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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예민한 거야’ 예민해져야 하지 않나요?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⑮ 성차별 발언 대응하기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그.여.자.들.의.물.결. [일다]
“넌 너무 예민해.”
아마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셀 수 없이 들어왔다. 가족, 직장, 친구들 사이 할 것 없이 말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를 받는다고 느꼈을 때, 불쾌하고 억울한 감정을 어렵사리 털어놓으면 주위에선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신경 꺼버려” 하며 무턱대고 위로하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특히 남자들)의 반응은 “그래도 대놓고 무시한 건 아니잖아”, “좋은 의도로 한 말이잖아?”로 바뀌곤 했고, “네가 이해해” 하며 도리어 나를 타일렀다.
내가 느낀 불쾌감과 억울함은, 성차별이라고 생각한 나의 판단은, 정말 나의 예민함에서 기인한 것일까?
당연히 해야 할 가사노동을 “해줄까?”라니…
지난 추석의 일이다. 며칠 전부터 엄마는 송편을 빚어야 하니 일찍 오라고 전화로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빚는 송편이 제일 예쁘다나? 엄마는 아버지나 오빠가 한 번도 빚은 적 없는 송편 모양을 어디서 미리 보기라도 한 걸까? 명절 하루 전, 본가에 가 송편을 빚고 갖가지 전을 부쳤다.
저녁이 되자 나와 마찬가지로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는 오빠가 도착했다. ‘일찍 좀 오지 그랬냐’며 엄마가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자 오빠는 ‘내가 노는 사람이냐’며 응수했다. ‘나는 뭐 노는 사람이냐’고 내가 한 마디 보탰다. 오빠는 ‘그럼 너도 늦게 오지 뭐 하러 일찍 와서 고생이냐’며, 엄마와 내가 오후 내내 부쳐둔 전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뒤늦게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집에 기름 냄새가 많이 나니 환기를 해야 한다며, 이미 열려 있는 창문을 다시 확인하고는 역시나 바구니에 담아둔 송편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 가사노동은 엄마와 내게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아버지와 오빠에게는 안해도 되거나 해주는 일이다. ⓒ안윤
물을 마시러 부엌에 온 오빠가 개수대에 수북이 쌓인 설거지를 힐끔 보며 말했다.
“설거지 내가 해줄까?”
엄마는 반색하며 ‘아들이 있어 좋다’는 너스레와 함께 고무장갑을 오빠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아들!”이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나와 두 살 터울밖에 나지 않는 오빠에게 있어서, 명절에 가족 모두가 분담해야 하는 가사노동은 왜 여전히 ‘해주는’ 일인 것일까. 엄마는 왜 그런 아들의 태도를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는 것일까.
직장 동료나 친구들, 또는 애인이 성차별적인 언사를 할 때면 일침을 가하는 나이지만 정작 가족 안에서만큼은 침묵하거나 묵인하는 경우가 잦다. 너무 오랫동안 굳어진 역할이니까,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참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직장 상사로부터 들은 일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편의 손님맞이로 종일 분주했던 그녀는 손님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홀로 부엌에서 설거지와 뒷정리를 했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은 아내를 힐끔 쳐다보며 “도와줄까?” 물었다. 화가 난 그녀가 “할 거면 하고, 도와줄 거면 하지 마!” 라고 응수했다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이번 명절에는 나도 참지 않고 오빠에게 말했다.
“왜 해준다고 말해? 오빠도 해야 하는 일이잖아. 그냥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면 되잖아.”
그러자 오빠의 짜증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예민하기는!”
“어디 여자가” 따위의 말은 이제 사라졌다고?
성별에 관계없이 함께 나누어 해야 할 일들 앞에서 남성들은 왜 “할게”라고 하지 않고, 뒷짐 지고 멀찍이 바라보는 태도로 “도와줄까?” 묻는 것일까. 여자들을 위해 애써주겠다고?
부모님이나 친척 어른들, 우리의 부모 세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제는 성차별적인 언사가 많이 줄었고, 세상이 나아졌다고 평가하는 것을 듣게 되곤 한다.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구박과 멸시를 당하는 일은 거의 없지 않느냐고. “어디 여자가…”, “여자가 뭘 안다고?” 같은 말들도 예전에 비하면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맞다. 이제는 “어디 여자가…”, “여자가 뭘 안다고?” 같은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을지언정 그와 비슷한 의미는 여전히 다른 표현 속에, 또는 보이지 않는 괄호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해줄까?”, “도와줄까?”라는 남자들의 말만 해도 그렇다. 겉보기에는 호의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에서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이 말에 숨겨진 함의는 사실 이렇다. ‘가사노동은 마땅히 여자인 네가 할 일이지 남자인 내가 할 일은 아니지만, 네가 정 힘들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이렇게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깔고 있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은연중에 못 박으며, 여성에게 일종의 시혜를 베풀 듯이 말한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호의를 갖고 하는 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기분 상한 내색을 하거나 반박하면 도리어 당황해하며 불쾌해한다. ‘고마운 줄 모른다’고 하거나, ‘다른 집에 가봐라, 이런 남자 없다’고 응수하기도 한다.
“그런 건 여자가 하는 거야”, “남자가 그런 걸 왜 해?” 같은 말이 성차별적 가치관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면, “해줄까?” “도와줄까?”라는 말은 여성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척 친절한 얼굴로 성별 이중 잣대를 강요하는 말이다. 이런 말은 도처에 산재되어 있다.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흘려듣는 사이, 싸우고 맞서기 싫어 귀를 닫는 사이, 더 뻔뻔해지며 여성을 향한 차별을 강고하게 만들고 있다.
