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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향해 걷기에 나서다
 
집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하천 길을 따라 걸을 때면 거의 언제나 ‘한강까지 23.5km’라는 작은 표지판 곁을 지나치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언젠가부터 그렇게 계속 걸어 한강까지 꼭 가봐야겠다는 소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매번 마음만 있을 뿐 ‘날씨가 너무 추워’, ‘비가 오는 날은 곤란하지’ 하며 날씨 핑계를 대거나, ‘시간이 안 나서…’ ‘도시락도 준비해야 하는데’ 하며 일상의 리듬 탓으로 돌렸다. 또 몸 상태를 이유로 장거리 걷기에 대한 자신감을 미리 상실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더 더워지기 전에 한강에 가자’며 결심을 굳히고, 아침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섰다. 낮에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쉴 생각으로. 계획대로라면 7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하천 길을 따라 걸으며 만나게 된 것들
 

"산책" © 박상은의 그림

아침 도시락을 배낭에 짊어지고 하천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시간에 하천 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놀랐다. 우선 마라톤 동호회, 사이클 동호회, 인라인 동호회 등 동호회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거나 줄지어 나름대로 질서 있게 지나가는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개별적으로 나와 조깅, 파워 워킹, 인라인 스케이트, 자전거 등의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스포츠를 즐기지 않더라도, 설렁설렁 느린 걸음으로 하천 가를 오가는 사람들, 주변에서 나물 캐는 아주머니들, 창이나 노래를 부르면서 자전거로 이동하는 할아버지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러 나온 가족들도 보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온 국민이여, 건강하라!” 소리치며 걷는 할아버지까지. 비록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더불어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을 일이 많다.
 
사람 구경으로 두리번거리기도 하지만, 하천 변에 만발한 빨간 토끼풀꽃, 노란 미나리아재비꽃 등 꽃들에게도 시선을 나눠주고, 날아다니는 나비를 눈으로 뒤쫓거나 하천에서 유유자적하는 백로, 터오리 가족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풍성한 자연이 내 눈과 귀, 마음과 머리 속을 가득 채워줘 행복한 느낌이었다.
 
콘크리트로 완전히 덮여있던 몇 년 전 하천 변에 비하면 확실히 시의 생태하천 조성 이후, 나무도 더 울창해지고, 풀도 더 무성해졌으며, 야생화의 가짓수도 더 많아졌다. 또 찾아오는 새들, 물고기, 그리고 곤충의 수와 종류도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길도 깔끔하게 포장되고, 길 주변에는 예술 조형물, 인위적인 화단, 농구코트가 생겨났고 이정표, 가로등, 벤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까지 갖춰 놓아 시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하천 길을 찾는 사람 수도 점차 더 늘어난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보니 생태하천 조성은 여전히 곳곳에서 진행 중이었다.
 
‘자전거 우선’, 보행자는 뒷전?
 
하지만 하천 옆길은 포장된 길이라 걷기에 이상적이지는 않다. 비가 오더라도 흙탕물이 튀지 않아 깨끗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리에 무리를 덜 주는 흙길을 걷는 편안함은 없다.
 
게다가 길 이용의 우선순위를 보행자보다는 자전거에 먼저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보행자 전용 산책길이 별도로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전거 통행로나 자전거와 보행자 공용 길로 설계되어 있다. 우리 동네만 해도 자전거 길을 보행자가 산책하고 있는 형편이라, 걷는 동안 정신을 놓으면 오가는 자전거나 사람들을 피하지 못해 부딪치기 딱 좋다.
 
도시 안의 길이 자동차 우선이듯이, 하천 갓길은 자전거 우선이다. 현대 도시 속에서 보행자는 건강을 위한 스포츠가 아니라면 1km 이상의 거리는 걷기보다는 교통수단에 의존하도록 권유 받고 있는 듯 하다.
 
조성된 하천주변도 마찬가지다. 보행자는 조금 걷다 앉아 쉬거나, 아니면 농구코트나 인라인 스케이트장과 같이 지극히 제한된 공간 속에서 움직이도록 유도를 당한다. 하천 가 곳곳에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는 주차장만 보더라도 내 느낌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 오래 걷기는 예외적인 일이 된 것이다.
 
아무튼 자전거를 경계하면서도,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길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걸었다. 한강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비록 자전거를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표지판이 있어 그 길이 한강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아파트 촌을 약간만 벗어나도 인적 드문 길 위를 걷고 있는 난, 마치 자전거 통행의 방해꾼이 된 듯싶었다.
 
하루 4시간씩 걸어다니는 도시인이 있을까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시리즈

우리 동네 하천 가를 벗어나서 또 다른 동네 하천가로 이어지는 길을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걷기를 시작한 처음 얼마 동안은 사람을 보다, 물을 보다, 꽃을 보다, 새를 보다 하느라 즐거웠지만, 어느 순간 그냥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햇살도 점차 뜨거워져갔다. 모자를 쓰고 양산도 펼쳤지만 따가운 햇살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하천 갓길에는 바라볼 나무는 있어도 햇빛을 가려줄 나무는 없었다. 그나마 조성된 하천길이라 중간중간에 벤치와 지붕이 마련된 휴식공간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도시에서 걷기가 1시간을 넘어선다면, 더 이상 일상적인 일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늘날 소로우처럼 하루 4시간을 일상적으로 걸어 다니는 도시인이 있을까? 아무튼 일상적 리듬을 벗어나는 오래 걷기는 단순한 공간이동의 개념을 넘는 것이 분명하다. 다른 공간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시간과 노력을 덜 들일 수 있는 교통수단이 넘쳐나니 말이다.
 
천천히 오랜 시간을 걷다 보면, 주변의 자연풍경에 매혹되어 일상을 잊기도 하지만, 저도 모르게-비록 파편적이긴 해도- 생각에 잠기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주변조차 잊게 되기도 한다. 생각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러다 다시 내 시선은 자연풍경 너머 답답한 아파트 촌에 꽂히고 귓전을 파고드는, 하천 건너편에서 달리는 자동차 소음과 더불어 다시 도시의 현실로 되돌아온다. 장시간 계속되는 걷기로 인한 근육의 피로는 다시 나를 밖에서 안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색에 잠기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의 느리게 걷기는 현실과 몽상, 세상과 나, 내 몸과 의식, 정서적 움직임과 지적 사색이 서로 교차해 나가는 독특한 경험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생각 자체까지도 놓게 하고 침묵과 더불어 자기존재 자체도 망각하게 한다. 거기 그냥 살아 움직이고 있는 존재가 있을 따름이다.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5시간이 넘어갈 즈음이었다. 이미 주위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지고 생각도 없어지고 다리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열기로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16km를 넘게 걸었지만 한강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수 킬로미터. 일단 걸음을 멈추고 그늘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할까? 시계도 정오를 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견디기 어려운 더위였다. 게다가 배도 고팠다.
 
‘그래, 이 정도로 되었다.’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도시에서 하천을 따라 원하는 만큼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확인하는 일과 오래 걷기를 만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도시 하천을 따라 오랜 시간 걷는 것은 쉬운 일도, 생각만큼 유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운 걷기였다.
 
*함께 읽자.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느림, 비움, 침묵의 1099일> 1-3권 (궁리, 2003)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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