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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음’의 세계로의 하강(下降)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애벌레의 삶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남은 인생 뭐하고 살 건데?
우울을 피하지 않고 그 안에 있자, 쓰라린 것들이 우글거리며 올라왔다. 처음엔 그럴듯한 이타심과 도덕성의 베일을 쓴 자못 심각한 얼굴이었다. 이제 나이도 들어가면서 세상을 위해 뭔가 기여해야 하지 않나, 그동안 살아온 것을 나름 환원해야지, 세상에 이로운 무엇인가를 해야지….
그러나 두터운 베일 아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이 메두사의 얼굴로 너울거렸다.
‘이제 뭐 하고 살 거야? 수행해서 구루가 되고 싶었잖아. 깨달아서 무아(無我)가 되어서 그 무아를 뻐기고 싶었잖아. 우아하게 보살 미소를 날리며 그럴듯하게 살고 싶었잖아. 그게 다 결핍에서 온 아귀 짓인 걸 알았으니 천만 다행이다만, 남은 인생 뭐하고 살 건데? 노년은 한없이 길어진다는데…’
▶ 내 안에 우글거리며 올라오는 것들처럼 자귀나무 꽃들이 오글오글 피어난다. ⓒ 김혜련
영성 모임을 같이 하던 친구들은 각자 전문 분야를 가고 있었다. 누구는 상담가가 되고, 누구는 명상 지도자가 되고, 누구는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있고… 그들의 소식을 듣는 날은 마음이 복잡했다.
‘나도 대학원을 가서 초심리학(parapsychology; 초능력, 염력, 예언 등 의식의 영역을 넘어선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공부를 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지금쯤 사회적으로 뭔가 되어 있을 텐데. 지금이라도 세상에 써 먹을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걸 따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날은 인터넷에서 영성이나 초심리학에 관련된 대학원 과정을 찾아 헤맸다.
“선생님, 책 나와야 할 때가 한참 지나지 않았나요.”
“네가 그리 살 줄 몰랐다. 글 쓰고 살 줄 알았지, 시골 가 뭐하고 있는 건지…”
과거의 사람들이 하는 말에 동요된 날에는,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이 어딜까 고심하며 노년이나 영성에 관한 책들을 찾아대곤 했다.
아무도 날 모르고, “저 여자는 뭐야?” 의심받으며 무시까지 당하고 들어온 날은 지역 사회에 내가 누군지 알려야만 될 것 같았다. ‘나 정도의 이력이면 페미니즘과 영성, 글쓰기를 접맥한 자서전 쓰기나 명상적 글쓰기 같은 걸 얼마든지 해볼 수 있잖아.’ 그런 날은 대학 평생교육원의 강사 이력서를 기웃거렸다.
며칠을, 때로는 수 주일을 이런 생각들에 우울하게 끌려 다녔다.
‘사회적 존재 소멸’에 대한 두려움
나는 삶의 의미를 ‘나 밖의’ 것에서 찾는 데 익숙했다. 자기 존재감이 없으니 타자를 통해 그것을 얻으려고 했다. 세상의 인정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이른바 ‘흡혈귀 인격’이었다.
나는 자아실현을 세상에 날 ‘드러내는’ 것으로 하려고 했다. 차마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존재의 심화’를 위해 수행을 하러 간 것 또한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행위였다.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유행이 된 것이다. 나는 사회적 성취의 맛을 보았고, 더 큰 성취를 꿈꾼 자가 갖는 ‘사회적 존재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나의 우울은 이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드러내는’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이 있다. 자기 안의 샘물은 솟아나, 흘러 넘쳐야 한다. 그런데 샘물이 미처 차오르기도 전에 또는 샘물의 양보다 과도하게 자기를 드러낸다. 샘물의 바닥을 긁다가 안 되면 없는 샘물까지 상상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런 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홀로 있거나, 나이 들어가면서 필연적으로 고갈되기 마련이다. 한때 사회적 명망을 가졌던 사람들이 늙어가는 모습에 실망하게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드러내는’ 것을 따라가면 몸의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나는 더 이상 그 길을 가지 않으려 하나, 그 길에 익숙한 나는 계속 그 길로 가려고 했다. ‘과거의 몸’과 ‘현재의 몸’이 격전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가 나의 우울이기도 했다.
▶ 새 순. 겨울의 두터운 껍질을 벗고서야 새 순은 올라온다. ⓒ 김혜련
허공에 떠다니는 데 익숙한 사람이 어느 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땅의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더구나 그 땅을 무시하고, 심지어 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저절로 땅을 믿고 살아가는 일은 가능치도 않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거리.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손발까지 내려오는 거리. 그 까마득한 거리 사이에서 과거의 관성은 오늘은 이리로 내일은 저리로 날 끌고 다니고 있었다.
내면에서 울리는 계시, ‘살아라~’
삶의 계시는 위대한 선지자들만 받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한 개인도 계시적 말씀을 받는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무엇이 아니다. 자기 내면 깊이에서 올라오는 소리다. 생명 본연의 소리며 영적 깨우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소리는 내가 믿는 자아의 단단한 벽을 뚫고 어느 순간 직관적 섬광처럼 울린다. 많은 경우 그 말씀은 이성의 합리화나 자기 정당화 등으로 인해 건져 올려지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 계시 같은 순간적 울림을 자각적으로 건져 올리고 그것을 깊이 사유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개인의 삶은 좀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리라. 나의 내면에서 울리는 계시는 분명했다.
