 동시에, 언제 죽어도 유감은 없다는 마음으로 살다가, 죽는 순간에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삶을 가벼이 놓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을 듯싶다. 또 그렇게 살다 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죽음이 덜 슬플 것도 같다.
 
이번에도 떠나면서 올 겨울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를 오대산 자락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내일 일을 어찌 알겠나…. 이경신 일다  

*함께 읽자. 정진홍 <만남, 죽음과의 만남>(궁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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