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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아닌 몸, 나는 그냥 장애인?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⑭ 장애여성의 차별 경험 드러내기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내 나이 열한 살,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의 일이다. 평소와 다름없던 그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쿵’ 소리와 함께 넘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내 오른쪽 다리는 금이 갔고 3개월 동안 깁스를 해야 했다. 내 장애로 인해 언젠가는 걷기 힘들어질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때가 될 줄은 몰랐다. 깁스를 푼 직후부터 바로 전동휠체어를 타기 시작해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사실 전동휠체어가 국내에 보급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용할 수 있었으니, 나는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은 “그때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1년 정도는 더 걸어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에게 있어서 ‘걷는다’는 건 ‘힘든 일’ 그럼에도 ‘칭찬받을 수 있는 일’ 이렇게 딱 두 가지 의미였기 때문에, 걷는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기보다는 휠체어로 다니기 너무 각박한 세상에서 문턱이나 계단에 부딪힐 때면 그 때 생각이 난다.

 

▶ 대학 시절 나와 함께 해주었던 친구들.  (졸업 기념 파티)   ⓒ진은선

 

난 왜 ‘장애인’이란 말이 그토록 듣기 싫었을까

 

처음으로 전동휠체어를 타고 본 세상은 이전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바로 ‘타인의 시선’이었다. 전동휠체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더욱 더 ‘장애인’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뭐, 백퍼센트 자유롭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때는 유난히 나를 ‘쳐다보는’ 시선 자체를 일일이 다 경계하며, 내가 원하지 않아도 마주치게 되는 눈들과 들려오는 말들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나조차 ‘이렇게 사는 게 참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과 듣기 싫었던 말을 하나 꼽으라면 그건 바로 ‘장애인’이었다. 나는 왜 장애인이라는 말이 그토록 듣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단지 내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싫었을까? 아니면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운 걸까? 스스로 내 장애가 수용되지 않은 걸까? 아무튼 나의 그 복잡한 감정들을 정리하거나 내 언어로 표현할 길은 없었다.

 

장애인이라는 말이 싫었던 그 때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평소라면 그냥 눈 한 번 흘기고 지나갔을 일을 그날은 하필, 나를 보고 “장애인이다!” 외치며 도망갔던 동네꼬마를 찾기 위해 친구들과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반나절이 지난 끝에 그 아이의 집을 찾아냈었는데 허탈하게도, 내가 사는 곳 창문 너머에서도 보이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집 문을 두드리고 아이에게 “왜 그랬어?”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그냥”이라는 건조한 한마디를 했을 뿐,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사과는 받아냈지만, 그 아이의 말처럼 다른 이들 모두 ‘나를 향해 던진 말들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이유였겠구나’ 생각하니 억울한 감정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났다.

 

그저 ‘장애인’으로 퉁 쳐지는 나의 몸과 정체성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다른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때를 돌이켜본다면 나는 장애가 있는 내 몸을 부정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매 순간 물리적으로 배제되고 매 순간 장애인으로 대상화되는 현실 앞에서 나를 장애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수많은 상황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너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소위 ‘정상’이라는 기준 안에 날 포함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내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 (어떤 이에는 부모님, 활동보조인 그리고 다수의 모르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머리는 길러서 뭐해, 관리도 못하면서.”

“화장은 누가 해줬어? 아침에 준비하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바쁠 텐데 대충 바르고 다녀.”

“넌 어떻게 남들 하는 거 다하고 살려 그러니?”

 

“장애인이 말이야~”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걱정하고 멋대로 판단했다.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몰랐던 그때, 나의 몸도 나의 정체성도 그저 ‘장애인’으로 퉁 쳐졌다. 나는 여성도 무엇도 아닌 그저 ‘장애인’이었다.

 

▶ <장애여성공감> 회원모임 중 하나인 20-30대 장애여성 자조모임.  ⓒ출처: wde.or.kr

 

일상이 투쟁, “지하철 막말들”

 

장애만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설명하는 다른 언어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다 1년 전 ‘장애여성공감’이라는 단체를 만나게 되면서 ‘장애여성’으로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

 

장애여성공감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느낌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곳에선 장애여성들이 자신의 경험과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만큼, 장애여성들이 모여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일이 많았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고민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가 겪은 일들이 더 이상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 비장애인과 이성애중심, 남성중심의 사회구조 안에서 겪는 배제와 차별을 장애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소중했고 특별했다.

