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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첫날 밤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다시 태어나다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집은 단순히 당신이 어쩌다 살게 된 가옥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이다.”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태고의 동굴 같은, 오래된 자궁 같은 방

 

구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에 집은 완성되었다. 아무런 짐 없이 이불 한 채만 들고 첫날밤을 맞으러 집에 갔다.

 

낮은 흙돌담 안에 작고 단아한 집이 있다.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흙 마당이다. 아직 나무 한 그루 심기지 않은 신생의 마당이지만 지는 햇살이 가득 들어와 있다. 마당을 한 바퀴 돈다. 마을 어디선가 나무를 태우는지 메케하면서도 그리운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온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다.


▶ 텅 빈 방. 고요하고 충만한 기운이 감돈다.   ⓒ 김혜련


방은 텅 비어 있다.

 

지는 햇살이 서향 창을 통해 방 안쪽까지 길게 들어온다. 햇살을 받은 반들하고 단단한 방바닥은 투명하게 빛난다. 텅 빈 방에 앉으니 고요하다. 그 고요가 어찌나 생생한지 손가락을 튕기면 ‘퉁’ 하고 소리가 날 것 같다. 고요하고 충만한 기운이 감도는 방 전체를 둘러본다.

 

불필요한 모든 살은 다 사라지고 단단한 뼈만 남은 것 같은 거칠고 검은 나무 기둥들, 한지를 바른 부드러운 벽, 황토 흙을 그대로 노출시킨 천정과 울퉁불퉁 구부러진 서까래들, 그들을 모아 제자리를 잡고 있는 긴 종도리(한옥 지붕구조에서 들보에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둘러 얹혀서 연직하중 또는 수평하중을 받는 가로재 중 하나), 여유 있는 곡선을 그리며 지붕을 떠받치는 대들보.

 

넉넉하고 편안했다. 방이 나를 품고 있는 듯 안온했다. 포대기에 싸여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천진무구하게 세상이 믿어졌다. 어둑한 방은 태고의 어느 동굴에 들어온 듯도 하고, 오래된 빈 자궁 안으로 들어온 듯도 했다. 길러낼 것 다 길러내고 이제는 스스로 깊어질 일만 남은 자궁 말이다.

 

문득 한 인디언 부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대 인디언 부족들에게 폐경은 또 다른 신비로운 변화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들은 여자가 임신했을 때 월경의 정지는 아기를 만들기 위해 몸에 피를 담는다고 생각했는데, 폐경 또한 여성들이 몸에 피를 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는 아기가 아니라 ‘지혜’를 만들기 위해서다.”(진 시노다 볼린 <우리 속에 있는 지혜의 여신들>에서)

 

내가 이 낡은 집을 왜 그리 좋아했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경주라는 땅에 끌리고, 남산 마을에 끌리고, 그리고 작고 낡은 집에 끌린, 어떤 일관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새 집을 짓겠다는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그건 단순히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 대한 기억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집의 모성(母性)’(바슐라르 <공간의 시학>에서)에 기대었던 것이다. 내 안의 아이가 찾는 엄마가 집이었다. 집을 통해 그 아이는 엄마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집을 지은 건 엄마를 만든 거였다. 그 엄마는 따뜻해야 했다. 온기(溫氣)는 새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쉼, 받아들여짐, 깃들 수 있음.... 그 엄마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아늑하고 다정한 엄마여야 했다. 아이는 집을 지음으로써 엄마를 찾고 그 안에서 의심 없는 천진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처 없이 다시 태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불 속에서 웅크리며 불러본 이름

 

▶ 이불을 깔아놓은 방. 어질고 허전하다. ⓒ 김혜련


걸레로 방을 닦았다. 다섯 번 콩댐(두터운 한지에 콩과 생들기름을 7:3의 비율로 섞어 바르는 것)을 한 노르스름한 장판이 단단하고 까슬하게 손으로 전해졌다. 비어있는 집은 유정(有情)한 것들로 차 있다. 새 아파트를 들어설 때의 휑하고 써늘한 느낌, 시멘트 냄새, 머리를 아프게 하고 눈을 따갑게 하는 화학성분 냄새 대신 다사롭고 아늑한 냄새가 났다. 들기름 냄새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할머니 집에서 맡았던, 먹고 싶던 연기 냄새 같기도 한 향기. 여기 사시던 할머니의 흔적, 아이들의 흔적이 배인 공간이었다.

