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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영화 <레몬트리>(Lemon Tree)
 

영화 레몬트리 photo by EITAN RIKLIS

수천 년 간 계속돼 온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영토 분쟁의 한 가운데, 요르단 강 서안 지구는 곳곳이 찢기고 갈라져 있다.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새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정착민들 간의 ‘벽’은 단지 종교적, 이념적 차원의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거주를 구획하는, 딱딱한 콘크리트와 날카로운 철조망으로 실재하는 진짜 ‘벽’이 이 땅 곳곳을 가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상존하는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002년부터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 높이 5m, 총 길이 700Km에 달하는 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는 이곳에 거주해 온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고 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축소판
 
영화 <레몬트리>(Lemon Tree)는 바로 이곳에서 레몬농장을 일구며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여성 살마의 이야기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장성한 자식들을 모두 외지로 떠나 보낸 뒤, 홀로 레몬농장을 가꾸며 조용히 살아가던 살마의 일상은, 옆집에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이사를 오며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휩쓸려 간다.
 
농장을 통해 테러리스트가 접근할 수 있다는 ‘잠재적’ 테러위험을 이유로 그녀의 레몬농장 주위에는 철책이 둘러진다. 살마와 그녀의 농장은 철책 위로 높이 솟은 초소 병사의 감시 아래 놓인다. 눈앞에서 자식과도 같은 레몬나무들이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농장에 발을 들여 놓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살마는, 유일한 생계의 수단이자 아버지와의 추억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삶이 녹아 있는 레몬농장을 지키기 위해 승산 없는 투쟁에 나선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팔레스타인인과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쳐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인, 그리고 그 사이에 세워진 ‘분리의 벽’은 명백히 현재 중동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간 영토 분쟁에 대한 직접적 은유이다.

 
이스라엘 출신의 감독 에란 리클리스(Eran Riklis)는 국제적 호평을 받은 전작 <시리아인 신부>(2004)로부터 “이스라엘 시민의 한 사람,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 주변의 상황들”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중동의 광기”(Middle-East madness)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살마가 법정에서 자신의 레몬농장을 지켜 줄 것을 호소하며 “지금까지 세운 장벽으로도 모자라느냐”고 외치는 것과 같은 장면을 비롯해, 영화 곳곳에서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좋은 이웃이 될 수 없는 두 여성의 이야기
 
직접적으로 명백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레몬트리>가 정치적 구호 이상의 깊이와 울림을 갖는 것은, 그 안에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감정의 결을 포착하는 감독의 섬세한 시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살마는 이스라엘의 부당한 토지 점유에 저항하는 ‘투사’일 뿐만 아니라 외지에 나가 사는 딸의 방문을 기다리는 ‘어머니’, 죽어가는 레몬나무를 바라보며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는 ‘딸’, 또한 십 년 만에 느껴보는 남성의 따뜻한 손길에 사랑을 느끼는 ‘여자’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런 살마의 반대편에 이스라엘 국방장관의 부인 미라의 삶을 놓음으로써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정치적 분쟁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어머니 혹은 부인으로서의 여성의 삶, 나아가 여성들 간의 공감과 유대로까지 이야기의 층위를 넓혀간다. 감독 스스로 밝히고 있듯, <레몬트리>는 “서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쉽게 해결될 수 없을 문제들과 싸워나가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두 여성의 삶에 투영된 고독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시선이 레몬농장을 가로지른 철책과 그 곁에 줄지어 선 군인들의 모습에서 그 벽 양쪽에 위치한 집안으로 들어설 때,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첨예한 분쟁지역에 살고 있는 ‘두 여성’의 삶을 보게 된다. 영화 속 그녀들은 단지 철책 너머로 침묵의 시선을 교환할 뿐이지만, 각자의 지붕아래 감춰진 그들의 고독과 고통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이 두 여성의 삶이 어느 순간 하나의 음으로 공명함을 느낀다.

 
한 사람의 아내로, 아이들의 어머니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이제 주변에 남은 것이라고는 레몬농장뿐인 살마의 삶은, 대접할 사람이 없어 쌓여만 가는 레모네이드 통들처럼 그저 그곳에서 시간을 견디고 있다. 먼지 쌓인 그녀의 삶에 찾아 온 변호사와의 작은 로맨스는 그녀를 다시 한 명의 여자, 감정이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러나 “남편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이웃남자들의 위협은,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 그녀의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런 살마의 삶,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라의 고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남편의 조력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며 “난 행복해” 라고 자기세뇌를 되풀이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좋은 이웃이 되고 싶을 뿐”인 미라의 바람은 그녀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안에 철통 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저택을 짓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국방장관의 부인인 한 절대 이뤄질 수 없다. 따라서 미라는 몇 번이고 살마와 깊은 시선을 나누면서도 그녀에게 말 걸지 못하고, 용기를 내 찾아간 살마의 집 앞에서 그냥 되돌아서기만 할 뿐이다.
 
살마와 미라가 여성으로서 공유하는 어떤 감정과 경험의 존재를 긍정하면서도 적극적인 소통과 공조로 나아가지 않는 <레몬트리>의 태도는, 가능한 성취와 평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벽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한 결과이다.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농민여성과 이스라엘 상류층 엘리트여성의 삶이 ‘쉽게’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영화에서나 가능한” 나이브한 바람일 뿐인지 모른다.
 
따라서 영화의 결말은 예측 가능하게 흘러간다. 살마와 미라의 집 사이를 가르던 철책은 더욱 높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고, 살마의 레몬나무들은 밑 둥만 남긴 채 잘려 나가고, 미라는 남편을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난다.
 
‘정당한’ 폭력과 ‘테러’의 구분
 
레몬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통지를 받고서 살마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간 팔레스타인 경찰은 “보상금도 못 받는 사람들 천지인데, 왜 이런 일로 찾아오느냐”라고 되묻는다. 여기서 드러나듯 살마의 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암담한 현실은 그 해결 가능성을 점쳐 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살마의 레몬농장에 일어났던 일은 언제라도 더욱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형식으로 반복될 수 있다. 그에 비례해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테러도, 또 이에 대응하는 더욱 억압적인 이스라엘의 ‘자기방어’도 끊임없이 반복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국민의 생명과 삶의 안전을 저해하는 위협을 “테러”라 부른다면, 대대로 이어내려 온 삶의 터전을 빼앗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인 나무들을 잘라내려는 장관의 태도야 말로 “테러”라 부르기에 적합한 것이지 않은가. 너와 나의 경계를 가르는 ‘우리’의 선을 어디에 긋는가에 따라 테러와 방어를 위한 ‘정당한’ 폭력의 구분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던 국무장관이, 미라가 떠난 이중 삼중의 철제보안 시스템 속의 저택에 홀로 남겨진 마지막 장면은 이 끔찍한 폭력의 악순환이 얼마나 공허하고 텅 빈 명분에 기대고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다. 계속되는 폭력의 끝에 남겨지게 될 것은 무엇도 나아진 것 없는 메마른 폐허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다▣ 윤수진

 [저널리즘의 새지평일다 www.ildaro.com]  일다의 다른 기사들을 보고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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