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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근대는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오는 바람에 어느 정도 낯설고 불안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통과 기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리 잡았다. 청나라 말기에서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국은 외부적으로는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내전 및 공산당의 혁명을 한꺼번에 겪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적인 세계가 서서히 몰락해가고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을 불안에 떨면서 지켜봐야 했다.

가족의 해체와 몰락, 신랄하게 그려내

장아이링 작품을 영화화한 <반생연>1997
장아이링(장애령張愛玲, 1921~1995)은 현대중국여성작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녀의 소설은 당대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최근에도 <반생연>, <붉은 장미와 흰 장미>와 같은 작품이 영화화로 만들어졌다. 특히 홍콩과 타이완, 해외 화교권에서 그녀의 인기는 매우 높으며 문학적으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의 소설이 인기를 끈 이유는, 다시 볼 수 없는 상하이 유한계급의 번화한 풍속과 내면적인 심리를 정교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몰락해가는 인간에 대한 작가 특유의 허무주의적 비애감은 복고적인 감수성과 잘 맞물려, 마치 유행처럼 몇 차례 장아이링 열풍을 일으켰다.

장아이링은 대체로 결혼, 가족과 같은 개인적인 영역을 다룬다. 그런데 그녀의 소설에서 가족은 더 이상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존경하고 법도에 따라 복종하는 전통적인 가족상을 따르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누이동생은 자신을 짐처럼 여기는 오빠를 미워하는 등 전통적인 윤리에 입각한 감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대 중국사회는 서구 문물과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영향으로 개인들의 자의식이 상당히 예민하게 발달했다. 이들은 구식 가정이 황량하고 덧없는 공간임을 간파한다. 그러나 이렇게 발달한 자의식은 전쟁과 혁명이 동시에 진행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다른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허무하게 스러진다. 특히 장아이링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상하이의 상류층 집안 아들들은 양복을 입고 화류계에 출입하는 등 근대적인 모습을 흉내 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행위는 집안의 몰락을 부채질할 뿐이다.

장아이링은 여자의 결혼을 통해 가족의 해체와 몰락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 출신으로 상류층 집안에 팔려가는 신세다. 처음에는 갈등과 대립을 번복하던 여주인공들은 어느새 상류층의 전형적인 인물이 되어 사회의 변화에 맞서 쇠퇴하는 가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 장아이링 작품집 <앙가秧歌>
한국에 번역된 그녀의 작품집 <앙가秧歌>에 실린 ‘원녀怨女’는 당대 중국의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남편과 부인, 처와 첩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그 속에서 어떤 감정이 교류되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참기름을 파는 가난한 오빠네 가게에서 사는 인띠는 아름다우며 자신의 처지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 결혼에 대해서도 감상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뿐이다. 결국 그녀는 오빠의 주선으로 북방에서 온 상류층 집안의 둘째 아들과 결혼하게 되는데, 남편은 천식을 앓는데다가 소심하며 노마님이 다스리는 집안은 법도가 매우 엄격하다. 집안에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지 못한 채 살아가던 그녀는 잘생긴 데다가 화류계에 자주 출입하며 호방한 성격을 과시하는 셋째 도련님에게 자꾸 마음이 끌린다. 셋째 도련님과의 은밀한 관계는 억눌러진 그녀의 욕망을 일깨우지만 동시에 죄책감과 공포를 불러와서 결과적으로 그녀의 숨통을 더욱 조인다.
 
세월은 흘러가고, 감정적인 공허함과 죄책감, 그리고 재산을 최대한 많이 차지해야겠다는 이기심만이 그녀를 지배할 뿐이다. 아편에 중독된 늙은 인띠가 재산 관리를 잘 하지 못해 망해버린 친척들을 비웃으면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일상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삶에 대한 비애와 처량함을 자아낸다.

상하이 유한계급의 번화한 일상 속 인물들

▲ 장아이링 소설을 영화화한 <색,계>2007
장아이링은 그녀가 소설 속에서 자주 묘사했던 사람들처럼, 상하이에서 청나라 말기의 명문가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유년시절은 행복하지 못한 편이었다. 가세가 기울어져가는 와중에 그녀의 아버지는 당대의 몰락해가는 상류층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아편, 마작, 축첩과 같은 중독적인 생활에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결국 아버지와 이혼했다. 장아이링은 가족 문제로 인한 답답하고 불안한 심정을 공부로 해소하려고 애썼으며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1940년대 초반 상하이의 잡지 <천지>, <보라난초>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1946년에 이르러 그녀의 소설은 상하이 거리의 서점마다 걸려있는 인기작품이 됐다. 아래는 장아이링이 쓴 산문의 일부다. 이처럼 그녀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쓸쓸하고도 서정적인 순간을 잘 포착해냈다. 시선은 서민적인 풍속에 머무르지만 그 감성은 세련되고 귀족적이다.

“어느 날 밤엔가 쓸쓸한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은행 볶음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맛있어요 맛있어, 쫄깃해요 쫄깃해.' 열댓쯤의 아이였다. 어딘가 서툴고, 아직 제대로 입에 붙지 못한 노랫가락이었다. (하지만) 난 그 어두컴컴하고 긴 거리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아이는 솥을 지키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슴 가득히 불빛을 안은 채.”

대륙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녀는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반공작가로 오독되어 1950년대 타이완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실제로 <앙가秧歌>에서 그녀는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한다. 그러나 그 비판은 체제에 대한 원칙적인 공격이라기보다는 무지하고 전통적인 풍습에 익숙한 농촌 세계에 갑작스레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장아이링의 소설을 영화화 한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1994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내포한 일상적인 권력관계는 변하지 않은 가운데, 정치 구호에 맞추어 서로를 검열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앙가秧歌>에서는 빈곤과 일상적인 검열체제에 시달리는 어느 농민 가족의 비극이 펼쳐진다.

중국이 개혁정책을 단행하면서 대륙에서도 장아이링은 인기를 끌게 된다. 또한 그녀는 소위 신세대들에게도 인기가 좋아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또다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타이완의 어느 기자가 장아이링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장아이링이 사는 미국의 어느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면서 쓰레기를 뒤졌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다.

아마도 그녀의 소설이 재현하는 상하이 유한계급의 번화한 일상이 지금의 독자들에게 다분히 신비롭고 아련한 꿈처럼 다가오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화려한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정작 신비롭지만은 않다. ‘원녀’의 비애감에 젖은 인띠나, ‘앙가’의 절망에 빠진 위에샹의 모습은 여전히 강렬한 현실감을 자아낸다. 일다▣ 김윤은미

[관련 기사] 격렬한 중국역사 속 비극으로 남은 세 사람 / 김윤은미 200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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