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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만한 여자’ 되길 때려치우는 중

<이상성욕자? 선량한 변태들의 목소리> 4화


※ 음란함, 이상함, 혹은 폭력적이라는 선입견의 베일에 덮인 채 야동을 비롯한 미디어에서 왜곡된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는 bdsm에 관하여, 기록노동자 희정 님이 성향자들을 만나 다른 목소리를 담은 기록을 4회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그 순간 파트너 눈만 바라봐도 전희를 통해 갖는 쾌락과 맞먹는 만족감을 느낀다는 걸 알았을 때, 아 나는 맞구나.”


분홍마늘은 지배성향이 맞다. 자신이 생각하는 bdsm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니 “둘 사이에 하는 가장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답한다. “게임?” 나는 반문했다.


“둘이서 가장 재밌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닐까요? 서로가 이 관계에서 만족을 느끼고 즐기면서도, 동시에 둘 중 누구나 그만 할래 라고 하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관계. 플레이 중에서 가장 주체적인 행위가 아닐까 해요.”


성적 만족감을 넘어서


▶ 저스툰에서 연재 중인 장미 작가의 <어차피 인간은 다 변태야> 중 한 장면. 도미넌트 장미와 서브미시브 백구의 관계를 다룬 웹툰이다.


혼자 하는 게 아닌데, 두 사람간의 관계가 게임 플레이어처럼 평등할까? 살짝 의심이 들었다. 나는 ‘여자들은 그렇게 맘 놓고 관계를 가질 순 없다’고 말해버린다. 왜? 위험하니까.


자신을 남성이라고 말하지 않는 분홍마늘을 앞에 두고, 굳이 ‘여자’를 운운하려니 목이 메긴 했다. 분홍마늘은 지정성별 남성이지만 논바이너리(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남성이라 표현되는 성별을 가진 사람과 관계 맺는다.


“저도 강간당할 것을 걱정해요.”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가질 때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사람과 만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니, 체격 차이라는 위험요소라도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강간왕국. 연재 내내 위험과 안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기획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인터뷰를 한 성향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가 ‘위험’이다. 마늘이 말한 ‘주체적인 행위’는 위험을 동반한다. 그 이유는 앞선 연재에서 살펴봤다.


안전을 걱정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자신의 성향을 표현한다.


“항상 붙어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아람은 도미넌트-새디스트(지배-가학) 성향자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아 되물었다.


“이성애 사회에서 연애를 떠올릴 때 이성(남자/여자)이 붙어있듯? 섹스를 떠올릴 때 삽입이 따라오듯?”


아람은 동의한 뒤 덧붙였다. “이만큼 만족을 주는 건 없어요.”

성감대의 만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억눌려 있을 때는, 날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이랑 잘 못 지냈어요. 욕구불만이 쌓이는 거죠. 그런데 하나를 트니까, 다른 것들도. 점점 나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된 거죠. 다방면으로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어요.”


행위의 주체되기와 젠더


몸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다. 그리고 표현한다. 이 말은 마조히스트 푸잉에게서 들었다.


“그 전까지 나는 관계에서 수동적이어도 되는 포지션. 이유를 생각해보면,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데 bdsm을 시작한 후로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원하지 않는지, 나부터 알고 있어야 하는. 그걸 모르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는 거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침대에서만 하는 생각이 아니다. 일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중심으로 들어왔다. 그네들은 행위의 주체인 자신에 대해 말했다. ‘위험’보다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단어는 ‘나’였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러나 세상은 ‘그녀’들이 행위의 주체임을 좀처럼 믿지 않는다. bdsm 성향자들, 특히 푸잉과 같은 마조히스트(피학 성향) 여성은 ‘감금된’ ‘병든’ ‘매 맞는 아내’ 정도로 취급된다. 그래서 여기까지.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려 한다. 선입견을 내려놓지 않는 이들은 어차피 무슨 말을 더 하든, 이들이 ‘즐거운 변태’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보다는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이들이 자신을 어느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는지를 말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 한 여성의 피학적-성적 욕망을 집요하게 그려낸 영화 <피아니스트>(미카엘 하네케, 2001) 포스터.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이 영화의 원작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대표작 <피아노 치는 여자>다.


탐탁지 않은 플레이


“문란한 게 왜 부끄러운 일이죠?” 자신을 즐거운 변태라 칭한 아람이 물었다. 세상을 향해 물은 게 아니다. 자신과 파트너에게 하는 질문이다.


인터뷰할 때 체위나 플레이 방식은 질문 목록에 넣지 않았다. 여자와 여자, 혹은 남자와 남자가 사랑할 권리에 관심 갖는 것과 성교의 방법에 관심 갖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니까.(동성애 혐오세력은 게이의 괄약근까지 걱정해주지 않나. 친절하기도 하지.) 그럼에도 종종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로 나온 소재는 ‘수치플’.


