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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작품을 통해 다시 본다 
 
허난설헌(본명 허초희, 1563~1589)은 역사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몇몇 여성 문인들 가운데, 황진이와 더불어 그 시작 능력이 천재적이라고 평가받은 예술가다.

그러나 남성 문인들에 대한 평가가 작품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여성 문인들에 대한 평가는 외적 조건이 기준이 된다. 즉 황진이의 경우 기생의 신분으로 뭇 남성들을 유혹한 자유분방한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리고 허난설헌은 반역을 꾀하다 귀양 간 허균의 누이이자, 남편에게 소박맞고 자식마저 잃은 불행한 여성으로 기억된다.

불행한 ‘여류’ 예술가의 이미지. 고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소개된 허난설헌의 작품들은 주로 기다림에 지쳐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게 원망을 표출한 시다. 하지만 ‘님’에 대한 기다림과 한이라는 주제는 그녀 시의 일부분을 구성할 뿐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시 210수를 살펴보면(그녀는 죽기 직전 시를 쓴다는 이유로 핍박받았던 삶 때문에 자신의 시를 다 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전해진 것들은 난설헌 문집을 계획한 동생 허균을 통해 보존된 작품이다), 그녀가 다양한 주제들을 섭렵한 작가였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억압된 삶을 이야기하고, ‘선계’와 같은 상상의 세계를 구축해 자유로운 생을 꿈꾸었으며, 여성의 억압적인 삶과 혼잡했던 당대 정치판을 비판했다.

그녀의 시에서는 충과 효와 같은 유교적 윤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서정적인 당나라 한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랑과 애정을 노래한 그녀의 시들 중 몇 편은, 방탕하다는 이유로 시집에 실리지 못하기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두근거림을 표현한 아름다운 시다.

채련곡(연꽃을 따는 노래)           

가을에 맑은 호숫물 옥돌처럼 흘러가고
연꽃 피는 깊은 곳에 난초 배를 매놓고서
당신 보고 물 건너서 난꽃을 던졌는데
혹시 남이 봤을까봐 반나절 부끄럽네

제1회 ‘허난설헌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움’(2003)에서 김성남씨(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연구교수)는 허난설헌이 자신을 ‘난새’에 비유했다고 말했다. 허난설헌은 작은 오빠 허봉에게 시를 배워 훌륭한 예술가가 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함께 시를 이야기할 지인도 없었고 시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고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난새’는 남조 송나라 범태의 ‘난조시서’에 나오는 새다. 계빈왕에게 잡힌 난새는 새장에 갇혀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를 운명에 처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삼 년 동안이나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계빈왕은 거울을 걸어, 난새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게 했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난새는 슬피 울기 시작했다. 결국 난새는 거울을 향해 달려 나가 부딪혀 죽고 만다.

‘난새’는 집안의 몰락과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등 불행한 가족사를 지녔으며,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 재능을 표출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허난설헌의 상황을 기막히게 비유하는 소재다.

빈녀음(가난한 여자의 노래)

이 얼굴 남들만 못하지 않고, 바느질 길쌈 베도 솜씨 있건만,
가난한 집 태어나 자란 탓으로 중매인도 발 끊고 몰라라 하네.

추위도 주려도 내색치 않고, 진종일 창가에서 베를 짜나니,
부모님야 안쓰럽다 여기시지만 이웃이야 그런 사정 어이 아리요.

밤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짤깍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비단,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가위 잡고 삭독삭독 옷 마를 제면 밤도 차라 열 손끝이 곱아 드는데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빈녀음>은 추운 겨울에 손을 곱아가며 옷을 짓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허난설헌은 이 시를 통해 가난해서 외롭게 살 수 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다. 이처럼 서정적인 시풍으로 외로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허난설헌의 시는, 그녀가 죽은 후 동생 허균에 의해 문집으로 간행됐다. 따지고 보면, 허난설헌은 최초로 자기 이름의 단독 문집을 가진 여성인 셈이다.

1600년에 중국에 전해진 난설헌의 시는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하는데, 2백년이 지난 1794년에도 여전히 관심을 받으며 유명 시집에 포함됐다.

한편 보수적인 조선 사회는 허난설헌에 대해 좋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여성이 한문을 배워서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조선 시대에서 반역자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시가 널리 알려지고,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은 남성 문인들이 못마땅히 여기기에 충분했다.

인간세상에서는 김성립과 헤어졌다가
지하에서 오래도록 두목지(당나라 시인)를 따르리라.

허경진(연세대 국문과 교수)씨에 따르면 이 시는 난설헌이 지은 것이 아니고, 이후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사칭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성립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고려해보면, 이 같은 시를 쓸 만도 하지 않을까.

17세기의 유명한 진보적인 실학자 박지원은 허난설헌에 대해 “일반적으로 규중 여인이 시를 읊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홍대용은 중국인 반정균이 허난설헌을 칭찬하자 “비록 이 부인의 시는 경지가 높지만 그의 덕행은 그의 시보다 멀리 뒤떨어집니다” 라고 대답하며, 위의 시를 언급했다.

즉 "미남으로 이름난 당나라 시인 두목지의 호가 '번천'이었으니, 난설헌도 자신의 자를 '경번'이라 짓고, 이렇게 음란한 시를 지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이에 대해 반정균은 “그도 그럴 것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못난 남편이 따르게 됐으니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조선 시대는 진보적인 학자들마저, 여성예술가에게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사생활을 들먹이며 흠잡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시는 상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선녀들이 등장하는 등 전반적으로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기운이 물씬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억압적인 현실과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닥친 고통이 난설헌으로 하여금 비판적인 어조의 시를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에 대한 염원을, 선계에서 관직을 제수 받는 여신으로 표출했던 그녀. 난설헌을 비롯해서 역사의 뒤로 가려진 여성 문인들의 작품과 삶에 대한 재조명이 절실하다. 일다▣ 김윤은미 (
작품 인용: 초희 허난설헌 홈페이지)
 

[여성문인 재조명] 여성예술가들 사이의 ‘영겁의 교류’       이미정 2009/01/16
[여성문인 재조명] ‘천재 여성시인’이란 신화를 넘어        김윤은미 200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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