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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미래를 꿈꾸다

아나키스트나 페미니스트들과 같이 각종 권위와 권력,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사회구조 자체를 의심하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논리적 대안 없이 비현실적인 주장만 해대며 걸어 다니는 모순덩어리’ 혹은 ‘불가능한 저항만을 계속하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담고 있는 구조를 뒤흔드는 시도를 하려는 이들에게 ‘걸어 다니는 모순덩어리’와 같은 명찰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것이다. 이 모순덩어리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문학작품들도 자신의 창조자처럼 현실의 벽에 부딪쳐 절망스럽고 모순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SF(Science Fiction)는 우울한 현실의 중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다양한 급진적인 사상들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주목받게 된다.

과학적 사고를 요구하는 SF, 남자들의 것?

‘페미니스트 SF’. 얼핏보면 어울리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 같지만, SF라는 문학 형식을 통해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제 속으로 파고드는 ‘페미니스트 SF'는 이제 SF 용어사전이나 SF 개론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어휘가 되었다.

물론 페미니스트 SF작가들의 작품들 상당수가 '정통 SF'의 기준에서 봤을 때 SF라고 보기 힘들다는 식의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 SF작가들이 SF 최고의 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까지 수상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SF페미니즘’을 주변부의 움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게 됐다.

최초의 SF라고 평가 받고 있는 <프랑켄슈타인(1818년)>메리 셸리가 19세때 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당대의 사상가였던 윌리엄 골드윈이고, 어머니는 <여성 권리의 옹호>를 쓴 메리 울스톤크래프트, 또 그녀의 남편이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퍼시 셸리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프랑켄슈타인>이 메리 셸리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주변의 적극적인 도움을 통해 탄생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 결과 여성이 쓴 최초의 SF와 여성과의 관련성은 무시됐고, SF의 역사에서 여성으로서의 메리 셸리의 존재는 상당기간 잊혀져 있었다.

여성의 미래를 구축하기 시작한 여성작가들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여성 SF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제2기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던 1960년대 이후였다. 테크놀로지에 경도된 사고와 영웅 중심적 스토리 텔링, 제국주의적 사고관이 단순히 우주로 영역을 넓힌 듯한 소재들은 생태학, 사회학, 정신분석, 평화주의, 해방신학, 기호학, 페미니즘 등과 만나게 되면서 재사유(再思惟)의 대상이 되고 SF는 장르의 한계를 넘어 선다.

여기서 여성작가들은 기존의 SF가 그리는 미래사회가 계급이나 인종차별의 문제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관심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과학의 발달로 모든 것이 혁명적으로 변화한 상황에서도 여성의 지위만은 여전히 종속적이거나, ‘남녀차별문제를 단순한 생물학적 문제로 대치’시켜 유전공학과 생물학의 발달로 가볍게 남녀평등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성은 여전히 성적대상으로만 묘사되는 작품들이 허다했다.

SF 작가 조안나 러스가 지적하듯 “남성과 여성 간의 본질적 차이, 가족 구조, 성 등 역할에 관한 진지한 사색은 전혀 없었”고, “많은 여성 이미지만 있을 뿐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작가들은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마저도 남성들에게 점유 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여성의 미래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비평가들 ‘성별에 따른 편견’으로 작품 평가

이 시기에 등장한 흥미로운 여성작가 중 한 명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James Tiptree, Jr.)다. 미 중앙정보부의 설립 과정에 참여했고, 실험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남성적인 이름을 필명으로 하여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작품들이 유명해지면서 팁 주니어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커졌는데, 작품의 페미니즘적 색채 때문에 그녀가 여성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남성일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팁트리가 여성임이 밝혀지면서 SF 비평계에서는 글쓰기에 있어서의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커다란 논쟁이 펼쳐진다.

비슷한 예는 1990년대의 한국에서도 존재한다. 김재국은 ‘한국 과학소설의 현황’이란 글에서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SF 작가 듀나(Djuna)의 작품 <일곱번째 별>을 평하며 “이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정체를 여성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될 뿐만 아니라 음식 요리에 관한 구체적 서술도 여성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정도로 구체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듀나가 실제로 여성이건 아니건 ‘요리’라는 소재로 작가의 성별을 판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남/녀 이분법 허무는 실험적 상상력

한편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은 가면 뒤에서 활동하는 팁트리나 듀나의 예와는 달리 보다 개방적인 태도로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체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1969년 발표한 <어둠의 왼손>은 ‘에큐멘’ 우주연합의 사절 ‘겐리 아이’가 우주연합 가입을 권유하기 위해 양성인이 사는 행성 ‘게센’에 도착하여 겪는 의식의 변화를 다룬다.

