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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실 안에선 여자, 남자 없이 그냥 조종사다”

민주노총 ‘젠더 이분법을 뭉갠 언니들’ 집담회 



“우리 사회의 여성노동자들에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다, 유리벽이 있다’고들 하잖아요. 사실 제가 보기엔 유리가 아니라 ‘콘크리트’에요. 그런데 그 단단한 콘크리트를 깨고,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저녁 6시 30분, 경향신문사 2층 자희향에서는 “성별임금격차 해소, 성별분업 해체-젠더 이분법을 뭉갠 언니들!”이라는 제목의 집담회가 민주노총 주최로 열렸다. 사회를 맡은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네 명의 여성노동자 패널을 ‘콘크리트를 깬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대한항공 내 조종사 3천여 명 중 이제 갓 30명을 넘겼다는 1%의 여성조종사 중 한 명, 10번째 여성조종사로 입사했다고 하는 조은영 대한항공 부기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콘크리트를 깼다는 말이 허투가 아니었다.


▶ 11월 30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성별 임금격차 해소, 성별 분업 해체-젠더를 뭉갠 언니들’ 집담회. 이숙경 서울교통공사 기관사, 남한나 건설노조 형틀목수 반장, 조은영 대한항공 부기장, 황지선 현대자동차노조 여성실장 ⓒ일다(박주연 기자)


다른 패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을 운전하는 기관사로, 이름조차 생소한 형틀목수로, 커다란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낸 이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일’이라고 치부 되는 탓에, 그 존재 자체가 생경하게 느껴지지만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일도 ‘자~알’ 하면서 말이다.


이숙경 서울교통공사 기관사, 남한나 건설노조 형틀목수 반장, 조은영 대한항공 부기장, 황지선 현대자동차노조 여성실장. 이 여성들은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까? 어떤 과정을 거치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집담회에서 하나, 둘 풀리기 시작했다.


성별화된 직종, 압도적으로 적은 여성의 수


“철도 100년 역사상 여자는 너희가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던 서울교통공사 이숙경 기관사는 이제 23년 경력의 베테랑 기관사다. 줄곧 서울 지하철 5호선 운전해왔다는 이숙경 기관사는 출산 후, 당시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입사했다. 그의 입사 과정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남편이 기관사에 지원하려고 원서를 가지고 왔었어요. 혹시 쓰다 실수할 까봐 한 장을 더 가지고 왔었는데, 원서가 남으니까 남편이 ‘너도 한번 지원해 볼래?’ 하더라고요. 모집 요강에 ‘승무’라고 되어 있어서 당연히 차장인 줄 알고 접수를 했는데, 기관사를 뽑는 거였던 거죠.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기관사에 지원하게 되었어요.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독서실에서, 저는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이 데리고 공부를 했는데, 남편은 떨어졌어요. 또 제가 남동생한테도 지원하라고 해서 남동생도 지원했는데, 다 떨어지고. 저만 된 거죠.”


당시 공채로 뽑힌 3백 명 중 여성은 단 8명, 그 중 2명은 연수 과정에서 그만두고 최종 남은 건 6명이었다. “2012년까지 여성 기관사는 총 13명 있었고, 현재 야근 가능한 여성기관사들까지 포함하면 30명이에요. 지금도 1백 명 정도 후배들이 연수원에 들어가 있는데 그 중 여성은 5명인 걸로 알고 있어요.” 23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기관사의 숫자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건설 현장과 자동차 공장, 그야말로 ‘남성’의 얼굴로 대변되어 왔던 그곳에도 여전히 여성의 수는 부족한 상황이다. 형틀목수로 일하고 있는 남한나씨는 “보통 한 팀당 인원이 15~20명인데 여성은 아예 없거나 1명 정도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자신이 건설기능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당시보단 조금 여성이 비율이 늘어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수업에 20명 정도 들어오는데 여성은 1명이었어요. 그래도 요즘 가서 보면 2~3명 정도로 늘어난 것 같긴 하더라고요.”


현대자동차에서 일하고 있는 황지선 현대차노조 여성실장은 “남성조합원이 2만 8천명인 것에 비해 여성조합원은 580명 정도로 약 2% 조금 넘는 실정”이라고 말하며, “제가 속해 있는 그룹 38명 중에 여성은 저 1명 뿐”이라고 설명했다. 10%는커녕 한 자리 숫자에 머물러 있는 비율인 거다.


▶ ‘성별 임금격차 해소, 성별 분업 해체-젠더 이분법을 뭉갠 언니들’ 집담회 포스터. ⓒ일다(박주연 기자)


‘오빠라고 불러…’ 작업장의 성차별과 성희롱을 겪으며


이들의 직업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할 수 있다’고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네 명의 패널 모두 자신의 직업을 예전부터 꿈꿨던 건 아니다.


조은영 부기장은 중동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다 학교 생활을 다시 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뒀다. 미국 친척집에 머무르다 경비행기 운전 자격증을 따고 싶은 마음에 도전했다가, 엔진이 두 개 달린 대형비행기 운전 자격증까지 따게 되었다. 자격증 따는 데만 2년이 걸렸다는 그는 사실 이런 투자나 결정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자격증을 획득한다고 항공사 조종사가 반드시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끝까지 하기 사실 어려워요. 그리고 만국 공통인 것 같은데,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엔 부모님들이 (딸이 조종사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한데, 그게 미약하다 보면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들이 많아요.”


