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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중에서).
<인간에 대한 오해>(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사회평론)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다윈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문구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가장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 각 부분에서 시대별로 제기되었던 생물학적 결정론의 허구를 과학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두뇌의 크기나 뇌의 용량, IQ, 유전자 등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화시켰던 19세기 이후 사회생물학자들의 주장이 갖고 있는 허구성과 비과학성을 비판하고, 그것이 가지는 정치·사회적 파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백인남성보다 열등한 이들: 흑인, 인디언, 여성…
‘백인보다 열등한 흑인과 인디언’ 편에서 굴드는 다윈 이전 미국 사회에 유포됐던 인종적 편견을 지적한다. 인종 서열화에 대해 당시 사회지도자들은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흑인의 육체적·정신적 열등성을 언급한 토마스 제퍼슨, 흑인의 평등을 허튼 소리라 치부한 링컨의 메모를 통해 그들이 어디까지나 백인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인종적 편견의 선두에는 린네(근대 분류학 용어로 인종을 공식 정의한 과학자), 세레스(성인 흑인이 백인 아이에, 몽골족의 성인이 청년기의 백인에 해당한다고 주장한 해부학자)등이 있었다. 이들 중 두개골의 용량으로 인종우열을 가렸던 모턴의 주장은 두개골과 신장의 비례를 무시했으며, 표본 추출에 있어서도 편향성과 계측 자체의 비정확성(두뇌의 용량을 납탄환을 통해 분석을 시도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굴드는 이런 정치적인 생물학적 통계가 과학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가졌고 노예제도와 여성의 복종성 등을 뒷받침했다.
한편 현대에도 심심지 않게 등장하는 여성과 남성의 두뇌 크기의 차이에서 오는 지적 능력에 대한 성차별적인 주장의 원조는 폴 브로카의 분석이었다. ‘머리의 측정: 폴 브로카의 전성시대’ 편에서 저자는 우리가 알고있는 통계와 생물학적 상식이란 것이 허구임을 말하고 있다. 폴 브로카는 뇌 용량을 측정하여 이를 통해 인종과 성의 우열을 주장했다. 그러나 굴드는 뇌의 크기는 신장에 비례하는 것이며 인종 간, 성 간의 신장에 비례하여 뇌의 크기를 판단하여야 함을 지적한다.(코끼리가 인간보다 머리가 크다고 해서 인간보다 똑똑하다고 볼 수 없듯이.)
폴 브로카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자료들을 자신의 주장에 맞추기 위해 임의로 추가, 삭제했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된다. 여성의 뇌가 남성의 뇌보다 작음을 주장하기 위해 젊은 여자보다 노년기에 죽은 여자의 뇌를 표본으로 하는 행위, 두개골의 상대적 위치를 측정하여 백인과 흑인의 차이를 바탕으로 흑인의 열등성을 주장하는 것… 그러나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폴 브로카의 주장은 흑인이 열등하다는 근거로 사용됐고 인종차별의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신체의 차이를 우열로 규정하려는 시도
20세기 접어들면서 이전 생물학적 결정론의 비과학성이 좀더 많은, 그리고 섬세한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것처럼 꾸며진다.(아무래도 두개골 용량 측정에 납탄환을 넣어서 분석했던 모턴의 주장보다는 XYY염색체의 공격성을 제기하는 것이 좀더 ‘과학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저자는 ‘신체의 측정’ 편에서 의사이자 범죄인류학 창시자였던 롬브로소의 주장-"매춘부"의 발이 원숭이와 닮았다, 범죄는 유전된다 등-을 통렬히 비판한다. 롬브로소는 범죄자의 골상을 연구해 살인자와 비슷한 인상의 선량한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굴드는 1960년대 중반 XYY형 남성 염색체이상이 폭력과 관계없음(부가된 Y염색체가 태생적으로 공격적 범죄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지만, 이미 사람들 사이엔 XYY형 남성 염색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어 있었고 당사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또 신체의 ‘차이’를 ‘우열’성으로 믿었던 과학자들에 의해 키플링은 “백인의 의무를 다하라. (중략) 너희들이 새로 잡은 굼뜬 사람들은 절반은 악마이고 절반은 아이이다”라는 시를 짓게 된 것이다.