‘살아라~ 네게 부족한 건 삶이다!’
그건 ‘네 자아(自我)보다 존재가 훨씬 크고 넓다. 존재의 질서가 네가 만드는 질서보다 훨씬 자유롭고 아름답다. 그걸 믿고 가라!’는 말이었다. ‘땅에 발 딛고 살아라’, ‘너의 근원을 받쳐 주는 일을 해라’, ‘밥을 정성껏 해 네 생명을 공경해라’, 계속 도망만 다니면 넌 ‘영원히 공허한 떠돌이가 되리라’, ‘영영 그럴듯한 가짜가 되리라’, ‘쓰레기 같은 죽음을 맞이하리라…’로 번역되는 말씀이었다.
▶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생명. ⓒ 김혜련
‘과거의 몸’과 마음의 팽팽한 저항을 받으며
그러나 과거는 얼마나 거대한 권력이던가? 헛살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새로운 인식이 왔다고 해서, 몸이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몸을 혹사하고 대충 밥을 먹으며,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과거는 내 몸과 마음에 완강한 습관으로 자리해 마치 과거라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 빠져나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조여 오는 덫의 통증처럼 일상으로 내려오려고 할수록 몸과 마음은 저항으로 팽팽해졌다.
‘일상? 몸, 생명, 밥… 이런, 정말 낯설기만 하잖아. 몸? 몸이 뭔지, 뭘 원하는지 내가 아나? 관심이 있었어야 알지, 몸이 있다는 걸 알 때는 아플 때밖에 없었는걸. 생명? 언제 내가 생명이라는 걸 인식한 적 있었나? 그 질서가 어떠한지 아나? 그건 그냥 저절로 있는 거지 뭐 알고 배워야 하나? 밥, 그걸 제대로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밥 공부? 밥이 뭔지, 내가 밥을 하고 내 생명과 다른 생명에게 밥을 먹이는 행위에 정성을 다하고 이윽고 그 행위가 신성함에 이르는 공부를 하겠다고?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나 하는 거야? 밥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일 톤 트럭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하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면서?’
저항은 끝이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을 처음 태어난 아기가 세상을 알아가듯 알아가야 한다고? 깊이 귀 기울고, 오래 바라보고, 전념해야 한다고? 왜?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 누가 알아준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데, 써 먹을 수도 없는데, 왜 하려는 거야? 제대로 할 수나 있겠어? 평생 안하던 짓을 이제 해서 뭘 하겠다는 거야? 그래, 새롭게 한다고 하자.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거야? 누구한테 배울 건데? 네가 원하는 걸 속 시원히 알려주던 책이 있던? 네가 원하는 삶을 먼저 살아서 모델이 되어 줄 사람이 있던? 그런 삶이 네가 원하는 충만한 삶이 되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어?’
“주여,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수행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니, 그 길은 ‘과거의 몸’을 ‘새로운 몸’으로 바꾸어야 하는 고행의 길이었다. 그야말로 몸을 ‘뜯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 마당에 널린 빨래. ‘하찮은’ 것들의 세계. ⓒ 김혜련
하강의 자리, 일상의 자리로
나는 평생 해왔던, 그럴듯한 관념 속에서 관념과 관념 사이를 부나방처럼 날아다니기를 그만 두고 땅을 기는 애벌레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애벌레의 삶은 느리고, 구차하고, 지리멸렬하다. 맨 몸으로 배를 땅에 밀착시키고, 온 몸을 움직여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고독하고 어두운 굼벵이의 시간을 겪어야 한다. 그러나 애초에 애벌레 없는 나비가 없듯이 내 삶의 구체성과 물리적 변화가 없는 변화라는 것은 가짜이거나 거짓인 것이다. 그렇게 ‘가짜’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이 애벌레 없는 나비가 되려고 했던, 허구(虛構)의 삶이었다는 쓰디 쓴 자각, 더 이상 이렇게 살다가는 구차한 노년과 쓰레기 같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두려움, 무엇보다 평생 내 삶을 추동해온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상향의 충동이 역설적으로 ‘하강(下降)의 자리’, ‘일상의 자리’로 날 데려왔다.
인간다움에 대한 이상이 ‘저 높은’ 곳을 향해 가게 했지만 그 허공의 끝에서 만난 건 어쩌면 가장 ‘낮은’ 곳, ‘하찮은’ 것들이었다. 그 ‘하찮음’의 세계를 살아가기 두려워(싫어) 나는 그토록 오래 허공을 헤맸는지 모른다. 삶을 직면할 수 없어, 천리만리를 헤매며 관념만 키웠는지 모른다.
인간다움의 이상이 허공에 뜬 길을 가게 했지만, 그 이상은 다시 날 새로운 자리로 데려왔다. 그건 몸이고 밥이며 생명이었다. (김혜련)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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