수치플은 수치를 주거나 당하며 쾌감이나 만족을 느끼는 플레이인데, (경우마다 다르지만) “음란”, “걸레”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즐기기도 한다. 사회가 문란한 여성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가 고스란히 사용된다.


“아, 관성을 엎어버리기가 쉽지 않네요.” 새디스트 아람은 본인이 흉내 내다가도 이상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아람의 지정성별은 여성이며, 양성애자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럴 때 수치심을 느끼도록 배우잖아요.”


여성들은 음란, 그러니까 자신의 몸과 성애를 알고 즐기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배운다.  그리고 세상은 bdsm 성향자에게 ‘음란’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건전한 우리’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음란의 낙인을 부여받은 행위자들이 개인공간으로 가서 그 표현을 다시금 사용한다. 차별과 위계의 관성이란 이토록 강력하다.


지정성별 남성간의 행위에도 비슷한 일은 벌어진다. 상대를 여성처럼 대하는 플레이도 있다. 분홍마늘은 성별 위계가 “현실에 가장 만연하고 차용하기 쉬운 권력”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bdsm은 서로간의 권력 차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즐기는 플레이인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젠더권력인 거죠. 그래서 플레이 안에서 손쉽게 흉내 내어 버리는 거고.”


군대(선임과 후임), 학교(선생과 학생), 감옥(간수와 죄수) 등 이 사회에 익숙한 권력관계를 흉내 내는 플레이들이 있다. 익숙한 위계. 손쉽게 상상되는 권력. 흉내가 가능할 만큼 익숙한 권력의 불균형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 중 성별을 둘러싼 위계는 역사가 깊고 강력하며 우리 가까이 있다.


분홍마늘은 이런 방식의 플레이가 영 탐탁지 않다. 하지 않는다.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사회적 차별을 반영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평범한’ 섹스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이 침대에서 내내 부끄러워(하는 척)하고, 파트너의 사정은 알지만 나의 만족은 모르고, 상대방 심기를 거스를까봐 콘돔 착용을 요구하지 못 하는, 모든 행위가 젠더 위계와 차별을 반영하는 중이다.


“기존의 편견적인 이미지를 환기시켜서는 단순한 만족을 넘어선 가치를 만들어낼 수는 없어요.”

마늘의 말에 동의한다만, 의문이 든다. 여기에 무슨 ‘가치’를 만들고 싶다는 걸까?


이성애중심 사회의 파수꾼은 안 될래


분홍마늘은 이성애중심 사회를 비껴간 인물이다. (지정성별) 남성의 몸으로 남자와 연애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성애 규범에 따른다는 것은, 상대에게 이성으로 보일 외모를 하고 그에 따른 노동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에 맞는 나이각본도 준수해야 한다.(꽃다운 나이, 결혼하고 어른이 될 나이 등) 단순히 말해, 여자는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돌본다. 남자는 밖에 나가 벌이를 하며 가정을 지킨다. (실제가 아닌 환상일지라도) 이러한 분업과 노동이 이성애 사회를 유지시킨다.


분홍마늘은 이성애중심 사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길 거부했다. 그렇기에 ‘둘이 하는 재미난 게임’인 bdsm 관계에 이분법적인 성역할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가치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이들은 기존 세계의 질서를 의심한다.


“처음에는 반항하는 마음으로, 그래 나 비정상이다. 나중에는, 너희들이 나 비정상이라고 하지만 난 그래도 행복할 거야.” 즐거운 변태라고 자신을 표현한 아람의 말이다. 처음에는 오기였지만, 점차 ‘정상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비정상이라는 게 대체 뭔데? 페미니즘을 접하고, 인권운동을 접하면서 ‘세상에 정상이 어딨어?’ 라고 묻게 됐어요. 사회가 말하는 ‘정상’이라는 틀에 온전히 속하는 사람이 있긴 한가? 정상성이라는 거 허상이야.”


▶ 베를린의 BDSM 공동체 Schwelle 7 멤버들이 "당신에게 슈벨라 지벤이란?"이라는 물음에 답하는 영상 중에서. 다양한 멤버들이 BDSM과 이 공동체에 대한 예찬을 펼치는데, 다수가 여성이다. (출처: 유튜브)


편한 옷의 옷장


그럼에도 ‘정상’ 옷을 입어야 한다. 제리(도미넌트-새디스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옷장을 봤을 때 100% 남자 옷으로 채워진 옷장은 없잖아요. ‘여성’적인 옷도 있고 유니섹스한 옷도 있고. 그런데 옷을 입는 건 결과적으로 본인이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이 그 옷을 입는 게 편하다는 거죠.”