IQ테스트의 허구성
‘미국의 발명품 IQ’ 편은 그 동안 IQ가 낮게 나왔다는 이유로 자신이 머리가 나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꼭 읽어보아야 한다. 처음 IQ테스트를 창시했던 프랑스의 심리학자 비네는 IQ를 선천적인 지능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학습불능자나 정신지체아를 식별하기 위한 극히 제한된 기법으로만 쓰여지기를 원했다. 이런 비네의 의도는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왜곡된다.
고더드는 비네의 테스트를 처음으로 미국에 보급시키면서 지능의 단선적 척도로 삼아 많은 범죄자들과 알코올중독자, 그리고 유대인과 헝가리인등이 정신박약임을 주장했다. 터먼은 직업별 IQ를 창안해서 IQ테스트 한번으로 평생의 직업을 부여하는 위대한 작업을 수행했다. 여기에 인종적, 계급적, 성적 차별이 포함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터먼과 그의 동료 콕스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거 천재들의 IQ를 나름대로 측정했는데, 부모의 사회적 지위, 재산과 뛰어난 친척이 있었는가 여부 등이 기준이었다. 결국 고아였던 천재들은 IQ가 낮게 측정됐다. 게다가 "매춘부"들에 대한 IQ테스트를 통해 그들이 지능이 낮으므로 영구 격리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굴드는 IQ테스트 자체가 아주 조잡한 방식으로 시도되었음을 비판한다. 백인들의 주류 문화에 편향된 테스트로 어떻게 흑인과 인디언의 지능을 테스트할 수 있나. 다양한 답이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한가지 답만으로 지능을 측정한다는 것 자체가 IQ테스트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테스트로 미국에선 이민제한법이 통과되고, 타 인종의 열등성에 대한 믿음이 배포됐으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생적 지능이 모자란다는 편견으로 고통받았다.
한편 성공한 사람들의 지혜가 유전된다면서 하층계급 아이들은 유전적으로 무능하고 지능을 발달시킬 수 없다고 낙인 찍은 버트는 놀랍게도 인종과 성에 대해선 비교적 바른 견해를 피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영국사회가 인종이나 성보다 계급에 더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버트의 통계와 실험은 생물학적 결정론이 당시 사회 기득권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바꾸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불과 10여년 전 ‘벨 커브’를 통해 인종차별의 생물학적 근거가 제시된 것을 볼 때, 생물학적 결정론이 결코 과거의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기준은 남성?
6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이 책은 쉽게 말하면 차별을 정당화시켰던 비과학적 실험과 통계의 허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굴드는 서문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이 되풀이되는 현상은 사회·정치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서열화를 통해 불평등한 제도를 옹호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 과학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또 인종간, 성간, 계급간 차이는 신체의 일부분이나 유전자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문화에 의한 것임을 굴드는 책 전반에서 강조하고 있다.
시대를 통해 숱하게 제기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터무니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인종, 성, 계급 차별주의자에 의해 과학의 탈을 쓰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차별의 근거에 있는 타자, 약자,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비겁함 때문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한국 사회에서 주로 여성과 남성의 우열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다. 숱한 성차별적 통계치를 제시하며, 그것이 얼마나 작은 표본수로 편파적으로 계산된 것인지는 간과한 채 남성의 우월성과 여성의 열등성, 혹은 여성과 남성의 선천적 차이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남녀간 선천적 우열’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한국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백인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식의 주장 역시 인정해야 한다.(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굴드는 책 전반에 걸쳐 플라톤의 철인사상과 국가론을 생물학적 결정론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비단 서구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성인과 소인의 근본은 자체가 다르다’는 공자의 주장과, 여성과 남성을 음양의 구분으로 보고 여성다움과 남성다움,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을 규정해 온 한국사회 풍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세상에는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이란 수많은 유전자들과 삶을 통해 겪어온 시간으로 이루어진 존재임에도, 그 모든 요인들을 무시한 채 오직 유전자 하나, 지능지수 하나로, 사람을 구분 짓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리석고 비열한 행동이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Mismeasure of Man’이다. 굴드는 일부러 ‘Man’이란 단어를 씀으로써 ‘남성’을 인간의 기준으로 삼아 여성을 무시했던 경향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했다. 당신은 무엇을 인간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세계를 단 한차례 지날 뿐이다. 비극 중에서도 생명의 성장을 저지하는 것만큼 비참한 비극은 없다. 또한 불공평 중에서도 내부에 있다고 잘못 인식되어 외부에서 부과된 한계에 의해 노력할 기회나 희망을 가질 기회조차 부정되는 것만큼 심각한 불공평은 없다.”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중) 일다▣ 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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