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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태했다, 나는 불법이다

<질문교차로 인문학카페36.5º> 여성은 자기 몸의 주인인가?


※ 춘천에서 인문학카페36.5º를 운영하는 홍승은 씨가 기존의 관념과 사소한 것들에 의문을 던지는 ‘질문교차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임신에 대한 공포

 

“몸 간수 잘해야 돼. 결국, 여자만 손해야.”

 

팬티에 피가 처음 묻어나온 날 엄마는 내게 말했다. 남자는 다 똑같으니까 네가 알아서 몸을 잘 챙기라고도 당부했다. 나는 엄마의 말에 묘한 반항심을 느꼈다. 왜 여자만 손해라는 거지? 여자가 손해라는 말이 여자를 더 움츠러들게 하는 거 아닌가? 엄마 때랑 우리 때는 세대가 다른데, 엄마는 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삐딱했던 나는 더 자유롭게 섹스를 즐기는 쪽으로 ‘몸 간수’를 택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해도 혹시나 하는 임신 가능성이 내 발목을 잡았다. 첫 섹스 이후 연애 관계를 지속하면서, 매달 배란일과 생리 예정일을 체크하면서 긴장하는 날들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콘돔, 경구 피임약 등 다양한 피임 방법을 활용했지만, 언제나 정석대로만 피임하진 못했다. 가끔 약을 깜빡하기도 했고, 콘돔을 끼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섹스를 할 때도 있었다. 유독 불안할 때에는 사후피임약을 먹었다.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확인하는 날들도 여러 번 있었다.

 

▶ 여성들의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요구하는 캠페인  ⓒNARAL Pro-Choice America

 

스물두 살 때였다. 느낌이 안 좋다는 친구의 말에, 함께 산부인과에 갔다. 진료를 받고 나온 친구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더니 울면서 말했다. “나 이제 어떡해? 정말 피임 잘했는데… 내 인생 끝났어.” 임신 4주차. 계획한 것도, 원하지도 않은 임신이었다. 그날 온종일 불안해하는 친구를 달래면서 말했다. “아니야.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 인생이 왜 끝나. 수술 받으면 돼. 수술받자.” 침착하게 말은 했지만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나 역시 마음 졸이며 생리할 날을 기다리던 많은 날이 겹쳐졌다. “에이, 임신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아”라고 말하던 당시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뱉은 말처럼, ‘아무리 피임을 잘 해도 이런 일은 얼마든 일어날 수 있구나’ 싶었다.

 

친구는 다음 날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했다. 낙태가 불법이기 때문에 수소문해서 겨우 찾은 산부인과에서 했는데, 수술 후 마취제 부작용으로 심한 구토와 함께 두통을 앓았다. 그런데도 친구는 의료진에게 항의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술은 애초에 불법이었으니까.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경험을 통해 막연하게 느꼈던 임신의 두려움이 내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인공임신중절을 하다

 

3년 전 늦봄, 예정일이 일주일 지나도 생리가 나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해본 임신 테스트기에 두 개의 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산부인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니 임신 3주차라고 했다. 내 몸이 임신을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몸에는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입덧을 했다. 느끼한 피자 한 판을 꾸역꾸역 먹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리는 버스에 탄 것처럼, 앉으나 서나 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임신이 된 걸 알기 전 남자친구에게 ‘속이 너무 울렁거리는데 혹시 임신한 건 아닐까 걱정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임신이라고 해도 그렇게 초기부터 입덧하진 않아” 라고 말하며 염려 말라고 말했다.

 

임신인 걸 알게 됐을 때도 그가 내 손을 꼭 붙잡고 함께 있었지만, 큰 위안이 되진 않았다. 혼전 임신일 경우, 애인이 망설임 없이 애를 지우자고 말할 까봐 여자들이 두려워한다고 하던데, 정작 당시 남자친구에게 ‘낳자’는 말을 들은 나는 그 말조차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망설임 없이 지우자고 했다면 그게 더 상처가 됐을 것 같다.) 아기를 지우거나 낳거나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나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둘이라고 생각했던 관계가 희미해지고, 덩그러니 혼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남자친구는 애를 낳으면 잘 기를 자신이 있다며 여유를 부렸지만, 나는 입덧 때문에 속이 뒤집힐 듯 메슥거려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낳을 자신도 없고, 낳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 날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소문으로 수술을 해주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처음 들어본 허름한 산부인과였다. 병원에서는 현금으로 50만원을 요구했다. 카드로 결재하면 역추적을 당해서 의사 면허가 박탈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섰을 때, 차가운 공기와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다. 딱딱한 수술대에 누운 나는 이내 깊은 수면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 아래에서는 피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괴롭히던 입덧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남자들의 낙태이야기 vs. 여자들의 낙태이야기

 

▶ 최근 낙태금지 법안에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벌인 폴란드 여성들의 <검은 월요일> 피켓 중에서. 의회와 정부는 결국 법안을 폐기했다.


