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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입문식’, 우울과 함께 존재하기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쓸쓸히 아픈 시간들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전쟁 끝, 평화 시작’ 같은 건 없다
집을 다 고치고 이제 평화롭게 살 일만 남았는데, 마음 한 구석이 쓸쓸했다. 집을 찾고 고치고 하는 설렘과 활기, 다양한 사건, 시적(詩的)으로 고양된 상태가 끝나자 우울했다. 연속극 다 끝나고 더 이상 재미있는 것도 없는,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듯 허망했다.
그토록 원하던 집을 얻었는데 허망하다니… 마치 성공한 자가 겪는 우울 같았다. 그토록 원하던 집을 얻었는데, 그것을 얻었다는 이유로 허망했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다 이룬 자의 허망에는 일종의 포만이 있다. 배고파 열심히 밥 먹고 났을 때, 배는 부른데 왠지 허전한 느낌. 그러나 이 느낌엔 그런 포만이 없었다.
▶ 11월의 안개 낀 아침 마을 풍경. ⓒ 김혜련
나는 혼자 집을 짓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집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짓는 거지 혼자 짓는 게 아니었다. 지리산 수행에서 가슴을 찢기며 만난 게 내 안의 ‘사랑 병 환자’였다. 이 환자는 늘 사랑타령을 했다. 엄마로 상징되는 ‘첫 눈에 알아볼’ 필생의 사랑을 기다리는 환자. “그런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사기(詐欺)야, 사기극이야.” 녹음테이프를 돌리듯 같은 말만 되풀이 하던 이 환자는 가슴이 다 무너진 어느 순간 체념을 한 것 같았다. “그래, 없을 거야. 없겠지…” 그렇게 단념했던 환자가 집이 다 이루어지자 다시 등장해 “우울해, 우울해~” 하며 내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건 오래된 마음의 습관이었다. 습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고 또 올 것이었다. 그 때마다 “이크~, 그 환자분께서 오셨군!” 알아채고 지나가기를 기다릴 일이었다.
원한다면 함께 살 사람이 왜 없겠는가. 혼자 집을 짓는 일이 고립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건 스스로의 ‘장소’(場所)를 마련하는 일이다. 내 우주를 어디에 세우고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나는 내 우주(宇宙)를 세웠다. 내 공간에 초대할 사람, 함께 살 사람에 대해 호기심 어린, 열려 있는 마음이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평생 싸움만 하다가 이제 싸울 일이 없으니 우울한 거였다.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이 평온한 세상을 어찌 살지 몰라 쩔쩔매는 것처럼 평온한 일상을 어찌 살지 몰라서 온 우울이었다.
사는 게 늘 전쟁인 사람이 있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나 그게 뭔지를 애초부터 모르는 사람. 갈 데까지 가야 하는 인간이 있다. 끝까지 가서 막다른 곳에 머리를 처박고서야 결국 되돌아서는 종류의 인간이 있다.
이런 인간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하는 싸움이 싸움인 줄 모른다. ‘인간다움의 이상’이니 ‘자기성숙’이니 ‘자유를 위한 저항’이니 거창한 이상을 내세우지만 그가 내세우는 그 이상이 ‘결핍’에서 나온 ‘과잉욕망’이라면 싸움일 뿐이다. 생의 초기 받았어야 할 따뜻함, 태초의 온기를 맛보지 못한 인류의 몇 십 퍼센트는 평화가 뭔지 모른다. 그들은 평생의 허기에 시달리는 운명을 부여받고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한 전쟁터로 나서게 된다. 목이 메도록 원하는 것은 평화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일 뿐이다.
▶ 석양의 양피못 주변 풍경. ⓒ 김혜련
나는 간절히 평화를 원하나, 할 수 있는 건 전쟁뿐인 삶을 살아온 인간이었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온 ‘한 줌의 평화’ 앞에서 그것조차 누릴 수 없는 몸과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불안과 긴장에 길들여져 있다. 피해의식과 분노에 익숙하고 늘 초조하고 조급증에 시달린다. 자학과 갈등, 무기력에 오래 길들여져 있다. 삶이 전쟁터니 언제나 아드레날린 과잉 상태로 교감 신경만이 일방적으로 설쳐댄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지 못해 일탈한다. 일탈의 자유, 잠시 오는 해방감의 단맛을 보기 위해 일상을 파괴한다. 그리고 파괴의 힘으로 충전된다. 내 몸은 고통과 파괴를 즐기는 메커니즘에 익숙하다. 늘 맹목적인 열정과 권태 사이를 오가며 살아왔다.
평화는 낯선 무엇이다. 전쟁에 길든 몸과 마음은 평화를 지루함이나 권태, 우울로 인식한다. 온 몸에 힘주고 살다가 더 이상 힘 줄 일이 없으니 맥이 빠진다. 평화를 위해 허겁지겁 달려온 자, 막상 평화가 오니 그것을 누릴 아무런 내적 자원도 없는 자…. 그게 나였다.
