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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쳤어, 혼자이고 싶어
 
각기 다른 표현방식과 이해관계 속에서 벽에 부딪힐 때 가끔은 살며 속해있는 시간이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되고 싶어져요. [귀가 세 개 달린 곤양이](1998)를 들으면 왠지 세상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애써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풀어주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심리적으로 ‘혼자’만 있는 방에 들어선 듯이요. 그 곳은 슬프고 외로운, 하지만 마음의 소리들이 아우성을 치는 곳. 그래서 역설적으로 조금은 더 자유로운 방이죠.
 

황보령 ©www.whangboryung.com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
 
오늘은 괜찮을 거야 혼자이니까
 
(“추억 건망증” 중에서)

 
1990년대 국내 인디음악 씬이 (당시 서구 록음악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던) 젊은 세대의 좌절과 주변인적 자의식을 공통감성으로 갖고 있었던 만큼, 황보령의 독특성에도 어느 정도 시대적 배경이 둘러져 있었지요. 그리고 펑크록이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할 때 음악적인 실험성과 정서적인 개인성을 추구했던 것처럼, 그의 음악도 한 가지 가치관을 주입하려는 세상에 대한 반발로서 표출됐고요.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곡 중 하나인 “비, 뉴욕, 사람, 거지”에서 황보령은 ‘내가 이상한 걸까, 세상이 어지러운 걸까’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불투명한 음높이와 발음법으로 그는 일상에서의 ‘소외감’을 노래하는 것 같았죠.
 
그 자신이 펑크를 “장르가 아닌 태도”라고 했던 것처럼, 황보령의 음악적 자아는 크거나 작은 사회적 관계에 놓인 개인의 단절감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외의 감정은 자기만족적 우울보다는 상처받은 사람의 직접적인 목소리처럼 드러나지요.
 
1집과 2집에는 당시 음악계의 개성 있고 걸출한 아티스트들-이인, 장영규, 고경천, 이상은, 김윤아, 삼청교육대 등-이 많이 참여했는데요. 절망에 취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하다 후렴구에서는 절규에 가까운 사운드를 터뜨리곤 했던 음악 속에서 그들 역시 일차적으로는, 이물감으로 가득 찬 황보령의 개인적 세계에 주목하지 않았을까요.
 
소리치며 울어도 좋아
 

1월 4일 라이브 ©출처: 황보령 = SmackSoft 공식 팬카페

그런데 이런 단절감이나 이물감들은 음악을 듣는 이에게 일종의 비일상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하지요. 왜냐면 언제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말해지는 일상을 순간적으로 다르게 읽고 보고 듣게 하니까요.
 
그 사람의 살아온 경로로 음악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때, 가령 황보령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교포라는 점은 그의 음악스타일에 일정부분 어떤 관점을 제공했을 것 같아요.
 
가장 예민한 시기에 내가 보는 ‘낯선 이들’ 그리고 그들 눈에 비친 ‘낯선 나’를 동시적으로 체험하게 되면 누구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게다가 그는 이미 어린 나이에 다양한 삶의 방식을 억압하는 이 땅의 교육방식에 염증을 느꼈다고 했는데,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남달랐을 테고요.
 
또한 어린 시절부터 록음악의 코드로 기타를 치고 시선과 촉감 등의 감각성이 중시되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감정을 여러 각도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을 거예요.
 
7년만의 앨범이자 황보령 2.5집인 [SmackSoft]의 발매에 발맞춰 최근 공연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이달 초, 강남 모 바에서 열린 “황보령=SmackSoft”(SmackSoft는 황보령의 밴드이름입니다)의 공연에 다녀왔습니다. 평소 거의 가지 않는 강남을 찾은 건 어쩌면 이 뮤지션이 전해줄 강렬한 정서적 자극을 기대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록 사운드가 커다란 노이즈 자체를 예술성의 일부로 삼아 기존 음악학을 어지럽혔듯이, 그들의 연주도 아무 일없이 흘러가는 듯한 사람들의 일상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 같았습니다. 살짝 땀이 날 정도로 온 힘 다해 지르는 비명처럼, 혹은 우울한 날의 연속 속에서 문득 흘러나온 울음처럼 그 음악은 “분출해도 좋다”라고 말하는 듯 했죠.
 
다시 살아나
 

황보령 2집 앨범 "태양륜"(太陽輪) 2000

1집이 주로 영미권 인디씬의 아방가르드함을 상기시켰다면, 2000년의 앨범인 [태양륜(太陽輪)]은 조금은 더 쉽고 공격적이 되었죠. 하지만 두 음반 모두 세련되면서도 단순하고, 몽롱하면서도 직접적인 양면성을 보유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요. 이처럼 상충되는 특질들을 하나로 묶는 황보령표 음악의 독특성이 있다면, 아마도 사랑하기를 끊임없이 꿈꾸는 듯한 감수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앨범은 삶에 대한 눈물겨운 애정을 더욱 절절하게 표현한 것 같아요. “그리운 사람”이나 “다시 살아나”, “해”같은 곡에서 관계에 대해 더욱 깊어진 사랑과 애정을, 그런 기억에 대한 향수와 희망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높은 볼륨의 전자사운드가 조금은 더 극적인 느낌의 연주스타일로 이동을 해서 황보령의 음악적 자기인식에 절정감을 더해주고 있어요.
 
숨을 쉬어 고마운 갑갑한 공기
차가와 얇은 사람들 마음
상처를 받을 때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너가
하늘을 안아
 
(“다시 살아나” 중에서)
 

그의 음악은 가사의 분위기가 전환될 때 연주도 함께 굴곡을 가지고 전개돼요. 한 곡의 가사와 음향이 같은 시간의 축에서 움직이는 것이죠. 주로 곡의 2절이나 후반부에서 그는 앞에서 읊조리거나 분출했던 슬픔과 소외 그리고 혼돈에 여운을 남기는데, 그건 일종의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요. 맹목적인 희망이 아니라 고통의 감정 가운데에서 힘겹게 붙잡고 있는 희망이어서 더욱 청자의 감정을 들끓게 하죠.
 
언젠가 한 문학비평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식’은, ‘고통’을 날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라고요. 이미 격렬한 감정 표현 자체가 지나간 시대의 방식처럼 인식되는 이 때에 자신의 고유한 고통을 직시하는 이 뮤지션에게서 저는 외려 삶의 생생함을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단 하나뿐인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는 예술행위들이 모두 관계를 피하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개인주의는 아닌 것 같아요. 세상에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개인적인 자리를 마련하는 시도일 때도 있으니 말이에요. 돌아온 황보령의 음악이, 너무 가까이 있을 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되찾는 소리로서 사람들 곁에 머물길 바랍니다.
▣ 성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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