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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에서 논의 중인 ‘임신중지’와 재생산권 이야기들
성과 재생산 포럼 <배틀그라운드> 출간 기념 북토크
지난 5월 24일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우리 헌법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한 공개 변론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올해 안에 위헌 판결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올해 8월, 헌법재판소 5기 재판부는 임기를 한 달 가량 앞두고 ‘낙태죄’ 위헌 여부를 차기 재판부로 넘기기로 했고, 끝내 판결이 나오지 않은 채 2019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헌법재판소가 무심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여성들은 멈추지 않고, 지치지 않고 광장으로 나와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계속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11월 29일부터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주관)가 시작되어, 겨울의 세찬 바람을 맞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백영경 이유림 윤정원 최현정 外 공저, 후마니타스) 표지 이미지 ⓒ후마니타스
그 뿐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를 비롯해 일부 종교계에서 지난한 세월 동안 ‘생명 vs 선택’이라는 구도로 ‘낙태죄’를 논의하는 동안, 여성들은 이 구도가 허구적임을 지적하고 ‘낙태죄’ 폐지를 넘어 재생산권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왔다.
성과재생산포럼이 기획하여 펴 낸 <배틀그라운드>는 법적, 보건의료적,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재생산권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와 관련한 많은 논쟁들을 소개하는 한편, 앞으로 한국 사회는 무엇을 변화시키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꼼꼼하게 담아낸 책이다.
“낙태죄라는 것이 단지 여성의 생애 한 대목에서 일어나는 임신중단이라는 행위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며,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시민 사이의 위계 재생산과 정상적인 삶의 규정을 둘러싼 싸움터였다”(책 프롤로그)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이 책에는, 필자들의 깊이 있는 연구와 고민의 결과가 녹아들어 있다.
현장 활동과 연구를 오가며 책을 집필한 필자들이 최근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재생산권 관련한 소식들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여 찾아가보았다. 22일(토) 창비 서교빌딩 50주년기념홀에서 열린 <배틀그라운드> 출간 기념 북토크 “배틀그라운드 월드와이드”에서 발표된 내용을 전한다.
▶ 2018년 세계 인공임신중절 허용·금지 현황. 빨강은 전면 금지 혹은 산모의 생명이 위급한 경우만 허용, 주황은 건강상의 사유로 허용, 노랑은 사회경제적 사유로도 허용, 초록은 사유 제한 없이 허용. ⓒ출처: worldabortionlaws.com
세계 주요 재생산권 의제로 떠오른 ‘약물적 임신중지’
올해 8월, 페미당당 주최로 ‘낙태죄’ 폐지 촉구와 함께, 경구용 알약으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미프진’(미페프리스톤) 도입을 주장하며 125명의 여성이 알약을 먹는 퍼포먼스(참가자 중 1명이 미프진을 복용했으며 나머지는 비타민 알약 복용, 125명은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추정한 하루 평균 인공임신중절 수술 여성 3천명을 24시간으로 나눈 숫자임)가 서울 보신각 앞에서 진행돼 화제가 되었다. 이미 국내에서도 약물적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와 경험담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고, 미프진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9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안전한 인공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위한 국제캠페인’(International Campaign for Women’s Right to Safe Abortion) 포럼에서는 “약물적 임신중지가 주요 의제로 논의되었다.”
이 포럼에 참석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은 “그만큼 약물적 임신중지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그에 반해 법과 사회적 인식, 보건의료 체계가 그걸 따라가지 못하고 예전 방식으로 남아 있는 탓에 약물적 임신중지가 음성화되거나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해 대처하지 못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올해 9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안전한 인공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위한 국제캠페인’(International Campaign for Women’s Right to Safe Abortion) 포럼에 참가한 결과를 발표하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일다(박주연)
이렇게 약물적 임신중지를 통한 자가임신중지가 늘어남에 따라 “스스로 관리하는 임신중지, SMA(self-managed abortion)라는 개념 또한 주목 받고 있다”고 한다. 나영 센터장은 “단지 의료적 맥락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약물의 사용, 관리, 공급 등을 포함해 임신중지를 스스로 관리하는 맥락으로 만들어가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SMA가 ‘우리끼리 약 먹고 관리하자’는 걸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약만 먹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 전후로 보장되는 체계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관리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낙태죄’가 폐지된다 하더라도, 임신중지와 관련된 규제가 어떤 방식으로 행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SMA는 단지 약물로 임신중지를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나영 센터장은 “정부가 다양한 규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료행위자가 종교적 신념을 근거로 시술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임신중지를 막으려는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 등” 우려되는 상황을 나열했다.