 

우리가 모였을 때 수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핫’한 주제는 바로 ‘지하철 막말’들이었다. 일상과 굉장히 밀접한 장소인 지하철에서 겪는 ‘폭력’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얼굴은 예쁜데 몸이 그래서 어째…”

“혼자 나왔어? 보호자는 어디가고?”

“늦은 시간에 다니다 위험하면 어쩌려고, 누가 데려가면 반항도 못할 거 아냐.”

 

여기서 공통적인 포인트는 ‘반말’과 ‘혀를 차는 것’이다. 어쩜 다들 그리 똑같은 반응인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들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발생하기 때문에, 사실 그 자리에서 대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일이 다 대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내가 반박했을 때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한 반응을 보인다면? 혹은 그로인해 위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나는 그 상황을 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것일까….

 

“하루에 한 번쯤은 꼭 욕이 나온다”

“지하철 타다가 성질 다 버리겠다.”

 

우리는 우리가 느낀 감정들을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끊어 오르는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나름, 눈치를 보면서 힐끗거리는데 이건 그나마 괜찮은 거”라고 말할 정도로 나를 비롯하여 장애여성들은 끊임없는 일상 속 투쟁의 한가운데 있다. 


▶ 매일 들어도 매일 빡치는 아무말 대잔치. 어디서 단체로 학원을 다니나 싶은 한결같은 막말들.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독립정책배달, 한다” 2호. 

 

차별을 드러낼 수 있는 힘

 

최근 들어 나는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혼자 다닐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시선과 상황들에 직면하는 중이다. 이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막막하다. 장애여성에게 파트너가 있다는 것 자체에 놀라는 반응들은 일단 무시하고 넘어가더라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언어, 이를테면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고도의 방식들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

 

특히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한 번 보고 다시는 안 봐도 되는’ 특성 상 인사치레랍시고 함부로 건네는 말들은 나를 정말 불편하게 만든다.

 

“(설마) 남자친구 맞아?”

“(도대체) 어떻게 만났어?”

“(남자친구가) 대단하네, 혹은 착하네.”

“(힘들겠지만) 행복하세요” 등등.

 

물론 그들은 괄호 안의 말들은 생략하지만, 말투와 눈빛으로, 표정으로 이 모든 말들을 다 전달한다.

 

나는 “여기에 커플들 천지인데 왜 하필 나한테 관심을 갖나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그저 분노를 속으로만 삭일뿐이다. 한국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 ‘매력적이지 않은 몸’으로 여겨지는 장애여성의 위치가 확연히 드러나는 그 상황들에 대해 잘 대처할 수 있을만한 요령은 아직 내게 없다.

 

하지만 내겐 그보다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 말에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함께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이면서도 참 어렵게 느껴지는데, 공감이야 말로 각자의 삶 속에서 차별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을 줄 수 가장 중요한 조건 아닐까?

 

한국사회에서 ‘당당한’ 장애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 헤릴린 루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마라>(책세상, 2015)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마라>의 저자이자 장애여성 당사자이며 장애/여성인권운동가 헤릴린 루소(Harilyn Rousso)는 이렇게 말한다.

 

“대단하다는 꼬리표는 무시당하는 것보다 낫다. 당신 입에서 뇌물처럼 달콤하게 굴러 나오는 ‘대단하다’라는 찬사는 투명인간이 되는 것,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나를 처음 봤을 때 피상적이고 편견 섞인 반응을 한 차례 극복한 다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고나서 나를 좋아할지 싫어할지 결정하는 편이 나는 더 좋다. 그렇게 내린 판단은 최소한 진짜일 테니까.”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글을 쓰는 과정이 나에게 결코 쉽지 않았다. 차별의 경험들을 스스로 직면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어려웠다. 그러나 나의 차별을 직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 있다. 내가 이야기한 모든 경험들이 장애여성‘만’의 경험으로 규정되고, 비장애여성들에겐 ‘나와는 다른 경험’으로 판단될까봐 걱정스러웠다.

 

친한 주변 사람들도 내 앞에서 ‘장애’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거나 혹은 주저한다.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릴린 루소가 이야기했듯 장애여성을 대할 때 그저 ‘조심스러운 태도’만 취해가지고는 “장애가 있지만 이래서~ 너는 참 대단하다”는 식의 편견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묻는다. 한국사회에서 ‘당당한’ 장애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어떤 것일까?

 

장애여성의 경험이 장애여성‘만’의 경험이 되지 않고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서 공통된 문제들을 잘 나눌 수 있을 때, 그러면서도 서로의 차이와 다름으로 인해 겪는 경험들 또한 잘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당당한 장애여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은선)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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