아들과 딸이 있는 경우 알게 모르게 아들을 더 지원한다거나, 딸만 있는 경우에도 ‘결혼비용’을 남겨둬야 한다며 딸의 학습이나 취업준비 비용을 아낀다는 이야기는 흔한 스토리 중 하나다. 여전히 여성들은 취업준비에서부터 부모의 격려와 지원을 덜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힘들게 취업이 되었으니 즐거운 직장 생활이 시작되면 좋으련만, 굉장히 드물게 존재하는 여성노동자로서의 역경은 계속이었다. 현대자동차에 비정규직으로 2001년에 입사해 16년 일하고, 작년에 정규직으로 전환된 황지선 실장은 “비정규직으로 입사했을 땐 제대로 된 직업훈련조차 받지 못했다”고 했다. “눈치 보며 어깨 너머로 배우거나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스스로 터득해야만 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황지선 실장은 “입사했을 때 한 남성 동료가 ‘형이라고 부르면 1%만 도와주지만 오라버니라고 부르면 10%, 오빠라고 부르면 50% 혜택이 있다’고 했는데, 도저히 ‘오빠’ 소리가 안 나왔다”고 털어놨다. 남성이 절대적으로 다수인 노동현장에서 동료가 아니라 ‘여성’임이 강조되고, 그것이 성희롱으로 연결되는 현실의 부당함을 지적한 거다.


남한나 목수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다. “남성들이 와서 친한 척하며 ‘오빠라고 불러라. 오빠랑 술이나 한잔 먹자’ 이런 얘기도 하고. 남성들끼리 모여 여자 얘길 주로 하는데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며 여성으로서 직장생활에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했다.


남자화장실 써라, 진급은 남자에게 ‘양보’해라


실질적인 시설이나 제도도 여성노동자들을 배제시키고 있다. 여성의 수가 적다는 이유로 화장실, 샤워실, 휴게실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부족하고, 아니면 그냥 남성들과 공용으로 써야 한다.


“방화 차량기지 검사고에 여자화장실 생긴 지가 몇 년 안돼요, 한 3년 전인가? 여직원들이 그냥 남자화장실을 이용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리동 화장실까지 가야 했어요.” 이숙경 기관사는 시설도 시설이지만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제도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던 현실도 지적했다.


“입사했을 때 대부분이 23,24살이었어요. 입사 후에 결혼하고 임신을 했는데, 임신한 여성기관사에 대한 규정 자체가 없었어요. 그래서 임신한 상태에서 운전을 계속하다가 자연유산을 하는 일이 생기고, 결국 세 번째 자연유산한 기관사가 생기고 나서야 진단서를 떼서 회사에 얘길 하면 운전을 안 하고 조금 경미한 업무를 하는 걸로 변경되었어요.”


여성노동자의 기본적인 건강권에 대한 인식이 없던 회사는 진급에 있어서도 여성들의 양보를 요구했다. “제가 공채 1기인데 4기 남자 후배들이 진급할 때까지 전 진급이 안 되었어요. 그들은 ‘가장’이니까 양보하라고 하더라고요.” 


▶ ‘성별 임금격차 해소, 성별 분업 해체-젠더 이분법을 뭉갠 언니들’ 집담회에서. ⓒ일다(박주연 기자)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라는 건 통념일 뿐


일터에서조차 동료가 아니라 ‘여성’으로 인식되고, 극소수 구성원인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겪으면서도 네 명의 패널들은 멈추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일을 해 오고 있다. 각자 다른 계기로 일을 시작했지만, 다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일을 시작한지 갓 1년을 넘겼을 뿐인데 “도면과 현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팀장에 의해 반장으로 발탁된 남한나 목수는 “건설현장이라고 하면 다들 남성만 생각하는데, 이 안에 들어오면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며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소수의 여성노동자만 현장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여성들이 와서 일을 하면 환경도 많이 바뀔 수 있을 거고, 우리의 편의시설이나 휴게 공간 등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패널들도 ‘자신의 일을 다른 여성들에게 추천하고 싶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다들 “그렇다”고 답했다. 조은영 부기장은 “사실 조종사가 되기까지 과정을 생각하면, 그 과정이 길기도 하고 수많은 훈련과 시험이 있기 때문에 도시락 싸들고 말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고 하면서도 “하지만 일을 시작해 보니까 이 일은 여자/남자로 나눠지는 직업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사회가 ‘이건 여자 직업, 이건 남자 직업’이라고 하는 것과 ‘내 스스로가, 내가 여자니까 안 돼’라고 하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여자로서 드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라고 해서 특별히 힘이 드는 일이 있었던 건 없어요. 어린 여성들이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여건이 되면 해 보라고 하고 싶어요.”


“조종실 안에선 여자, 남자 없이 그냥 조종사일 뿐이다”라고 한 조은영 부기장의 말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숙경 기관사 또한 더 많은 여성후배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23년 전, 처음 기관사가 되어서 운전할 때 승강장에 있는 승객들이 놀라서 쳐다보더라고요. ‘앞으로 괜찮아지겠지’ 싶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승객들이 놀래요. 여자후배들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같이 일하고 싶고 같이 고민하고 싶어요. 이게 전혀 남자 일이 아닌데, 남자 일/여자 일 나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회가 이렇게 규정지어서 밀고 나가는 모습이 좀 너무 안타까워요. 기관사라는 직업을 여성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고, 여성들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패널로 나온 여성노동자들은 입 모아 “여성들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그 말의 증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별화된 직군에서 여성노동자의 비율은 고작 한 자리수 비율에 머물러 있다. 이걸 타파하기 위해선 소수의 여성들이 분발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민주노총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성차별적 제도 개선 및 정책 제안을 하기 위해서”라 설명했다. 더 많은 ‘새로운 언니들’이 사회에서 규정한 ‘성별 이분법적 일자리’를 뭉개고 능력을 펼칠 수 있으려면, 집담회에서 패널들이 제기한 문제들이 하루 빨리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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