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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앞에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고 싶다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내 언어 찾기


※ ‘길 위의 음악가’가 되어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이내의 기록  Feminist Journal ILDA

 

<일다>에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칼럼을 싣기 시작한지 2년 5개월이 지났다. 스스로 길 위의 음악가라고 겨우 부르기 시작했을 무렵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많은 음악가들이 공연을 멈출 정도로 충격은 컸다. 나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작은 음악가들의 거리공연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접해 참여하게 되었고, 그 기록은 나의 첫 칼럼이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말도 안 되는 참사에 대한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 이후로, 그러니까 2년 넘는 시간동안 계속해서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내가 노래를 부른 장소들은 보통 가수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TV나 큰 공연장은 아니었다. 주로 작은 장소, 적은 사람이 모인 곳, 그리고 작은 이야기들을 소중히 여기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어떤 행사에 초대되어 가는 경우도 있지만, 행사장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에는 영 맞지 않아서 두 번 초대를 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요즘은 도서관이나 작은 단체에서 여는 소소한 행사들이 많아져서 ‘어, 내가 어울리는 행사도 있네!’ 하고 놀랄 때도 있다.

 

▶ 김천역 앞에서 열리는 사드배치 반대집회에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 이내


김천 사드배치 반대집회에서 노래를 부르다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연락이 오면, 고맙고 기쁜 마음이 되어 달려간다. 지난 달 경북 김천에서 사드반대 집회에 와서 노래할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매일 저녁 김천역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연락처를 건네받았다고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김천역에 도착했을 때, 평일 저녁인데도 역 앞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51번째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천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집회에 모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의 얼굴에 희망이 담겨 있었다. 무대 위에 올라가서 ‘조용한 노래를 부르게 되어 미안하다’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응원을 전했다. 사드배치 반대를 상징하는 파란색 리본을 얻어 기타 가방에 달았고, ‘사드가고 평화오라’는 구호를 마음에 담아 부산으로 돌아왔다.

 

기타 가방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희망하는 나비뱃지,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노란리본,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파란리본이 나란히 있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나라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발칵 뒤집혔다. 잊지 말아야 하고 싸워야 할 문제들이 계속해서 늘어나 차곡차곡 쌓이다가 폭발해 버린 것만 같이 느껴졌다. 미국의 압력이나 대기업의 이익을 뒤에 숨기고 있는 국가권력에 계란으로 바위 치는 상황이 반복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싸워온 대상의 실체는 언제나 무언가에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  경북 김천 사드배치 반대 집회. 두근대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 이내

 

페이스북에 ‘음악인 시국선언’이라는 페이지가 만들어졌다. 전국에서 일어나는 시국선언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나도 참여할 수 있다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서명을 했다. 서울에서는 그 2천3백여 명의 연명을 모아 음악인들이 거리에서 ‘민주공화국 부활을 위한 음악인 시국선언’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언제나 쟁점이 되는 상황에 달려가 노래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야마가타 트윅스터’도 그 자리에서 이단옆차기를 하며 “돈만 아는 저질”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신대철 권진원 등 음악인 시국선언 “이러려고 음악했나 자괴감”, 오마이뉴스 11월 8일) 

 

나는 내가 노래를 짓고 부르는 게 신기했고, 그걸 누군가가 듣고 좋아해주는 게 더 신기한 채로 몇 년 지내오면서 끊임없이 ‘나는 음악가인가?’ 하는 질문 앞에 선다. 한 번 그렇게 불러보자고 결심을 한 순간이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칼럼을 시작하던 시기와 같다. 그런 고민이 들 때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대단한 노래를 만드는 것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는 늘 자본 밖에서 활동하면서 자립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행동하니까. 그러면서 힘을 모아야 하는 곳에 달려가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풍자가 담긴 사회 비판적인 노래 말로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일상적이고 사적인 이야기가 담긴 내 조용한 노래도 과연 그와 같은 길로 갈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따라오면서 또 다시 고민에 빠진다.

 

‘해시태그 성폭력 말하기 운동’을 보며

 

김천에서 다시 연락이 와서, 김천역 사드배치 반대 집회에 또 한 번 가게 되었다. 이번은 79번째 집회였다. 날씨는 더 추워졌고 여전히 역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최순실이 대한민국의 무기 거래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보고, 사드배치에 제동이 걸릴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무대에 올랐다. 두 번째 서는 무대라 긴장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서 ‘노래로 여러분을 따뜻하게 해드리겠다’는 너스레까지 떨었다. 모인 분들은 촛불을 든 손을 흔들어 환영해주셨다.

 

▶ 김천에서 열린 79번째 사드배치 반대집회.    ⓒ 이내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국방부가 김천 사드배치를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칠십 아홉 번의 밤을 함께 모여 김천 주민들이 마음을 모으는 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 싸움의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그들은 강정의 구럼비 바위를 깨부수어 해군기지를 짓고, 밀양 할머니들을 내치며 고압 송전탑을 세우고, 배가 침몰해도 사람을 구조하지 않고, 바다 속에서 3백 명이 죽어도 원인을 밝히려하지 않는 그들과 같은 자들일까.

 

중고등학생들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겁 많고 쉽게 포기하는 어른인 내가 많이 부끄러워졌다. 정치적인 것에서 언제나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걸 말하는 언어가 마비된 느낌이다. 내가 힘 앞에서 굳어져 버리는 조건반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은, 최근 확산되고 있는 ‘해시태그 성폭력 말하기 운동’이다. 자신이 경험한 성폭력을 ‘말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운동은 짧은 시간동안 수 없이 많은 목소리들을 모았다. 한동안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내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동시에 마비가 풀리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 목소리와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강한 응원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바뀔 수는 없으니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다. 자본 밖에서 자립을 실험하고, 약한 자들이 힘을 모아야 하는 자리에 힘을 보태고, 갈등과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하고, 할 수 있는 만큼의 행동을 계속하는 것. 그 방향으로 내 노래가 뚜벅뚜벅 길 위를 걸었으면 좋겠다.  (이내)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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