 

석양이 지는 창에 광목 커튼을 내린다. 방은 ‘어질고 허전한’(최순우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에서) 빛으로 가득 찬다. 비어있음이 주는 단순한 아름다움에 가슴이 젖는다. 이불을 깔고 누웠다. 따뜻하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여 본다. 왼쪽, 오른 쪽, 다리를 말아 태아 같이 웅크려 본다. 입이 벌어진다.

 

“엄마”

 

저절로 말이 나왔다. 이불을 감고 뒹굴었다. 그러다 일어나 앉아 벽에다 대고 가만히 불러본다.

 

“엄마, 엄마~”

 

오른 벽, 왼 벽, 천장을 향해, 방바닥을 향해 “엄마, 엄마, 따뜻해, 따뜻해.”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느낌이 올라온다.

 

“내가 엄마를 만들었어. 내가 창조한 엄마야. ‘엄마’도 와서 이 엄마에게 안기면 좋겠어.”

 

엄마의 임종 앞에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의식이 있다 없다 했다. 의식이 있을 때는 찬송가를 들려 달라고 했다. 의식이 없을 때는 입을 오므리고 뭔가를 빠는 시늉을 했다. 가까이 가니 “엄마, 엄마…” 희미한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무의식 상태에서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그 깊은 무의식이 드러난 것이었을까….

 

무언가가 뒷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얼얼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 아 엄마는 젖먹이였구나. 평생 엄마 젖을 찾았구나. 젖먹이가 엄마 노릇을 해야 했구나. 그 버거움과 두려움, 막막함이 어떠했을까.’

 

엄마의 외로움이 온몸을 타고 전해져 왔다. 엄마는 여섯 살 때 엄마를 잃고 거의 고아처럼 자랐다. 엄마의 내면에 자라지 못한 젖먹이 아이가 있었다는 걸, 엄마의 임종 앞에서야 알았다. “아, 아, 어떡해, 어떡해… 엄마. 몰랐어, 몰랐어….”

 

기쁜 것과 슬픈 것, 아픈 것… 그 모두가 뒤섞여 눈물로 흘렀다. 집을 갖게 된 기쁨과 이 ‘집 엄마’를 드리고 싶은 ‘엄마’가 없다는 슬픔으로 가슴이 얼얼해졌다.

 

▶ 석양이 지는 창문에 커튼을 내리다.   ⓒ 김혜련

 

아침, 새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 눈을 뜨다

 

나도 몰래 잠이 들었다. 자다가 깨어나져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이라니…! 내 집 마당이다. 믿기지 않아 어둠 속에서 발을 굴러 본다. 동쪽 산에서 후우우 후우욱 구슬픈 새소리가 난다. 저 소리로 잠이 깼나. 담요로 몸을 두르고 잠시 앉아있다. 고요한 공기에 울려 퍼지는 먼 곳의 새 소리. 이 집에서 처음 듣는 소리. 남산 집, 나의 우주에서 첫 가을의 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동향인 문창호지를 통해 반투명한 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와 있다. 햇살에 몸을 담그고 누워있자니 다른 어떤 세계로 들어온 듯 했다. 나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 와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손에 만져질 듯 했다. 지금껏 살아왔던 어떤 시공간을 지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러나 앞으로의 내 삶이 펼쳐질 새로운 시간과 공간. 나는 나도 알지 못할 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일종의 외경심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집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이 공간이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 새로운 공간이 무엇을 할지 호기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랄 뿐.

 

이제 집은 나를 품고 긴 부화(孵化)에 들 것이다. ▣ 김혜련   여성주의 저널 일다

 

▶ 밤. 집은 나를 품고 부화(孵化) 중이다.   ⓒ그림: 김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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