▶ 여자들이 들어왔던 말과, 여자들이 하려는 말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여성과 언어에 대해 생각했다. ⓒ안윤
‘여자분들이라서…’ 팀장의 말은 배려인가 차별인가
몇 년 전 다니던 회사 회식 자리에서였다. 새로 부임한 팀장이 건배 제의를 하며 팀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는데, 요지는 이랬다.
‘우리 팀 대부분이 여자분들이어서 사실 발령받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가 남자라서 이런 저런 불만이 많으실 텐데도 참고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팀에 여자분들이 많다는 건 이래서 좋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여자라서 어떻고 남자라서 어떻다’라고 설명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멀찍이 앉은 팀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팀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옆 팀원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당시 팀장은 팀원들과 잘 융화되기 위해 사무실 안팎에서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업무 분장은 불가피하게 변동되었고, 팀원들 사이에 크고 작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팀장에게 직접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이동이 잦은 자리였고 삼년 동안 다섯 번째로 부임한 팀장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팀원들은 불만을 제기하기보다는 참고 적응 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팀장은 팀원들이 불만을 갖는 이유가 ‘자신이 남자이기 때문’이며, ‘여자 팀원들은 불만이 있어도 잘 참고 이해해 준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아가 그런 점 때문에 여자 팀원들이 좋다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간혹 팀장은 지각한 팀원에게 이렇게 경고를 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여자분들은 남자들과 달리 아침에 준비할 것도 많고 바쁘실 거라는 거 압니다. 그래도 지각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참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팀장은 깍듯하게 팀원들을 대했고, 대놓고 듣는 이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모욕을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각의 사유에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을 뿐, 거기에 성별을 이유로 끌어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런 말은 개인의 사정을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지각하는 사람을 ‘여성’으로 범주화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몇몇 동료들에게 얘기했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다른 남자 상사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양호하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봐도 팀장은 질이 나쁘거나 상사로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팀장의 말 속에는 늘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잣대가 분명하게 존재했고,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그 잣대는 예의, 친절, 배려 같은 태도로 그럴싸하게 포장되곤 했다. 마치 여자 직원들을 이해해주는 것처럼.
한번은 남자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 팀장, 젠더 감수성이 어느 정도 있네.”
어느 정도라니?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가 그 정도면 고맙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결국 나에게 돌아온 말은 그 동안 숱하게 들어왔던 말, 늘 내 말문을 떡하니 막아서며 힘이 빠지게 만들던 말이었다.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평화를 원한다면, 더 예민해져야 한다
그렇다. 나는 예민하다. 여성으로서 가족과 직장, 친구들 사이에서 말하고 듣는 일에 예민하다. 토씨 하나, 단어 하나, 어감에 예민하다. 근데, 내가 예민한 게 대체 뭐가 어때서!
우리가 살아가며 뱉고 듣는 말은 모두 의미를 발생시키고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한다. 그러니 어찌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말 한마디로 한 사람의 생이 왜곡되기도 하고, 침해를 받고 심지어 무너지기도 하는데 어찌 예민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성별 고정관념을 담은 말들이, 차별을 내포한 말들이 불쾌하다고 표현하고, 부당하다고 꼬집고, 옳지 않다고 고발하는 여성들에게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일축해버릴 수 있나? 예민하다는 말을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이 듣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들어온 말의 무게가 남성들에 비해 훨씬 무거우며, 그로인해 여성들이 더욱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말 한마디로 상처 받은 경험이 적다는 것, 자신을 향한 말에 민감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당연하게 여길 일도, 자랑할만한 거리도 아니다. 지금까지 남들보다 차별과 무시로부터 자유로웠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니까.
▶ 사전에서 예민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봤다. ⓒ안윤
예민하다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감각이 날카로움’, ‘사물에 대한 이해나 판단이 날카롭고 빠름’이라는 의미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우리 사회에서 예민하다는 말은 오용되고 있는 것 같다. 성차별 발언에 문제 제기하는 여성들에게 ‘네가 너무 예민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뭘 그리 시시콜콜 시비를 가리려 드느냐고. 그만 좀 하라고. 그들에게 나는 되묻고 싶다.
“어떻게 당신은 예민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예민해지려고 한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라는 상대방의 무심한 반문에 굴하지 않으려고 한다. 감각의 촉수를 곤두세우고 주위에서 흘러넘치는 말에 귀 기울이려고 한다. 함부로 여성을 재단하는 말들, 친절과 이해를 가장하며 성차별의 잣대를 결코 버리지 않는 말들의 민낯을 보려고 애쓴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채집하고 생채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성추행과 성폭력, 여성의 권리가 함부로 짓밟히고 생명을 위협받는 이 시대에서 예민한 귀를 갖는 것만으로 과연 충분하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단은 우리의 일상에서 귀를 기울이고 들어볼 일이다. 사소한 토씨, 단어에서부터, 늘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말에서부터, 그 속에 숨은 뼈와 가시를 발라내고 볼 일이다. 예민하게 듣는 일, 어떤 말이 자신을 함부로 재단하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일, 거기서부터 시작해 볼 일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충분하진 않을지라도 훗날의 나에게는 무용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가진 예민함이 여성으로서의 예민함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예민함으로 해석되기를 기대한다.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반가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게 되기를.
“멋져요. 사람들 말을 정말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네요.” 안윤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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