이어 “우리 스스로 임신중지에 대한 통제 능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임신중지가 가능한 것 이상으로, 그걸 ‘권리’로 인지하고 사고하는 것”에 대한 인식과 논의가 국내에서도 확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낙태가 죄’라서 보건의료계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지금 ‘낙태’가 죄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보건의료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윤정원 여성위원장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며 올해 세계산부인과학회(FIGO)에 참석하여 보고 받았던 우루과이의 사례를 공유했다.
우루과이는 2012년 임신중지가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그 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모성사망률을 낮추고자 운동해 온 의사들이 임신중지에 대한 논의를 끌어왔다고 한다.
▶ 올해 세계산부인과학회(FIGO)에서 발표된 우루과이 의료인들의 사례를 공유하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윤정원 여성위원장 ⓒ일다(박주연)
임신중지가 불법이다 보니,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불법의료인에 의한 불법시술, 다양한 방식의 자가임신중지, ‘미프진’(미페프리스톤) 약물 사용 등의 실태를 지켜보던 의사들은 단지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대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약물을 사용한 환자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어떻게 이 약물을 쓰는 게 더 안전한지 등의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케이스들을 모아 역학적 자료를 수집했고, 그 자료를 데이터화해서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등을 파악했다.
또한 임신중지 이후 의료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 합병증을 관리한다든지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일도 진행했다. 우루과이의 의료인들은 “임신중지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임신중지를 하게 하는 원인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며 “여성이 최선의 신념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의료진의 책무이고, 국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 책무가 있다”는 기조를 가졌던 거라고 윤 위원장은 설명했다.
윤정원 위원장은 우루과이 사례에서 “(임신중지) 금지에서 비범죄화로 가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며, 보건의료인들이 임신중지 문제에 대해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그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강의 정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보건의료계에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역할로 꼽았다. 한국의 모자보건법 14조는 ‘보건의학적으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인공임신중절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에선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도 건강의 정의에 포함시킨다. 윤 위원장은 이런 부분들에 “더 많은 보건의료인들이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40년전 임신중지 합법화됐어도 재생산권 운동은 ‘진행형’
한국 사회도 ‘낙태죄’ 폐지 이후를 내다보면서, 여성의 성과 재생산권을 둘러싼 정치적 방향을 정비하는 과제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류민희 변호사가 전한 프랑스 사례는 이러한 점에서 유용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 재생산권 운동을 하는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단체 ‘르 플래닝 패밀리얼’(Le Planning Familial)을 방문한 이야기를 발표하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류민희 변호사 ⓒ일다(박주연)
류민희 변호사는 프랑스의 ‘르 플래닝 패밀리얼’(Le Planning Familial)이라는 단체를 방문하여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이 단체는 초기에 ‘가족계획’이라는 다소 보수적인 프레임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현재는 페미니스트 단체이자 재생산권 운동 단체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1975년 ‘베이유법’으로 임신중지가 일찌감치 합법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성과 재생산이 자유로워진 건 결코 아니었다고 ‘르 플래닝 패밀리얼’ 활동가들은 말한다.
“여전히 그냥 주어지는 건 없고, 여전히 반동의 흐름이 있으며, 그렇기에 아직도 투쟁 중”이라고 얘기하는 그들은 임신중지 합법화 이후에도 끊임없는 제한(피임 정보 광고 불법, 제한된 성교육, 인공임신중절시술 관련한 제한 등)과 마주해야 했으며, 그걸 운동을 통해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야 했다.
그 결과 “피임과 임신중지에 머물렀던 활동은 점점 여성의 자기결정권, 정보접근법, 반차별법, 반성폭력 운동, 성교육, 여성노동권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과의 연대”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영역과 주제가 여성의 성과 재생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세계 이주민의 날’에는 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주민 여성들의 성과 재생산권에 대한 성명서를 냈다. ‘르 플래닝 패밀리얼’의 사례는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 운동이 어떻게, 어디까지 파고들고 진화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북토크가 끝나고 각주 하나하나, 용어 설명 하나하나 꼼꼼히 봐야 할 만큼 중요한 정보들이 차곡차곡 쌓인 책 <배틀그라운드>를 읽으며, 여성의 성과 재생산권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2019년, 다가오는 새해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과 더불어 여성들에게 조금 더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길, 그래서 우리 사회가 여성의 성과 재생산에 대해 더 많은 논의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때에 이 책 <배틀그라운드>는 분명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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