대학원 동기들과 낙태를 화두로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남자선배 A가 말했다. “낙태가 합법화되면 성범죄율이 높아질 거야. 무엇보다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여기면 안 돼.” 역시 남자선배 B가 거들었다. “맞아, 그러면 남자들이 더 피임을 안 할걸? 여자들에게 더 불리할 거야.” 무신론자이자 보수적 정치관을 가져서 항상 A선배에게 딴지를 걸던 B선배였다. 매번 부딪치던 두 남자가 이 문제에서만큼은 하나가 돼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왜 국가가 나서서 불법이니 합법이니 따져요?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왜 선배들이 간섭해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야죠. 설사 애를 낳아도 기를 환경이 되나요? 사회적 시선은 어떻고요? 오히려 무책임한 건 무턱대고 낳으라는 쪽이죠. 지우지 못하게만 하는 게 무슨 범죄예방이라는 거예요? 그럴 거면 여자 몸을 통제하지 말고 남자 몸을 통제해야죠!” 격앙된 내 반응에 그들은 웃으며 “네가 아직 현실을 몰라서 그래, 너를 위해서라도 낙태는 불법이어야 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여전히 인공임신중절은 불법이다. 7년 전 친구가, 3년 전 내가, 1년 전 내 동생이 낙태를 했을 때에도, 그랬다. 동생이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하고 2주 만에 잠적해버린 동생의 전 애인에게 나는 메일을 보냈었다. “둘이 함께한 일인데, 내 동생 몸만 불법이 되었네요.”

 

불법의 주체는 바로 여성의 몸이다. 함께 잠자리를 가진 남성의 몸은 불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남성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다. 어떤 남자들은 그런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낙태하려는 여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를 위한다니!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도덕적인 섹스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낙태는 불법이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는 그 말들 속에 정작 나는 없다.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한 친구가 운을 뗐다. “나 아직 생리를 안 해. 콘돔을 끼긴 했는데 임신 안 되겠지? 그래도 왠지 불안하다.” 다른 친구가 말한다. “에이 콘돔 끼면 임신 거의 안 돼. 음, 그래도 백 퍼센트 피임은 없다고는 하던데”, “콘돔을 끼긴 한 거야? 그런 남자애 흔치 않던데. 나는 섹스하다가 중간에 몰래 콘돔을 빼는 애도 있었어”, “헐 그래? 그러다가 임신하는 거지. 걔처럼”, “아 걔도 임신했었어? 나도 했었는데.”

 

뜬금없는 내 고백(?)에 친구들이 놀라서 물었다. “어? 너 임신 했었어?” “응. 나 했었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가 말했다. “아, 나도 했었는데”, “헐 그래? 내 친구 누구도 했더라”, “근데 병원 알아보기 힘들지 않았어? 비싸기도 하고”, “그래 근데 대부분 암묵적으로 해주더라. 현금으로만 받으니까 장사도 되잖아”, “그러게, 당장 돈 없으면 수술도 못 받아.”

 

“내 친구는 임신해서 결혼했는데, 지금은 이혼 준비 중이야. 근데 부부가 서로 아이를 안 맡으려고 소송 중이래”, “정말? 애 생겼다고 결혼하는 애들이 아직 있다니… 낳을 때만 책임감 있으면 단가? 애가 크는 긴 세월 어쩌려고. 준비 안 됐는데 낳는 게 더 무책임한 거 아니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들 속, 어떤 공공연한 금기가 이미 우리 삶에 걸쳐있다.

 

▶ 임신중절의 권리를 요구하는 미국 유권자들. ⓒNARAL Pro-Choice America

 

‘비도덕적 진료행위’ 누구를 위한 도덕인가?

 

최근 보건복지부가 입법 예고한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개정안에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우(모자보건법 위반)’를 포함한 것에 대해, 산부인과 의사들이 항의하고 있다. 의사들이 처벌을 받아선 안 된다며, 그대로 통과시키면 모든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단다. 임신도, 낙태도,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정부와 의료진의 손에 저울질되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아찔하다.

 

진료 목적 외에 마약을 처방하거나 환자에게 성폭력을 행한 것과 같은 의료범죄와 등치시켜 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분류해 처벌하겠다는 정부를 보며, 누구를 위한 도덕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생력이 없고, 아직 생명으로 볼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존재를 고려하는 도덕은 이처럼 공공연하게 얘기되지만, 원치 않은 임신으로 신체적, 사회적 단절과 위험을 끌어안아야하는 여성을 위한 도덕은 없다.

 

나는 첫 생리를 하고부터 임신할 수 있게 된 내 몸이 싫었다. 그보다 싫은 건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박탈감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친숙하게 느꼈던 내 몸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이런 때면 거부했던 엄마의 말이 맴돈다. ‘여자만 손해지, 여자만 손해야.’ 나를 향했던 엄마의 말이 사회를 향한다. ‘여자만 손해지, 여자만 손해야.’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여자의 손해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대꾸하고 싶지만, 이미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불법이다. (홍승은)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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