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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기품을 드러낸 집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집수리하기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확 트인 부엌과 실내 화장실

 

집의 원형을 가능한 건드리지 않는 게 집 수리의 첫 번째 원칙이었다. 그 원칙을 깨고 편의 위주로 생각한 건 부엌과 화장실이다. 부엌을 확장하고, 없는 실내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집의 서쪽 면을 확장했다. 편리한 부엌과 화장실은 내 삶의 역사와 필요에서 나왔다. 특히 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었다.


▶ 크고 확 트인 부엌을 만들었다.  이 공간이 나를 끌어들일 수 있도록...  ⓒ 김혜련

 

부엌을 넓히고 서쪽으로 큰 창을 냈다. 크고 확 트인 부엌을 만들었다. 그리고 싱크대나 기타 부엌 시설들을 신경 써서 환하고 견고한 것들로 들였다. 들어서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무언가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곳, 평화롭게 천천히 밥을 먹을 수 있는 곳…. 부엌이라는 공간 자체가 나를 끌어들일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원한 대로 훤하고 쾌적한 부엌이 만들어졌다. 이 부엌에서 나는 내 삶의 숙원인 ‘즐거운 밥하기’를 수행(修行)할 것이다. 평생의 ‘괴로운 밥’을 ‘즐거운 밥’으로 바꾸는 일, 그 일을 하기 위해 나는 부엌을 최대한 기분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 싶었다. 내 삶의 영웅적 과제는 다름 아닌 밥을 하고 몸을 돌보는 일상의 사소한 일,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해내는 것이었다. 그 사소한 일을 영웅적 용기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닦아나가는 일이 내게 남은 삶의 과제였다.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생태화장실 짓는 거 아닌가요?”

 

내가 실내에 화장실을 들여 놓으려고 하자 한 지인이 의아해했다. 그의 말대로 실외 생태화장실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이 집에는 작고 소박한 재래식 화장실이 어울렸다. 내 먹을 것을 직접 농사지어 먹고 싶었으니 먹고 배설하는 것의 자연스런 순환을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했다.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먹고 배설하는, 삶의 근원적인 활동에 무능한 내 몸에 대한 배려가 더 우선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 자신, 내 생명에게 옳았다.

 

내가 자랐던 광산촌 사택엔 공동화장실이 있었다. 그 화장실은 언제나 더러웠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오물투성이었다.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겨울이면 언 똥이 산처럼 쌓이고, 여름이면 구더기들이 밖으로 나와 득시글거리며 기어다녔다. 언제나 똥을 참고 살았다.

 

광산촌의 푸세식 공동화장실을 벗어나고도 내 몸의 기억은 평생의 변비로 남았다. 나는 변을 보는 일에 유난히 예민한 몸이 되었다. 몸은 긴장하고 변을 잘 내보내지 않았다. 그런 내 몸을 배려해야 했다. 냄새 없고 깨끗한 화장실, 쾌적하고 환한 곳이어야 했다. 그곳에서 오랜 몸의 기억을 바꾸어 가고 싶었다. 안방을 확장한 공간에 화장실이 들어갔다. 1.5평 정도의, 환하고 정갈한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 한옥의 문.  안방과 건넌방의 낡은 문들을 떼어서 닦았다.  ⓒ 김혜련

 

할머니와 채송화

 

집을 고치는 일 중에서 내가 직접 한 것은 ‘문 닦기’와 ‘콩댐하기’였다. 한옥엔 문이 많아 일도 많았다. 안방, 건넌방의 낡은 문들을 떼어서 닦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 먼지가 끼었는지, 물을 뿌려두고 불리고 칫솔로 띠 살 사이사이를 닦고 하는 일을 며칠 동안 계속했다. 우물곁에서 문을 닦다가 부러진 문살들이 마치 빠진 이처럼 보이면서 저절로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러자 내가 닦는 것이 살과 살 사이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듬성하던 이빨 사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야, 야, 저 좀 봐라. 참 예쁘쟈~”

 

대학 이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한여름의 하염없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느닷없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가 가리킨 곳은 골목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협소한 광산촌 사택과 사택 사이에 난 좁은 길이었다. 시멘트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할머니의 손가락 끝을 따라 겨우 찾아낸 게 있었다. 앞 사택의 담과 골목 사이에 난, 5센티 폭도 안 되어 보이는 곳에 심어놓은 채송화였다. 차마 땅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한 줌 흙이었다. 할머니는 거기다 채송화 씨를 뿌리고 이제 몇 송이 피어난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채송화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담뱃대를 탕탕 두들기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 얼굴에 황홀한 듯 부끄러운 듯 살포시 웃음이 배어있었다. 무슨 괴기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그 얼굴은 해독할 수 없는 낯선 외계인의 얼굴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팔십이 넘은 한 인간에게 꽃 한 송이를 바라보기 위해 구차할 만큼 협소한 땅에 씨를 뿌리고 그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심정 같은 게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방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꽃을 볼 수 있도록 밖을 내다보는 용도로 문에 붙여둔 유리와 꽃의 위치까지도 맞춰 심어 놓았다.

