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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문화, 당신은 안녕한가요?

<질문교차로 인문학카페36.5º> 목소리가 목소리를 부른다



※ 춘천에서 인문학카페36.5º를 운영하는 홍승은 씨가 기존의 관념과 사소한 것들에 의문을 던지는 ‘질문교차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Feminist Journal ILDA


내가 언제 너 같은 애랑 자보겠어’

 

최근 곳곳에서 문단 내 성폭력, 운동권 내 성폭력, 종교 내 성폭력, 학교 내 성폭력, 가족 내 성폭력 등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증언이 들린다. 며칠 전 한 시인에 대한 성폭력 증언 글을 접했을 땐,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화자가 용기 있다’고만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증언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목소리 속에서 내 경험이 겹치기 시작했다. 내가 미처 성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권력관계에서 이뤄졌던 편하지 않았던 스킨십이 떠올랐다. 혼자 고민하다가 적당히 상대와 멀리하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새록새록하게 다가왔다.

 

스무 살, 과에서 유일하게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던 교수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졸졸 쫓아다녔던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교수님은 헤어지기 전, 차 안에서 손을 잡자고 하고 포옹을 하자고 했다. 교수님은 나를 보며 “내가 널 정말 예뻐하는 거 알지? 정말 아껴”라고 칭찬했다. 종종 “섹스는 해봤니? 자유롭게 즐겨”라고 조언을 해주곤 했다. 하루는 헤어지기 전에 차 안에서 나를 안자고 하더니 고개를 돌려 키스를 했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 불편하고 싫었다. 그 뒤로 교수님을 보지 않았다.


▶ 호의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 홍승은


당시에는 처음부터 제대로 거절하지 않았던 내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여겨서 가까워지려고 했던 건 나였으니까. 내 얘길 들으면 더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던 내 책임이라고 사람들도 말할 것 같았다. 후에 그가 내 동생에게도 비슷하게 행동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동생과 나는 그것을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가 먼저 좋아했고 존경했던 분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고 가볍게 넘겼다.

 

스물한 살, 사회복지 분야에 권위 있는 모 교수의 조카이자 지역유지의 아들이었던 과 선배가 나를 성추행했다. 그와 나는 워낙 친해서 동기들 사이에서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 선배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도 남자친구가 있었다. 내가 남자친구와 싸운 어느 밤에 선배가 연애 상담을 해준다고 자신의 집 근처로 나를 불렀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키스를 하면서 몸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내가 언제 너 같은 애랑 자보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워낙 편하게 생각했던 선배였기에 장난인지 진심인지 헷갈렸고, 어설프게 거절하고서 어색함을 피하려고 웃어버렸다.

 

선배는 종종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이야기를 하면서, 동기 중 어떤 여자애도 자신이 연결해줘서 취업이 된 거라고 자랑처럼 말했었다. 나는 선배에게 찍히면 지역에서 사회복지 일을 하기 불리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후 관계를 냉정하게 끊지는 못했다. 몇 달 뒤, 다른 여자동기들도 그 선배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성추행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뒤로 동기들과 나는 선배와 관계를 끊었다.

 

교수, 이장, 문화단체 대표…그들에겐 권력이 있다

 

그 뒤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이어졌다. 대학원 교수, 농활 이장님, 문화단체 대표 등. 아르바이트나 길거리, 술집 등에서 겪었던 추행을 빼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당했던 일만 기억해도 꽤 많다. 어느 분야에서든 주로 ‘남성’이 기득권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내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도와주겠다고 다가와서는 원치 않는 스킨십과 성희롱을 했다.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추행을 당했다면 차라리 화를 내고 범죄라고 정의할 수 있었을 텐데, 모호한 관계에서는 도무지 상황을 판단하고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 관계에는 권력이 작동했다. 작년 여름에 내가 한 문화단체 대표에게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제일 처음 들었던 생각은 ‘지금 내가 여기서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면 우리 활동을 도와주기로 한 걸 취소하려나?’였다. 다음 생각은 ‘바보같이 사무실까지 쫓아온 내 잘못도 있으니까, 좋게 넘어가자’였다. 그 일이 있기 전에 그는 나에게 “내가 도와줄게요. 우리 같이 해봐요” 라고 말해왔고, 나는 그의 선의를 믿고 싶었다. 후에 그가 춘천으로 찾아와서 내 자취방에서 쉬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때, 나는 가까스로 거절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엉엉 울어버렸다. 왜 이렇게 냉정하게 선을 긋지 못하고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는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 거절하면, 소문이 나거나 청년 문화단체 판에서 불이익을 받진 않을까 걱정이 먼저 들었다. 추행을 당했다고 하기엔, 나 역시 그에게 너무 친절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증언해도 여자의 직업, 과거가 언급되며 ‘꽃뱀’이 아닌지 의심받는 사회다. 그런데 이미 친절하게 주고받은 메시지가 남아있고, 그 후에도 냉정하게 끊지 못했던 내 태도는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불리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최면을 걸 듯, 성폭력이 아니라 애매했던 관계 정도로 기억을 마무리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 역시 동생에게 똑같이 행동했다는 걸 후에 알게 됐다.)

 

기억이 물꼬를 트자,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일상적으로 넘겼던 호소들이 떠올랐다. 체육관 사범이 여자인 자기에게 “허리를 발로 눌러 달라”고 시키는 게 불편하다고 하소연하던 친구, 목과 어깨를 주무르면서 “남자는 늑대야, 몸 조심해야해” 라는 식으로 매일 말하는 남자사장님이 소름끼친다는 후배. 그런데도 나와 그녀들은 문제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그’들은 가까운 관계였고, 권력이 있었고,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남자는 그렇다”는 일종의 포기와 “재수 없어서 당했으니 앞으로 몸을 조심하자, 술자리는 피하자” 정도로 결론짓곤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말한다

 

▶ [당신들의 평화]  ⓒ 인문학카페36.5º 입간판


그런데, 지금도 쏟아지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그 문제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너를 쫓아다닐 수 있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자신을 질책했을 피해자들의 마음이 나에게 전달된다.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힘들어서 뒤척였을 오랜 밤과, 목소리를 낸 뒤에도 여전히 갖고 있을 불안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을 있는 그대로 공유하고 싶었다.

 

여전히 나는 글쓰기가 망설여진다. 써놓고 차마 공유하지 못해서 노트북 바탕화면 ‘쓰는 중’ 폴더에 쌓여가는 글들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주 카페 글쓰기 모임에서 한 학인이 내게 말했다. “승은씨는 선뜻 쓰기 어렵고 금기가 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내서, 글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아요.” 나는 “아, 제가요? 위안이 되셨다니 다행이에요!”라고 대답하고 웃어 보였다. 사실 매번 타협해가면서 내가 겪고 느낀 걸 풀어내지만, 조심스럽게 공유한 글조차 급진적인 글로 읽힐 때면 ‘이러다가 혹시 컴퓨터가 털리기라도 하면 나는 정말 큰일 나려나?’라는 생각에 아찔해지기도 한다. 내가 유독 금기를 살아왔던 건 아닐까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내 잘못은 아닐까’하는 의심도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말한다. 그건 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결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뮤리엘 루카이저는 한 여성의 시간과 몸의 서사에 세상 곳곳의 폭력과 차별이 배어있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불러낼 거라고 말한다.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입가에 담고 있는 사람들의 망설임이 눈에 보인다. 나 역시 그렇다. 폴더에서 기다리는 글자 뭉치들. 언젠가 내가 이 폴더를 다 털어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날 불러준 목소리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더 용기를 내는 날이 오길 바란다.   (홍승은)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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