‘게센’ 종족은 평소에는 양성적 성향이 모두 존재하다가 1년에 두 달 동안 지속되는 ‘케머 발정기’가 되면 남성 여성 중 어느 한쪽 성이 발현되게 된다. 이는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양쪽 성 모두로 변화할 수 있고, 한번 변했던 성이 이후에도 고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고정되어 있는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인들을 남녀로 구분할 수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자기 나름대로의 분류법에 따라 대상을 남자 또는 여자로 나누어 대한다. 그러나 차차 게센인에게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리고 게센 사회에는 이분법적 사고 체계가 약하게 발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어슐러 르 귄은 <어둠의 왼손>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대립적인 것 사이의 결합과 타자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녀는 소설 속에 거대한 과학 이론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정교하게 적용시켜가기 보다는, 오히려 낯선 세계를 접하여 겪게 되는 사고의 변화과정을 끈기 있게 묘사하는데 관심을 쏟는다. 그녀 스스로 “SF는 현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말한 것처럼 어슐러 르 귄의 과학적 사고는 메카닉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한편 페미니스트 SF 작가 중 가장 급진적인 태도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조안나 러스<변했을 때(1972)>에서 남성들이 전염병으로 전멸한 후 단성 생식을 통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를 유지시켜온 평화스러운 행성 ‘화일어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구에서 온 남성들의 방문이 시작함에 따라 다시 가부장적이고 경쟁적인 사회로 회귀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녀는 남녀평등이 단순히 생물학적 차이를 줄이고 남성의 권력을 여성이 동일하게 차지한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권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의식구조와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반성과 대안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이버펑크 SF와 사이보그 예찬론

1980년대 이후에는 사이버펑크(cyberpunk: 사이버네틱스와 펑크의 조합어.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네트워크가 세계를 지배하고, 개개인의 인간성은 소멸되어가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와 관련.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버스페이스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과학적 기술을 이용하면서도 교란시키는 스페이스 카우보이들, 그리고 유기체와 기계의 잡종인 사이보그와 같은 소재들을 다룬다) SF가 제2의 뉴웨이브를 이끈다.

사이버펑크 최고의 소설로 평가되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의 스페이스 카우보이가 말하듯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가장 특권적인 위치에 가상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고 오명의 맨 아랫자리에는 육체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사이보그 페미니즘의 주창자 도나 해러웨이는 바로 이러한 신세계의 탈육체성이 새로운 페미니즘적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이보그(혹은 사이버스페이스)는 더 이상 육체가 문제되지 않는, ‘인간/기계, 인간/동물, 물질/비물질 등등의 경계의 일탈이자 경계의 융합’이며 이 성차 없는 새로운 유토피아에서 타자를 억압하지 않는 역사가 새롭게 쓰여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 예찬론과는 달리 현재 우리가 일상적인 것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는 그리 성평등한 공간으로 보이지 않으며, 사이보그도 이미 ‘남성형’을 부여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존 사회의 기득권은 그렇게 만만하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며, 다른 저항과 새로운 시도에 앞서 자신의 묵은 권력과 법제를 휘둘러 어떤 새로운 공간도 재빠르게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킨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탈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기존 권력이 권력의 외피를 강화하고 더욱더 교묘한 규범원리를 세워 권력을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게 되는 공간인 것이다.

1970년대 많은 여성 SF 작가들의 등장, 그리고 1980~1990년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되기’ 실험 이후에도 수많은 페미니스트 SF 작가들이 새로운 시도와 변종 만들기를 거듭해가고 있다. 마가렛 애트우드, 팻 머피, 코니 윌리스, 그리고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리스 레싱과 같은 작가들은 아제 낯선 이름이 아니다.

한 인터넷 서점에서 실시한 판매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SF 서적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기간도 짧고, 단순한 수치조사에 따른 통계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들이 점점 SF에 가까워지는 것이 당연한 사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현실 안에서 더 깊은 신경증에 시달리고, 강렬하게 신경증의 원인들을 찾아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SF의 가능성에 더욱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일다▣ 김현주


[필자의 다른 글] 여성의 욕망이 ‘스릴러’다 / 김현주 200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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