 

스무 살 젊음이 버겁고 막막해 미칠 것 같던 내게 그때 할머니의 모습은 낯선 충격이었다. 어떤 서늘한,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이기도 했다. 팔십이 넘어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깊고 싱싱하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묘한 충격….

 

▶ 마당의 채송화.  나는 이제 채송화를 바라보며 감탄하던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 김혜련

 

이제 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 나이에도 삶의 생기가, 젊음과는 다른 원숙한 생기가 있다! 어떤 세월의 그늘이나 아픔에도 꺼지지 않는 재에 묻힌 숯불, 구름에 가려있는 샛별처럼 우리의 몸에 내재해 있는 것. 자신에 대한 욕망이 사그라져야 보이는 것, 세상에 자기를 세우기 위한 조바심이 해소됐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삶의 근원적 측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때 새롭게 보게 된 세계에 대한 욕망이 무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여리고 순한 배냇짓 같은 생기를.

 

집을 고치면서 나는 수시로 그 생기를 느꼈다. 오래된 것들이 지닌 단단한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생기, 소멸해가는 것들의 고즈넉한 아름다움, 그늘의 신비(神秘)와 어둠의 신성(神聖)한 생기를 느꼈다. 나는 집에다 그 생기를 불어 넣고 싶었다.

 

‘콩댐’을 하고 한지를 바르다

 

집에 호사를 부린 것은 벽지였다. 백년을 지탱해준 집에 대한 선물이랄까. 문경의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이 만든 한지였다.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우유 빛보다 투명한 밝은 빛을 띤 한지로 도배를 한 집은 옛 자태를 찾은 듯 은은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방바닥도 한지로 발랐다. 한지로 장판을 하려면 ‘콩댐’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두터운 한지에 콩과 생들기름을 7:3의 비율로 섞어 바르는 것이다. 문경 한지에서 콩댐하는 법을 배웠다. 반드시 생들기름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냥 들기름을 쓰면 기름이 쩔어서 못 쓴단다. 게다가 색이 너무 짙어져서 은은한 노란 빛깔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경주의 기름 방앗간을 찾아다녔지만 생들기름을 짜는 곳은 없었다. 잘 짜지지도 않고 기름 양도 적어서 볶아서 짠단다. 결국 상주 은척에 있는 오래된 방앗간을 물색해 찾아냈다.

 

“걱정 말아여, 새벽 네 시면 일어나 일해여. 제 시간에 보내줄 수 있어여~”

 

전화로 울리는, 평생 기름을 짰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크고 믿음직스러웠다.

 

▶ 다섯 번의 콩댐을 하고 한지를 바른 방바닥.   ⓒ 김혜련

 

불린 콩을 곱게 갈아 생들기름과 섞어서 고운 면 주머니에 넣어 하라는 대로 방바닥에 굴렸다. 장판을 버릴까봐 발에는 비닐을 씌우고 작업을 해야 했다. 한 번 바르고 닷새 동안 불 때면서 말리고, 다시 바르고 또 닷새를 말리고…. 그렇게 다섯 번의 콩댐을 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 빛깔이 고르게 배이지도 않고, 바닥만 칠해야 하는데 벽 쪽으로도 올라오고, 자세히 보면 엉망이지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한 창조의 기쁨이었다. 다 마른 방바닥을 디디니 단단하고 찹찹했다. 비닐 장판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몸과 분리되어 미끈거리고 끈적대는 느낌 없이 몸에 착 붙는 느낌이었다.

 

옛집은 아름답게 복원되었다

 

집수리의 마무리는 담을 쌓고 대문을 다는 일이었다. 무너진 시멘트 블록 담 대신 이 집과 주변 자연에 어울리는 담을 쌓고 싶었다. 집 뒤쪽에 기적처럼 남아 있는 백년쯤 된 흙돌담과 어울리게 담을 쌓았다. 황토와 돌로 만든 담. 나지막하게 쌓아올린 흙돌담은 집과 잘 어울렸고 마을 골목과도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나무로 짠 대문을 달고 나니 넉 달이 조금 넘은 동안의 공사가 마무리됐다.

 

집은 아름답게 복원되었다. 남산 자락 아래 겸허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집. 집은 소박한 기품을 드러냈다. 백년이 된 집이니 앞으로도 계속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곳을 고치고 나면 저곳을 고쳐야 할 것이다. 저곳을 고치면, 고친 이곳을 다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이 집은 내 몸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 늙음은 퇴락이 아니라 무르익은 원숙함일 것이다. 내 몸과 집이 함께 무르익어 갈 것이다. 늦가을 햇빛 속에 피어난, 퇴락과 소멸의 계기를 머금은 깊고 평온한 채송화 빛처럼.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 완성된 집.  이 집은 내 몸과 함께 무르익어 갈 것이다.  ⓒ 김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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