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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이첼, 결혼하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필라델피아>와 <양들의 침묵>을 만든 감독, 조나단 드미(Jonathan Demme)의 2008년 작품이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보수성이 드러나는 <세 번의 결혼식 한번의 장례식>이나 <브리짓존스의 일기> 혹은 <뮤리엘의 웨딩> 정도를 떠올렸던 나에게, 영화 초반부는 꽤 불편했다.

흔들리는 카메라, 음산한 첼로독주, 여기저기 흩어져 연주를 하거나 서성이는 등장인물들. 결혼식이라는 주제 자체가 주는 지루함과 다큐멘터리 형식의 촬영법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불편함을 경쟁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처럼 가족관계를 비추는 카메라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에 등장하는 레이첼이 아닌 그 동생 킴이다. 마약중독으로 재활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녀는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시점부터 결혼식 리허설에 이어 결혼식을 마치고 이틀 후 집을 떠나는 아침까지를 그린다.
 
레이첼의 남편은 흑인이다. 결혼식 전날 가족모임에서는 꽤 다양한 인종을 볼 수 있다. 흑인, 백인, 동양인, 라틴계 등. 그러나 어딘가 어색하다. 사실 우리 눈에 그들은 인종은 다양하지만 어딜 봐도 아메리칸이다. 자연스러운 척하는 미국인 정도로 보인다.
 
첫째 날 저녁, 사람들은 모두 모여 돌아가며 레이첼의 결혼을 축하하는 인사를 한다.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을 되살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저 미래의 행복을 바래주는 친척도 있다.

킴의 순서가 되었다. 킴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천덕꾸러기인 자신이 이곳에 다시 왔다는 사실, 재활교육과정들을 두서없이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언니를 위한 축사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심리가 들쑥날쑥 두서없이 이어지고, 좌중은 이내 인상이 굳어진다. 킴의 솔직한 자기 이야기가 이 아름다운 축사의 한마당에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거나, 혹은 그녀의 태도 자체가 불안했을 것이다. 레이첼은 결국 집으로 돌아와 불만을 터뜨린다. 너는 네 얘기밖에 할 줄 모르냐고. 내 결혼식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결혼은 어쩌면 이기적인 인간의 욕심을 주저 없이 드러내 가족간에 굵은 상처를 내버리거나, 혹은 여전히 상투적인 말이 난무하는 그 어떤 것일지도-지루했던 축사들처럼-모른다.
 
평온과 불안을 왔다 갔다 하는 113분

영화는 113분 내내 평온과 불안을 왔다 갔다 한다. 결혼준비에 들뜬 즐겁고 활기찬 과정을 보여주다가도 어느새 불안한 기운이 침투한다. 가족들은 사랑과 포옹과 키스를 끊임없이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말다툼의 한복판으로 관객들을 끌고 간다. 홀로 불안하게 서성이다가도 결국 다른 가족을 만나 따뜻한 포즈로 서로를 감싸고 느린 춤을 춘다.
 
영화 내내 프레임 안에 보여지는 수많은 연주자들이 있는데, 그들조차 가지각색이다. 재즈연주자가 나와 한차례 분위기를 띄우고 나면, 어디선가 팝송이 들린다. 결혼식 참석자들은 힌두식 예복을 그들의 맞춤복으로 선택한다.

 
이윽고 킴과 그 가족의 상처가 드러난다. 사위와 장인이 서로 자신이 가사일에 더 소질이 있다는 희한한 자랑을 하며 내기를 건다. 그러던 중 찬장에서 레이첼과 킴의 막내남동생 이든의 접시가 나오고, 그것을 본 킴의 아버지는 내기를 끝내기도 전에 급히 자리를 떠버린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킴의 재활교육장면을 통해, 16살에 마약에 중독된 그녀가 남동생을 차에 태우고 끌고 나갔다가 다리에서 추락해 동생이 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제불능 마약중독자라고만 하기엔, 가족들에게 너무 큰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마약중독자 딸, 게다가 그녀는 아직도 안심하기엔 불안한 상태다.
 
킴은 여전히 자신을 문제아로 보는 가족들의 시선을 받고,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친엄마를 찾아가 분노를 폭발한다. 엄마가 숨겨둔 마약 때문에 자신이 중독자가 되었다고, 어린 내게 왜 남동생을 맡겨서 사고를 내도록 했느냐고. 모녀는 주먹질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지만, 여전히 이 영화의 주제는 극단적인 가족사가 아니다.
 
용서와 화해로 귀결되지 않는 ‘가족’

<레이첼 결혼하다>. 레이첼은 결혼했고, 흑인남편은 노래를 부른다.

상처의 이유를 서로에게 전가하고, 어느 가족에게나 있을법한 사소한 결핍들, 분노와 원망, 균형 잡히지 못한 마음이 또다시 서로에게 격려와 안정이 아닌 불안과 간섭이 되는 과정.

 
이 영화를 오바마 시대의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의 결혼이 그토록 자연스러워서일까? 단지 미국사회의 모습으로만, 혹은 오바마 시대 뒤에 감추어진 모습이라는 측면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흑인과 동양인과 백인과 이 모든 인종의 혼혈인이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가족이 된 상황, 그러나 더 이상 마약중독자 딸의 갱생과정이 영화의 주제가 될 수 없는 시대다.
 
가족 안에서 시작한 불행이 가족으로서 용서와 화해로 결말지어지지 않는 곳. 끌어안은 자매들, 형부와 처제, 신랑과 친구, 네 사람의 포옹이 그토록 부자연스러운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동생을 떠나 보내지만, 영화 마지막에 레이첼의 뒷모습은 차라리 홀가분하게 보인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코네티컷의 한 가정. ‘결혼식만 아니었더라면 이 전쟁 같은 과거 되씹기는 없어도 되었을 것을’ 이라고 누군가는 되뇌었을지 모르겠다.
오승원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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