편하다. 누군가 알게 된다면 만류할 라이프 스타일일지라도. 제리는 bdsm을 ‘성애’라 부르는 것을 반대한다. bdsm은 섹스로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 섹스가 있고, 감정이 있고, 관계가 있다. 삶의 방식이라 했다. 한평생 삶을 불편하게 살 수는 없다.


bdsm은 삶의 방식 문제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푸잉에게는 ‘나라는 여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일이었다.


“예전에 저한테는 ‘그런 여자’랑 ‘그렇지 않은 여자’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할 때 그런 여자.”


‘그런 여자’란, 세상이 ‘여성’의 속성이라 부르는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들을 가리켰다. ‘그렇지 않은 여자’라는 규범이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bdsm 파트너와의 관계를 고민하면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파트너와 애정을 쌓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고 했다. 이전 연애에서 상대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자신은 애교, 배려, 다정함을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들의 총합은 “남자가 결혼해도 될 만한 여자”였다.


“그 순간 깨달은 거죠.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아무리 해도 (성향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는) ‘남자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는 못 끼는 거죠.”


정조와 정숙이라는 단어가 비웃음을 당하는 시대이지만, 그 유령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아니다. 결혼을 통해 지배체제로 들어갈 수 있는 여성은 정해져 있다. 1화에서 ‘비(非)처녀’를 언급한 부분이기도 하다. 세상은 자기 욕구를 드러낸 여성에게 ‘가정’으로 들어올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가 있을 곳은 가정이라 믿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족 구성은 사회의 성원권과 연결된다. 가정을 통과해야 공적 공간에서도 설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여자는 그 자체로 ‘우리(성원)’가 될 수 없다. ‘내 여자’의 자격으로 ‘우리’에 포함된다. ‘나의’ 아내와 ‘내 자식의’ 어머니가 될 만한 ‘깨끗한’ 여성의 이미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성성 수행은 그만하기로


푸잉은 실망했을까? 그런 것 같진 않다. 

“그런 저런 여자 같은 건 안 하기로 했어요.”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푸잉은 세상이 ‘정해둔’ 여자 같은 것은 안 하기로 했다. 사회가 학습시킨 방식으로 남성에게 존중받으려 해봤자, 그 존중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을 자격(?)을 갖추려 애쓰면서까지 이 사회의 성원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더러운 여자’가 되기로 한 것일까.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저, 문학과지성사)에 따르면, 오염된 대상은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순백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회가 “죽일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그래서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타자”. 푸잉은 이 사회의 ‘타자’가 되기로 했다.


푸잉과 인터뷰를 통해 만난 성향자들이 뭐 그리 대단한 ‘그런 여자’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통제와 지배의 다른 말로 쓰이는 정상성 규범에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규범을 유지시키는 권력과 차별을 좇는 일을 ‘때려치울’ 뿐이다.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하기


모두, 어떻게 안전해질 것인가. 연재 초입에 이 질문을 하며 ‘위험한 성’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러다 스스로를 타자로 위치 짓는 이들을 만났다. 쫓겨났거나 (들키면) 쫓겨날 이들. 이미 세상에 의해 타자화된 이들이 스스로를 다시금 타자로 선언하고 운동장으로 들어오길 거부한다. 그 정상성과 이성애중심의, 시시콜콜 위계화된 운동장 자체가 별로라면서 말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들어가길 거부하는 이들 앞에서 미끄러질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래서 어떻게 안전해질 것인가 하는 물음을 그만둔다.


사실 질문이란 무서운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우리를 무리 속으로 몰아놓고, 우리가 무리로부터 벗어날라치면 물어뜯는” 질문이 있다고 했다.(<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창비) 그런 질문은 세상이 늘 하고 있다. 우리에게 어디에 설 것인지 묻는다. 우리의 위치성을 묻는다. 저 기울어진 운동장 어디쯤 설 것이냐고. 그리고 ‘비처녀’가 될 것인지, ‘아가씨’가 될 것인지, 또는 ‘그런 여자’는 아닌지, 묻는다.


우리는 위험 밖에 존재하고 싶다고 대답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아쉽게도 없다. 위험은 특정한 공간만 점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각도에 따라 저마다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 각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통제의 질문을 받은 리베카 솔닛은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할 줄 아는 자”를 이야기했다.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그러니까 통제의 질문에 통제당하지 않음으로 맞서는 응답들.


현실이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 (어디서든) 강간은 여전하고, 불법촬영물도 여전하다. 편파수사도 여전하고, 성별 임금격차도 여전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한남’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위험이라는 세상의 통제에 ‘열린 질문’으로 답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bdsm 영역에도, 세상 어디에도, 여자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있음으로.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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