나의 쓸쓸함과 우울은 평화를 살아보지 못한 자가 치러야할 당연한 삶의 몫이었다. ‘전쟁 끝, 평화 시작’ 같은 건 없다. 평화는 성취의 목표가 아니다.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평화는 존재의 한 방식이다. 단지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평화롭게 존재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과정이 평화롭지 않았는데 결과가 평화롭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평화로운 상태를 지속할 수 없었을까?
지리산에서 명상 수행을 할 때 가끔씩 평화로웠다. 벽소령 가는 길목 산 중턱에 스승의 암자가 있었다. 사람도, 전기도 없는 외진 산, 거대한 바위 아래 지어진 작은 움막이었다. 스승이 그 암자에 날 올려 보낸 것은 수행 이 년차가 넘은 어느 해 겨울이었다. 그의 표현을 따르면 ‘근기’(根機, 사람이 가진 종교적인 소질이나 능력)가 된 거였다.
▶ 지리산 암자. 사람도 전기도 없는 벽소령 중턱의 암자. ⓒ 김혜련
그곳에서 보름쯤의 낮과 밤을 보냈다. 일찍 어두워지는 긴 겨울밤을 무얼 하고 지냈는지 지금 별 기억이 없다. 인공적 불빛 없는 오지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별들, 그 초현실적인 아름다움. 절대 고독의 투명한 순간들…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어떤 순간의 ‘평화’다.
그 날도 다른 날처럼 두 사람이 똑바로 누우면 꽉 찰 만큼의 좁은 방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열어놓은 방문으로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들어왔다. 바람은 차가운데 장작을 땐 방은 따끈했다. 내가 들고 있는 찻잔도 따뜻했다.
차를 마시고 있는 어느 순간 ‘내가 차(茶)’인지, ‘차가 나’인지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차를 마시는 건지, 차가 나를 마시는 건지도 분간이 안 갔다. ‘차(茶)’와 ‘차를 마시는 행위’와 ‘내’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로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물과 나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는 막이 스르르 무너져 내린 듯한 느낌이랄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몸과 마음에서 모든 헛심이 빠져나가 사물이 아주 투명해진 그 순간의 평화.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일상에서 유지되지 않았다. 그런 평화는 의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치 않은 어느 순간 왔다.
나는 명상을 하면서 왜 평화로운 상태를 지속할 수 없었을까? 평화의 순간들이 내 몸에 축적되지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수행의 목표가 ‘여기’ 아닌 ‘저기’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말로는 늘 ‘지금 여기’를 강조하지만) 명상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견성(見性, 마음 닦는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체험의 경지)의 한 순간’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참선의 길에서는 언제 무엇으로 깨달음이 올지 모른다. 깨달음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도 오고, 스승이 내리치는 ‘죽비 한 대’로도 오고, ‘똥 막대기’로도 온다. 그러니 수행자는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견성의 순간을 위해 자신을 닦아야 한다. 그 어떤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깨달음이 올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로또’에 당첨되려고 하는 마음 상태와도 닮았다. ‘한 방’에 터져야 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다. 언젠지 알 수 없는 견성의 그 날에 있다. 견성만 하면 그 때부터 ‘전쟁 끝 평화 시작’이었다. 그러니 수행 과정의 일상적 평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마음과 몸은 바짝 말라 있었다.
우울과 쓸쓸함의 시간을 받아들이다
난 일탈과 파괴를 통해 오는 순간적 해방감이 평화라고 착각하는 대신, 지루한 일상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했다. 평화로 존재하기를, 평화 속에 있기를 익혀야했다. 그건 삶의 목표가 저 멀리에 있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 추수가 끝난 초겨울의 마을의 논. ⓒ 김혜련
난 그 우울과 쓸쓸함의 시간을 받아들였다. 익숙한 방식으로 “왜 이런 거지, 뭐가 잘못된 걸까?” 하며 재빨리 분석하고 성찰해서 그럴듯한 사건이나 일을 만들어 달아나는 대신 그냥 우울을 맞이했다.
그건 우울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맞아 보는 일이었다. 우울과 함께 있어도 괜찮다는 걸 몸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삶의 기쁘고 즐거운 측면만 보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태도를 버리고 삶의 쓰고 어두운 측면까지도 ‘저항 없이’ 받아들이려는 몸짓이기도 했다. 우울과 함께 존재하기. 지루한 장마철 곰팡이 피어오르는 방에서 눅눅한 이불을 덮고 배앓이를 하듯, 쓸쓸히 아픈 시간들이었다.
나는 이 시간이 평화의 입문식이 되기를 바랐다. (김혜련)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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